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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보고

한국 농업의 미래, ‘덴마크 모델’에서 찾자

정부는 은행처럼 냉정, 농민은 기업처럼 치밀

  • 김영우 프랑스 파리 9대학 세이연구소 객원연구원 yngkim1@yahoo.com/사진 GAMMA

한국 농업의 미래, ‘덴마크 모델’에서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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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농업도 이제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곡물형 농업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땅이 좁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낙농업 중심으로 전환, 유럽 최고의 농업강국으로 거듭난 덴마크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한국 농업의 미래, ‘덴마크 모델’에서 찾자

덴마크 정부는 농장 소유 규제를 풀어 농업의 대규모화를 유도하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해 EU 보조금 철폐 이후의 시장환경에도 대비하고 있다.

지난6월 세계무역기구(WTO) 쌀 협상의 비준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운 정치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한 국회 비준도 정기국회로 넘어갈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주요국들과 합의한 쌀 협상의 세부내용이 밝혀지자 농민들은 정부가 이면합의를 통해 국민을 기만했다며 분노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과, 배 등 일부 과수 분야를 양보한 것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일 뿐, 결코 이면합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유엔은 지난해 쌀을 ‘올해의 농산물’로 지정하면서 ‘쌀은 생명(Rice is life)’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쌀 한 톨에도 농부의 땀과 인생이 담겨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명구다. 더구나 우리에게 쌀은 생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쌀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대표적 농산물일 뿐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생활과 문화가 담겨 있는 문화상품이자 문화재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불행하게도 우리 쌀이 세계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개방에 따른 농민의 피해를 예상하면서도 개방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을 안게 됐다.

이런 면에서 일찍부터 농업선진국으로 알려진 덴마크의 사례가 위기에 빠진 한국농업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덴마크가 오늘날과 같은 농업선진국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이후 덴마크의 역사를 간략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던 덴마크는 1864년 프로이센과 벌인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비스마르크의 지도 아래 강대해진 프로이센 제국에 곡창지역인 유틀란트 반도의 3분의 1을 빼앗긴 덴마크는 이후 북유럽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의 영국이나 독일, 스웨덴이 산업혁명 이후 근대화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던 데 비해 덴마크는 산업발전은커녕 여전히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게다가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인해 중앙은행이 파산위기에 몰릴 정도로 국가경제는 수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비탄에 빠진 덴마크 국민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끈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그룬트비(1783~1872) 목사와 달가스(1828~1894) 중령이다.

그룬트비는 “밖에서 잃은 땅을 안에서 찾아 새로운 덴마크를 건설하자”고 외치면서 황무지로 버려진 미개척 농지를 개발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덴마크의 비참한 현실을 타파하려면 덴마크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새로운 낙농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룬트비의 사상은 1844년 국민고등학교(Folkehojs kole)가 설립되어 기숙사 공동생활을 통해 애국심에 넘치는 농업후계자를 양성하면서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한편 스위스에 살던 프랑스계 후손 달가스는 황무지 개간을 위해 ‘국토개발협회(DDH·Det Danske Hedesels kab)’를 설립하고 유틀란트 반도의 토양을 연구한 후 알프스 지역의 나무를 이식하여 개간에 박차를 가했다. 그룬트비와 달가스의 활약은 ‘원조 새마을운동’에 불을 댕긴 것이다.

19세기 초까지 덴마크의 주요 작물은 보리·밀·흑맥·귀리 등 곡물류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1870년 무렵부터 저장 및 운송수단의 발달로 미국·캐나다·호주 등의 곡물이 유럽시장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유럽산 곡물 가격이 폭락했고, 곧이어 유럽에서 곡물생산은 한계에 이르렀다.

덴마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1870~80년대에 걸쳐 정부와 지식층의 주도 아래, 덴마크는 농업경영의 비중을 곡물생산에서 낙농제품 생산으로 전환해 나갔다. 당시 그룬트비와 달가스가 앞장서서 새로 개간한 지역을 낙농 형태의 농업 중심으로 개발하고 협동조합을 활성화하면서 덴마크 농업은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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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우 프랑스 파리 9대학 세이연구소 객원연구원 yngkim1@yahoo.com/사진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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