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 리거 박지성

“아버지, 전 맨유에서 스타가 되길 원치 않아요”

  • 이영미 일요신문 기자 riveroflym@hanmail.net

    입력2005-07-29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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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리그에서 좌절과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세계 정상권에 진입한 박지성. 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성 과정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다. 축구를 처음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J리그, 네덜란드 리그를 거쳐 맨유에 입단하기까지의 비화를 전격 공개한다.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 리거 박지성
    불과5개월 전의 일이다. 2월4일 2006 독일월드컵 축구 아시아 최종예선 쿠웨이트전에 출전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박지성은 당시 기자에게 PSV 에인트호벤과의 재계약 문제를 거론하면서 “궁극적인 목표는 프리미어리그 진출이지만, 후보 선수에 머문다면 굳이 이적을 도모하기보다 잔류를 택하겠다”고 말했다.

    2004~200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를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긴 지난 5월에도 박지성은 진로에 대해 “1~2년 후 PSV가 지금과 같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도 나는 빅 리그에 갈 자신이 있다”며 잔류하는 쪽에 무게를 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유럽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다.

    5개월 전엔 상상조차 못한 일을 겪고 있는 박지성은 이제 히딩크 감독이 아닌 퍼거슨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한 채 사진을 찍고, PSV 유니폼이 아닌 맨유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반 니스텔루이, 웨인 루니, 로이 킨, 라이언 긱스 같은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아시아투어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환경, 새로운 생활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 박지성의 맨유 입성 과정을 지켜본 기자로선 ‘인간 승리’라는 말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순수청년’ ‘순둥이’ ‘애늙은이’로 표현되는 박지성, 맨유 입단에서 축구를 처음 시작한 세류초등학교 시절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의 축구인생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출국하던 날



    7월5일 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성이가 내일 떠나요. 갑자기 출국 일정이 앞당겨졌어요. 지성이 들어오면 전화 드리라고 할게요.”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 박지성과의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박씨는 그걸 잊지 않고 있었다. 예정대로 여유 있게 출국했다면 글쎄, 주가 폭등세에 있는 박지성과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내일 출국한다는 얘기에 인터뷰가 물 건너갔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이전부터 친분이 있다 해도 지금의 박지성은 기자도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다. 매니지먼트사가 워낙 철저하게 개별 접촉을 막고 있기도 하지만, 박지성도 이전(이것도 불과 2개월 전이다)처럼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 6일 아침, 박지성이 공항에 도착할 시각과 주차구역을 알아낸 뒤 박지성을 태운 차가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박지성의 아버지 차가 등장했고, 반가운 마음에 그 차를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흰색 소렌토 차가 나타나더니 박지성이 그 차로 옮겨 타는 게 아닌가. 잠이 덜 깬 듯한 박지성과 눈인사만 나눈 채 서둘러 주차장을 벗어나는 소렌토의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박지성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면서 CF 보충 촬영이 있어 공항 주변의 호텔로 갔다가 30분 뒤에 돌아올 거란 내용을 귀띔해주곤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40분 후 박지성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박지성도 말할 준비가 돼 있었다.

    “담담해요. 여기서 뭐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요. 가서 직접 부딪혀봐야 하는 거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가면 힘들 것 같아서 오히려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성질 급한 퍼거슨 감독의 갑작스런 호출에 금쪽같은 휴가를 이틀이나 반납하는 점이 못내 아쉬웠지만, 박지성의 마음은 이미 ‘맨유 맨’이 돼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줄곧 서울에 머무른 탓에 수원 집의 아버지와도 얼굴을 자주 마주칠 수 없었다고 한다. 공항으로 나오기 직전 아버지가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즐기면서 하라”고 당부했지만 박지성은 마음이 무겁기만 한 모양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러나 예상은 가능하죠. 결코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아니, 지금까지 제가 힘들게 겪었던 일을 거기선 한층 업그레이드 된 수준으로 겪게 될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도망갈 수는 없잖아요. 부딪치고 극복해야지. 만약 제가 처음 외국에 진출하는 거라면, 그래서 맨체스터로 가게 된 거라면 지금 제 얼굴은 표정 관리가 안 될 거예요. 너무 흥분하고, 너무 좋아라 했을 겁니다. 일본에서 프로 생활을 처음 시작해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에 ‘햇빛 쨍쨍’보다는 ‘구름 짙게 드리운 우중충한 날씨’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은 모두 제 몫이니까요.”

    “그래도 가야 합니다”

    ‘변화’라는 말과 거리가 먼 듯한 박지성이지만, 인터뷰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수준급으로 변해 있었다.

    “부모님은 제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프리미어 리그 진출 자체만으로도 성공한 거라고 하시는데 전 좀 달라요. 이왕 간 거, 잘해서, 더 성공해서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게 큰 ‘선물’이 될 수도 있죠. 잘 풀어갈 거예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계속 최면을 걸어봐요.”

    더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출국 수속과 공식 인터뷰를 마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박지성과 걸으면서 계속 얘기를 나눴다. 박지성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퍼거슨 감독에 대해 겉으로는 별 걱정을 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완전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관계라 부담스럽긴 하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지금까지 수많은 감독을 거치면서 단 한번도 감독과 마찰을 빚거나 감독의 지시를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어느 팀, 어느 나라 감독이든지 자신이 잘 맞춰간다면 크게 힘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박지성은 2003년 4월 기자가 ‘일요신문’에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를 진행할 때 맨유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는 “며칠 전 맨유와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을 봤다”면서 “같은 축구선수가 봐도 예술이라고 느낄 만큼 단단한 조직력과 개인기의 절묘한 조화가 거의 환상적인 수준”이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 중에는 월드컵 때 직접 상대한 선수도 있다.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는 대선수들이지만, 막상 각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맞붙었을 때는 그들이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축구로 밥 먹고 사는 건 다 똑같으니까. 물론 몸값의 차이는 엄청나겠지만…”이라고 덧붙였다.

    2년여 전만 해도 맨유 ‘팬’이던 그가 지금은 맨유 ‘선수’가 돼 한국인 최초로 프리미어 리거로 첫발을 내디딘 부분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맨유와 히딩크 사이에서

    5월27일 네덜란드를 떠나 귀국길에 오르려던 박성종씨는 에이전트인 이철호 FS코퍼레이션 대표에게서 급한 전화를 받았다.

    “지금 데커(다국적 스포츠 매니지먼트사 SFX사의 치엘 데커. 박지성측으로부터 에이전트 위임을 받고 PSV측과 재계약 협상 및 이적 문제를 담당했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지성이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는데요?”

    박씨는 처음엔 이철호 대표가 뭘 잘못 알아들은 거라고 생각했단다. 히딩크 감독과 재계약 협상이 힘들어지니까 데커가 이상한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고, 괜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꺼내서 히딩크 감독의 비위를 건드릴까봐 신경이 잔뜩 쓰였다고 한다. 박씨는 아들에게 “퍼거슨 감독이 할일이 없어서 널 데려오라고 했겠냐”고 애써 부정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박씨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당시 리버풀에서 이적 제의를 한 상태였어요. 리버풀도 엄청난 팀이기 때문에 PSV와 계약이 안 되면 그쪽으로 올인할 계획이었죠. 그런데 다른 팀도 아닌 맨유라니, 그게 쉽게 믿겨지겠어요? 지성이도 긴가민가했을 거예요. 나중에야 사실이라는 걸 알고 마음이 요동쳤죠. 솔직히 욕심도 났어요. 맨유 같은 명문팀에서 지성이가 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행복 끝, 고통 시작이었습니다.”

    맨유에서 PSV에 공식으로 이적 제의를 해옴으로써 박지성의 거취 문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PSV에선 재계약과 관련해, 기존의 태도를 고수해 박지성측의 애간장을 태웠다. 이에 대해 박씨는 PSV에 조금은 안타까운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PSV와 계약이 틀어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계약 기간과 이적료 부분이었어요. 우리는 1년 계약을 주장한 반면 그쪽은 3년을 요구했죠. 또 이적료도 맨 처음 PSV에 갔을 때 명시한 500만달러에서 거의 더블로 올리려고 했어요. 3년 뒤 1000만달러의 몸값을 받아야 다른 팀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과연 지성이를 데려가려는 팀이 나타나겠어요? 우린 절대로 팀의 요구 조건을 수용할 수 없었죠.”

    히딩크 감독은 처음 맨유에서 박지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굉장히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다른 팀도 아닌 맨유에서 ‘러브콜’을 보냈다고 하니 박지성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널 것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적료를 놓고 맨유와 PSV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펼친 끝에 600만유로에 박지성의 맨유행이 결정났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마지막까지 박지성을 잡기 위해 이런저런 ‘트릭’을 사용하며 박지성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히딩크는 자신의 거취 문제가 언론에 여러 차례 오르내리자 박지성의 에이전트에게 “내가 어느 팀 감독으로 가더라도 박지성만큼은 꼭 데려가겠다고 계약서에 써 넣을 테니 진로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라”고까지 당부했다. 특히 PSV와 오랜 유대 관계를 맺어온 프리미어 리그의 첼시에서 박지성에게 관심을 드러내자 “PSV에 좀더 있다가 첼시로 옮겨가라. 첼시는 내 이름을 걸고 보내주겠다”고 ‘당근’을 제시하며 자존심까지 내던질 정도였다. 박지성측의 통역에게 “도대체 내 얘기가 에이전트를 통해 박지성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모르겠다. 저 사람들(에이전트)이 내 마음을 지성이게 알리지 않은 것 같다”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큰일 할 선수니 기다려달라”

    한국 사람이 정(情)에 약하다는 걸 잘 아는 히딩크는 “박지성이 부상 때문에 게임을 뛰지 못할 때 홈팬들이 당장 돌려보내라고 성화였지만, 난 그 소리를 무시하고 박지성이 재기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의리를 봐서라도 팀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 앞에서 대놓고 ‘다른 팀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속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박지성 부자는 맨유행에 강렬한 유혹을 느끼면서도 스승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정작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에도 한동안 번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박지성의 말이다.

    “처음 에인트호벤에 갔을 때는 히딩크 감독님이 저한테 특별대우를 하지 않았어요. 한국대표팀에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사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철저히 공식적인 관계로 바뀌었죠. 처음엔 무척 서운하더라고요. 낯선 땅이고, 두려움도 컸는데 감독님이 계셔서 부담을 덜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히딩크 감독님은 PSV팀의 감독이지 저만의 감독은 아니니까. 그러다 부상을 당하고, 그런 저를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는 걸 보고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맨유행을 결정해놓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감독님을 배신한 것 같더라고요. 제가 잔류하기를 희망했다는 걸 잘 알기에 더더욱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죠.”

    박지성은 무릎 수술 후 재활에 성공했지만, 벤치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두고 네덜란드 언론의 ‘벌떼 공격’이 시작됐는데도 히딩크 감독이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한 축구 관련 프로그램에서 기자가 영표형과 저를 가리키며 ‘두 동양인 선수가 에인트호벤팀을 위해 크게 한 일이 없다’고 지적하자 히딩크 감독님은 ‘앞으로 팀을 위해 큰일을 할 선수들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며 우리를 감싸주셨어요. 감동 먹었죠. 영표형은 억울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 그 기자의 지적대로 별로 보여준 게 없었으니까요. 다른 감독이었다면 방출이나 이적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했을 겁니다. 히딩크 감독님은 그런 쉬운 방법보다는 좀 괴롭더라도 절 믿고 기다리는 어려운 선택을 하셨어요.”

    박지성은 메디컬 테스트를 받기 위해 맨유로 떠나기 직전 히딩크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의 배려에 감사를 표시했다. 그것으로써 히딩크 감독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정리됐고 박지성은 마음의 짐을 덜었다.

    2003년 1월 박지성은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 닻을 내린다. 일본 교토 퍼플상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그는 PSV에서 맨유로 옮길 때 못지않게 숱한 갈등과 주변의 만류에도 ‘도전 인생’을 택했다. 박지성은 2003년 2월16일 이영표와 홈 데뷔전을 치르고 난 다음 기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한국 팬들은 히딩크 감독과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별다른 차이가 없어요.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한국에 있을 때는 히딩크 감독이 외국 사람이었는데 여기선 내가 외국 사람이라는 정도? 또 한국에선 히딩크 감독의 인상이 ‘할아버지’ 쪽이었다면 여기선 감독 이미지가 더 강하다는 차이가 있죠. 제게 일본에서 다친 무릎이 어떤지 몇 마디 물어보시는 것 외엔 나나 영표형을 특별히 배려하거나 관심을 두지는 않으시더라고요.”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걱정하던 무릎 부상은 결국 박지성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오른쪽 무릎 통증이 재발해 훈련조차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다. 팀 지정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았지만 결과는 ‘이상 무’. 박지성은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무슨 이상이 있다고 나왔으면 고치면 되는 거잖아요. 아무 이상이 없는 데 통증은 계속되니까 사람 미치는 거죠. 가자마자 부상으로 뛰지 못하고 벤치도 아닌 관중석에서 팀 경기를 지켜보는 심정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박지성은 한국 특파원들이 네덜란드에까지 취재하러 오고 PSV의 경기가 한국으로 중계되는 것에 대해 심적 부담이 컸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영표형이 잘 뛰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영표형까지 부상으로 주저앉았다면 이곳 서포터스의 성화가 대단했을 거예요.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나라에서 온 게 맞냐며 비난이 들끓었을 겁니다. 제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다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거예요. PSV 경기가 한국에 중계되는 마당에 제 얼굴을 보일 수 없다는 건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어요.”

    이런 가운데 박지성은 2003년 3월22일, 드디어 오른쪽 무릎의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초음파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통증의 원인을 마침내 찾아낸 것. 수술하고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다. 걷기조차 불편하다보니 뛰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걷는 사람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수술 후 잠시 우울증에 빠졌던 박지성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영표형은 처음에 PSV와 임대 계약을 맺었다가 최근 이적을 성사시켜 완전한 PSV맨이 됐어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만약 임대로 왔다가 지금의 상황에 처했더라면 앞이 안 보일 정도의 암흑시대였을 거라는 거죠. 이적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임대용 재활 선수의 처지는 상상만 해도 참담합니다.”

    박지성은 “아무것도 모르고 공만 차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며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플레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는 피가 마르는 듯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재활훈련 후 운동장을 다시 밟게 됐지만 박지성은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행여 다시 다치기라도 하면 네덜란드에서 축구 인생은 맛도 제대로 못 보고 쫓겨날 판이었다. 박지성은 무릎 수술을 받은 지 2개월 후 후반 교체 멤버로 투입돼 그라운드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부상에서 회복된 기쁨도 잠깐,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무겁기만 한 몸놀림과 부진한 플레이가 그를 또 한번 나락으로 빠뜨렸다.

    “아무래도 네덜란드 땅이 절 싫어하나봐요. 감독님은 부담 갖지 말고 하라며 다독이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게 축구예요. 컨디션 난조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더 힘들어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홈팬들의 야유가 절 자꾸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단단한 선수가 되고 싶은데 외국에서 용병으로 생활한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박지성은 “이상하게도 연습할 때는 펄펄 날다가 본 게임에만 들어가면 몸놀림이 굳어진다”며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축구가 이렇게 어려운 운동인 줄 처음 알았다”는 얘기에 이르러선 전화기를 들고 있던 기자도 위로의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한국 언론에선 박지성의 팀내 위치가 불안하다며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박성종씨는 당시 언론의 태도에 몹시 서운해했다.

    “외국에서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절치부심하는 선수에게 용기는 주지 못할 망정, 이런저런 미확인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기사화해서 1면 톱으로 내보내는 스포츠 신문에 정말 화가 났어요. 지성이도 인터넷으로 기사를 다 보기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고 특파원들이 모두 철수해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엄청 괴로웠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 끝까지 남아 있던 기자가 있어요. 그 기자랑은 지금도 형, 동생 하며 지내지만 다른 기자들한테는 이런저런 이유로 거리를 두는 것 같더라고요.”

    박지성의 주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그러다 PSV에선 줄곧 처진 스트라이커를 맡았다. 이전에는 골보다 어시스트에 주력했지만 PSV에선 일단 골을 먼저 터뜨려야 했다. 변신은 순탄치 않았다. 익숙한 플레이를 버리고 새로운 것에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골은 안 터지고 포지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때 박지성의 네덜란드 ‘날씨’는 여전히 ‘안개 정국’이었다.

    좌절의 밑바닥에서 솟구친 오기

    2003년 12월, 박지성은 오랜만에 전화를 건 기자에게 여전히 ‘우울 모드’로 얘기했다. 그날은 마침 PSV가 데포르티보와 챔피언스 리그 조별 마지막 경기를 펼친 날이었다. 3대 2로 이겨놓고도 골 득실차로 데포르티보에 밀려 아쉽게 16강 진출의 꿈을 접게 됐다. 전반전을 마치고 나오는데 팬들이 엄청난 야유를 퍼붓자 박지성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올 시즌은 박지성이란 축구선수의 성장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요즘에는 경기장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남은 시간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야 할지 아득해질 때도 있거든요. 요즘에는 축구하기가 겁나요. 이렇게 사람 피 말리는 운동이라면 아예 하지 말 걸 그랬나봐요.”

    2004년, 박지성은 비록 부상으로 출전은 못했지만 올림픽대표팀과 성인대표팀, 그리고 네덜란드 리그 등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낸다. 그러나 여전히 슬럼프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자 J리그 복귀설도 나돌았다. 이전 소속팀인 교토는 물론 다른 J리그 팀에서도 박지성에게 구애의 손길을 뻗쳤다. 이철호 FS코퍼레이션 대표의 설명이다.

    “특히 교토에서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박지성을 다시 데려가겠다며 PSV측에 의사를 타진해왔어요. 결국 히딩크 감독과 박지성이 독대를 하게 됐죠. 히딩크 감독은 ‘지금 이런 상태에서 돌아가는 건 너무 아깝다’며 말렸고, 지성이도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냥 돌아갈 수 없다’며 교토의 콜을 거부했어요. 제대로 된 플레이 한번 못해보고 짐을 쌌다간 한국 선수들이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을 것 같아 갈등이 심했습니다.”

    결국 박지성은 일본을 잊기로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마음먹었다. 오기도 발동했다. 자존심을 생명처럼 여기는 그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일련의 상황이 그를 다시 제대로 서게 한 것이다. 박지성은 그때부터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박지성의 본 모습을 되찾았다. 2004년 3월, 박지성은 기자에게 이전과는 달리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홈 관중이 더는 제게 야유를 보내지 않는 거예요. 오히려 엄청난 격려와 응원을 보내줘 제가 더 당황하고 있다니까요. 역시 축구선수는 축구를 잘하고 볼 일이에요. 어쩜 이렇게 반응이 극과 극일 수 있죠?”

    박지성은 유럽축구연맹(UEFA컵) 32강전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페루자와의 경기 때 “전에는 PSV 유니폼이 남의 옷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맞춤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너무 편하다”고 했다.

    2003년이 암흑기였다면 2004년은 전성기였다. 박지성은 ‘무조건 많이 뛰자’는 소원대로 소속팀과 대표팀의 경기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주가를 한층 끌어올렸다.

    ‘예상’ 빗나간 월드컵대표 발탁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 리거 박지성

    이영미 기자와 인터뷰 중인 박지성. 맨유 입단이 확정된 이후 예전과 달리 언론 접촉을 삼가고 있다.

    박지성이 생애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단 것은 19세 때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 멤버로 발탁되면서 비로소 ‘꿈’을 이뤘다. 박지성은 지난해 기자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대표팀에 뽑혔을 때의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전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올림픽 대표팀이라는 거예요. 상비군도, 청소년 대표팀에도 뽑힌 적이 없는 제가 바로 ‘올대’ 멤버로 뛰게 됐다니 신기할 따름이었죠.”

    당시 박지성은 박진섭과 한 방을 썼는데, 그때 박진섭은 ‘허정무의 황태자’란 소리를 들으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터라 연습생 신분인 박지성으로선 박진섭을 ‘모시고’ ‘방졸’로 지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이후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에 의해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하는 신분상승을 이루며 꿈 같은 시절을 보낸다. 그 때도 박지성은 TV로만 봐온 홍명보, 황선홍, 안정환 같은 대선배가 바로 자기 옆에서 뛰고 구르며 같이 호흡한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고 한다. 특히 홍명보의 플레이가 완벽해서 첫 훈련 때는 감탄으로 시작해 감탄으로 끝냈다고 했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대표팀 엔트리가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 사이에선 박지성의 탈락을 예상하는 추측 기사가 쏟아졌다. 그 이유로 체격의 열세와 공수 연결고리로서 경기의 완급 조절 능력 부족, 슛 찬스를 만드는 실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러나 박지성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양쪽 날개와 공격형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 어느 자리에서도 제몫을 충분히 해낼 재목이라는 히딩크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을 통해 확인됐다.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와 175cm, 70kg의 왜소한 체격에선 축구선수 박지성의 진가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박지성은 이전부터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눈에 띄는 부지런함, 체격의 열세를 노력으로 극복하는 마음가짐으로 조금씩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켰다.

    “절 처음 보는 분들은 TV에서 보는 것보다 더 마르고 작다면서 놀라세요. 이렇게 마른 사람이 어떻게 축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거죠. 축구를 체격으로만 했다면 전 일찌감치 다른 길로 갔을지 몰라요. 하지만 노력으로 극복되는 게 있어요. 그게 축구에선 가능했죠. 그래서 중간중간에 고비는 있었지만 월드컵 이후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할까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한 적은 없어요.”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안목 덕분에 월드컵 대표팀에서 승승장구했다. 물론 유명 인사가 되는 바람에 월드컵이 끝난 직후 친형처럼 따르는 김남일과 같은 호텔에 묵으며 잠행을 계속했지만 월드컵의 ‘후유증’은 당시 소속팀이던 교토 퍼플상가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선수들이 절 보는 눈빛이 달라졌더라고요. 잠시 소속팀을 떠나 있는 동안 일본에서 박지성은 유명 선수가 돼 있었어요. 월드컵 덕분이죠. 2000년 후반기 일본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전 무명 선수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팀이 2부에서 1부 리그로 진입하고, 저도 바깥 출입이 어려울 만큼 잘 알려진 선수가 된 과정을 돌이켜보면 신기할 정도예요.”

    히딩크, 쿠엘류 감독을 거쳐 지금의 본프레레 감독까지 외국인 감독이 모두 인정하는 대표팀 핵심 선수로 자리잡은 박지성은 쿠엘류 감독의 중도하차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전 쿠엘류 감독한테서 전술적으로 배운 게 많아요. 우리 선수들이 그분의 능력을 못 좇아간 거지, 그분이 실력이 없었던 건 아니거든요. 쿠엘류 감독은 선이 굵은 감독이에요. 월드컵 때처럼 협회나 팬들,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데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보여달라는 압력에 시달리셨다고 봐요. 쿠엘류 감독이 그만두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아쉬웠어요. 무조건적인 비판보다는, 모든 걸 감독한테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한번쯤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유럽 구단이 모시러 와야 가겠다”

    박지성은 2000년 6월 명지대를 휴학하고 일본 J2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했다. 당시 그의 일본 진출에 대해 주변에서는 박수보다는 비난의 소리가 더 거셌다. 나이 어린 선수가 유럽이 아닌 일본을 선택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박지성은 “다르게 생각했다”고 회상한다.

    “좀 돌아서 가더라도 일본에서 외국 생활의 경험을 쌓고 좀더 좋은 성적과 좋은 몸값으로 유럽에 진출하자고 생각했어요. 최종 목표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 진출이었으니까. 나이도 어린데 일본 축구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계산한 거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그때도 유럽에 진출할 때의 조건을 미리 생각해뒀어요. 구단에서 보내주는 것은 절대 사양하겠다, 유럽 구단에서 직접 오퍼를 받아 정당한 대우를 제시할 때만 응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무슨 배짱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절대 어영부영하며 외국에 나가진 않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입단 당시 2부 리그로 처져 있던 교토에서 박지성은 무명 생활의 고달픔을 견뎌내야 했다. 아무리 골을 넣어도 한국 언론에선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박지성의 아버지는 당시 아들과 관련된 기사가 신문 하단 귀퉁이에라도 나오면 마치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 마냥 뛸 듯이 기뻐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듯 평범하게 일본 시절을 보내다 결국 월드컵 대표팀에 뽑히면서 박지성은 비로소 ‘날개’를 단 것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은사가 있다. 바로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이다. 박지성이 안용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놓고 고민할 때 아버지 박성종씨는 이 감독이 수원공고 축구팀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이 감독을 찾아가 박지성을 수원공고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다. 이학종 감독은 박지성과의 인연을 이렇게 들려줬다.

    “저랑 지성이 아버지는 연배가 비슷해요. 그래서인지 절 믿는다면서 지성이를 데려가 좋은 선수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지성이가 뛰는 걸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잘만 키우면 ‘물건’이 될 것 같았죠. 그런데 막상 축구팀에 들여놓고 보니 워낙 체격이 작고 여려서 그대로는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 1년간은 축구부 출입을 자제하고 집에서 체격과 체력을 키우라’고 했어요. 그때 지성이는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다행히 1년 쉬면서 키도 10cm나 더 크고 몸무게도 많이 늘어나 고2 후반기부턴 주전 선수로 활약했어요. 그때부턴 거칠 게 없었죠.”

    번번이 퇴짜 맞다 명지대로

    그 무렵 박지성은 몸싸움 대신 기술적인 면에서 한층 달라진 기량을 선보였다고 한다. 힘으로 맞붙으면 자신한테 불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던 박지성은 힘 대신 기술을 키우며 체격 좋은 선수들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깨우쳤다. 박지성의 활약 덕분에 수원공고는 1998년 대통령금배와 전국체전에서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우승컵을 따냈다.

    “겉으로는 연약하고 내성적인 선수지만 축구에 대한 욕심만큼은 정말 대단했어요. 다른 친구들이 축구 외의 ‘놀이’에 빠져 있을 때도 지성이는 오로지 축구공하고만 놀았어요. 어릴 때부터 목표가 분명했어요.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했죠. 토요일에 외출 하면 아무리 늦어도 10시까진 귀가해요. 다른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도 ‘통행금지’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켰죠. 지성이 부모님도 그걸 엄하게 강조하신 것 같아요. 하여튼 지성이는 다른 선수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박지성이 대학 진학을 앞둔 상태에서 이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 때문에 박지성을 선뜻 스카우트하려는 대학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아무리 ‘좋은 선수’라고 추천해도 직접 박지성을 본 감독들은 흡족해하지 않았어요. 명지대는 다른 대학을 알아보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은 뒤 어렵게 들어간 곳입니다. 하도 대학 진학이 어려워 바로 일본으로 진출시킬 생각도 했어요. 당시 명지대 김희태 감독(현 포천축구센터 총감독)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지성이 데려간 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지성이를 가르쳐본 사람만이 지성이의 진가를 알 수 있거든요.”

    이 감독은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히딩크가 아니라 국내 지도자였다면 박지성은 이름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묻히거나 도태됐을 것”이라고 했다. 스타 플레이어 위주로 선수를 발탁하는 풍토에서 결코 ‘잘난’ 선수가 아닌 박지성은 그대로 잊혀질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

    “명지대측에선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지성이를 데려갔지만 지성이의 진가를 확인한 것은 1999년 2월이었어요. 당시 입학 대상자 신분으로 명지대에서 선수 생활을 미리 시작한 지성이는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과 하는 연습경기에 출전하게 됐어요. 그때 허 감독이 지성이의 자질을 눈여겨본 거죠. 처음엔 신입생인 줄 몰랐대요. 나중에야 입학 대상자란 걸 알고 더욱 관심을 보였고, 결국 허 감독이 지성이를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시켰죠. 이런 걸 보면 지성이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굉장히 좋은 선수인 것 같아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기회가 주어졌고, 또 주어진 기회를 잘 살려 더 큰 무대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닦았으니까요.”

    이학종 감독은 맨유로 떠나기 전 박지성과 함께 식사하면서 여러 가지를 당부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최고의 스타지만 맨유에선 조금만 잘못해도 팬들의 야유와 비난이 빗발칠 것이라며 어느 때보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는 주문을 잊지 않았다.

    “지성이가 일본과 네덜란드 리그를 경험해보긴 했지만, 영국 최고의 명문팀, 그것도 평소 지성이가 꿈에 그리던 맨유팀이라 마음이 무거울 겁니다. 동료 선수들이 일부러 패스를 안 해주거나 따돌린다고 해도, 또 네덜란드에서보다 더 심한 반응이 쏟아진다고 해도 두 눈 질끈 감고 참고 또 참고, 그리고 극복해 나가라고 당부했어요. 만약 부딪혀서 안 되면 다시 쉬운 길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마음 느긋하게 가지라고도 했죠. 그런데 지성이는 유럽의 어느 선수와 비교해도 체력만큼은 뒤지지 않을 겁니다. 걱정을 많이 안고 갔지만 분명 그 이상의 몫을 해낼 선수라 여유를 갖고 지켜보려 해요.”

    ‘맨유맨’ 박지성의 변신

    박지성은 기자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기자는 그를 취재하는 처지였지만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를 진행하면서 인생의 조언자 노릇도 했다. 박지성 또한 기자를 누나나 이모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우리는 이처럼 기자 같지 않게, 선수 같지 않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눠왔다.

    박지성이 다른 선수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올림픽 대표팀 시절부터 2002 월드컵을 거쳐 ‘맨유맨’으로 고속 성장한 지금까지 순박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맨유 입단 과정을 거치면서 박지성은 지금까지의 태도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 듯싶다. 이전에는 어느 기자도 박지성에게 접근하기가 쉬웠을지 몰라도 이젠 그를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단독 인터뷰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 같다고 하자 박지성은 “나도 변했겠지만 기자들이 더 많이 변했다”는 예상 외의 대답을 했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저에 대해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매스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저로서는 좀 불편하더라고요. 언론이 변한 만큼 저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제 나름의 룰을 지키며 인터뷰도 하고 취재에 응하려고 해요. 그걸 건방지다고 해석하시면 할 수 없죠, 뭐.”

    실제로 박지성의 맨유 입성을 현지에서 취재하려고 맨체스터로 향한 몇몇 기자는 맨유 구단의 철저한 선수 보호, 그리고 당분간 현지 적응에만 집중하려는 박지성의 단호한 태도에 박지성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불평했다. 한 기자는 “맨체스터에 와보니 한국의 박지성이 아닌 ‘맨유맨’ 박지성의 존재를 실감하겠더라”면서 박지성의 위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혼란스럽다고 했다.

    사실 박지성은 기자들에게 그다지 친근감을 주는 선수는 아니다. 자신의 인터뷰 스타일을 메이저리그의 김병현 선수와 비교한 적도 있다. 선수한테 무례한 태도를 취하거나 매너 없이 접근하는 기자에게 박지성은 결코 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눈 기자들은 뜻밖의 순진함과 당돌함, 그러면서도 기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똑부러지게 자기주장을 펴는 모습에 오히려 묘한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10분만 뛰어도 만족할 거예요”

    박지성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자신보다 더 자신을 훤히 꿰고 있는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의 각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버지, 전 맨유에서 유명한 스타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10분 뛰는 것에도 만족할 것이고 다음엔 20분, 그 다음엔 전반전만 뛰는 선수라도 만족할 겁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저도 반 니스텔루이나 웨인 루니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뛸 날이 오지 않겠어요?”

    미지의 세계, 척박한 낯선 땅에서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박지성에게 기자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전해줬다.

    “지성씨, 마치 친동생 장가보내는 심정이라면 이해할까? 더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으로 한국 대표선수 박지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와. 퍼거슨 감독의 판단과 선택이 너무나 훌륭했다는 사실을 그라운드에서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꿈★은 이루어진다’ 아니겠어?”

    박지성의 진짜 꿈은 맨유도, 프리미어리그 정상도 아니다. 그는 “축구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박지성이라는 축구선수가 제대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만 있다면 축구로 인생의 희비쌍곡선을 달려온 시간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꿈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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