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돈 벌고 여행하며 ‘세계 체험’ “젊음과 패기만 가져오세요!”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입력2005-07-29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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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 젊은 날의 한때, 낯선 나라에서 땀 흘려 일하고 알차게 여행하는 것만큼 유익한 경험이 또 있을까. 광활한 호주를 누비며 젊음의 특권을 누리는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의 좌충우돌 체험기.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사륜구동 자동차를 타고 몇날며칠 가도 붉은 평원이 펼쳐지는 호주대륙을 여행하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뿐인가. 책을 통해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언뜻 엿보게 된다.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한국의 젊은이들이 호주를 체험하기 위해서 대거 몰려들고 있다. 호주행 7, 8월 비행기 티켓이 매진될 정도라고 뉴스는 전한다. 그들 대부분은 현지에서 번 돈으로 공부하고 여행도 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취업관광 사증)를 받아서 온다.

    일생에 딱 한 번 나오는 비자

    호주 이민부에 따르면 2004년 7월부터 2005년 4월까지 불과 9개월 동안 1만3000명의 한국인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입국했다. 1990년대엔 통계조차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미미했는데, 2000년 이후에만 3만2000명이 호주로 왔다고 하니 가히 ‘워킹홀리데이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한국에서 해수욕장이 개장됐다는 소식이 전해올 때쯤이면 남반구의 호주에선 스키장이 개장된다. 계절이 거꾸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호주는 거대한 섬이며 동시에 대륙이어서 ‘섬대륙(The Island Continent)’이라고 한다. 대륙 하나를 한 나라가 몽땅 차지한 경우도 호주가 유일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스노위 마운틴에서 스키를 즐기는 동안, 30℃를 웃도는 케언즈 해변에서는 수영을 즐긴다.



    한국과 호주가 계절만큼이나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주 많다. 한국에서 남십자성을 볼 수 없듯이 호주에선 북극성을 볼 수 없다. 한국은 ‘온정주의’로 대변되는 동양문화권에 속하지만 호주는 ‘합리적 이성주의’가 근간을 이루는 서양문화권에 속한다.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젊은이들이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요즘 시드니 시내에 나가보면 ‘여름나라’ 한국에서 ‘겨울나라’ 호주로 온 배낭족으로 넘쳐난다. 한국인뿐만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다.

    시드니만 그런 게 아니다. 스키를 즐기는 스노위 마운틴이나 수영을 즐기는 케언즈 해변에 가도 한국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레포츠를 즐기기도 하지만 그곳의 호텔과 식당에서 일을 해 돈을 벌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젊은이의 주요한 해외체험 창구인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특징은 18~30세의 미혼자를 대상으로 일생에 딱 한 번만 발급된다는 것이다. 또한 체류기간 1년 중에서 3개월만 일할 수 있고, 나머지 기간은 여행을 하도록 장려한다. 올해 11월부터는 농장에서 3개월 동안 일한 사람에 한해서 체류기간을 2년으로 연장해준다.

    이렇듯 까다로운 조건을 적용하는 것은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취지가 학업이나 취업이 아니라 해외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돈을 벌어 공부도 하고 여행도 즐기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한국은 1995년 호주, 1996년 캐나다, 1999년 일본·뉴질랜드와 협정을 맺었다.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아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고, 방학을 이용해서 ‘재카루(Jackaroo·호주 청소년이 목동이 되는 체험)’로 농촌지역을 떠도는 전통이 있는 호주의 젊은이들도 해외로 떠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장거리 경주와도 같은 인생여정에서 청년시절의 1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간이다. 학업과 군복무로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기 힘든 연령대가 지나고, 무한경쟁의 사회로 진입하기 전에 광활한 대륙을 떠돌고 한적한 바닷가를 거닐면서 생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젊은 날의 한때를 낯선 나라에서 열심히 일하고 알차게 여행하며 세계인이 되어보는 체험은 두고두고 유익한 무형자산이 될 것이다.

    금방 머리 위로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이 총총하게 떠 있는 한적한 해변의 야외카페에서 접시를 닦고 불볕더위 속에서 과일을 따는 일을 젊은 시절에 경험해보지 않으면 또 언제 하겠는가. 그렇게 번 돈으로 홀연히 길을 떠나는 젊은이는 아름답다. 깨달음은 꼭 책상머리에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므로.

    세계화 선언으로 얻은 ‘횡재’

    이런 현상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1995년 7월1일부터다. 올해로 꼭 10년째인 한국과 호주의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이 물꼬를 텄다. 아주 뜻밖의 기회에 성사된 이 협정은 한국의 세계화 선언과 맞물려 얻은 ‘횡재’ 비슷한 일이기도 했다.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담에 참가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귀국길에 호주를 방문했다. 그는 정상회담을 위해 행정수도 캔버라로 가던 중, 시드니에서 하루를 머물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세계화 선언’을 공표했다. 혹자는 IMF 외환위기가 그 순간 잉태됐다고 말한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대통령 순방 취재기자로 시드니에 온 동아일보 송영언 기자(현 논설위원)가 필자에게 몇 가지 자문을 구해왔다. 그는 “한국 기자단을 대표해서 폴 키팅 호주 총리에게 양국의 현안을 질의하기로 예정돼 있는데, 호주 한인동포 사회의 숙원사항을 함께 전하고 싶다”고 했다.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체결 요구였다.

    당시에 거론된 한인동포 숙원사항은 한인 불법 체류자 부분 사면, 한인회관 건립을 위한 재정지원,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체결이었는데, 호주 당국은 그중에서 세 번째 항목만 받아들였다.

    그 후속조치로 1995년 3월, 닉 볼커스 이민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해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을 체결했고, 같은 해 7월1일 협정이 발효돼 오늘에 이르렀다. 당시 호주는 1인당 국민소득이 자국과 비슷한 국가(약 2만 US달러)인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네덜란드, 일본 등 6개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워킹홀리데이와 관련해서 한국과 호주 당국간 현안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드니가 주도(州都)인 뉴사우스웨일스(NSW)주와 퀸즈랜드주의 영사업무를 담당하는 시드니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김만석 영사를 만났다.

    호주 산업조정위원회의 역할

    -한국에서 오는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에 대한 호주 당국의 반응은 어떤가.

    “호주 이민부 당국은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호주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며 고용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평했다.”

    -시드니 총영사관은 한국에서 온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의 실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나.

    “주로 호주 이민부 담당자나 공식통계를 통해서 실태를 파악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들이 주로 출석하는 ‘주안교회’와 ‘형제사랑교회’를 통해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번더버그 농장에서 일하는 권준영씨가 식사 준비를 위해 쇼핑을 하고 있다.

    -한국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어떻게 대처하나.

    “원칙적으로 총영사관은 개인간의 임금 지불의무 이행을 강제할 권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사할 권한도 없다. 다만 양자가 동의하면 중재하는 경우는 있다. 양쪽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호주 산업조정위원회(www.industrialrelations.gov.au)에 제소하거나 필요에 따라 해당 노조에 신고할 것을 권유한다.”

    -호주 이민부와 정기적으로 협의하나.

    “실무적인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만난다. 서로 보유한 정보를 나누고 개선방향을 논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논쟁을 벌일 정도로 의견이 다를 때도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쯤에서 실제 사례를 알아보자.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의 주 활동무대인 시드니 시내 일원과 식당, 교회, 행사장에서 만난 젊은이들 중에서 네 명의 이야기를 간추려 소개한다. 먼저 농장체험을 들려준 권준영(27)씨의 이야기다.

    “친구에게서 인터넷 카페를 추천받아 비자 신청방법 및 출국절차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처음 세운 목표는 세 가지였다. 영어학원에 다니며 부족한 영어 실력을 보충하고, 두 달 정도 농장에서 일해 돈을 모은 다음, 그 돈으로 호주를 일주하는 것이다.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영어학원에 등록해 6개월 동안 공부한 후 농장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또다시 인터넷을 통해 호주 농장의 문을 두드렸고, 문은 어김 없이 열렸다. 결정된 지역은 학원에서 알게 된 일본 친구가 있는 번더버그(Bundaberg)였다.

    번더버그의 ‘시티센터 백팩커스’라는 배낭족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이 일대엔 일거리를 소개하는 배낭족 숙소가 여럿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꼭 소꿉놀이하는 것 같아 재미있었지만, 막상 할 줄 아는 요리가 하나도 없어서 며칠 동안은 베이컨과 달걀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매운 음식이 그리웠다. 숙소를 살펴보니 한국인이 50%, 일본인 10%, 유럽계가 나머지 40%를 차지했다. 그런 까닭인지 부엌에 가면 항상 한국 음식이 판을 쳤다.

    나는 루비라는 농장에서 고구마를 수확했다. 한 시간당 12.50달러(호주달러, 약 1만원)를 받았다. 하루 일과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아침과 점심을 만드는 일로 시작됐다. 메뉴는 늘 샌드위치였다.

    농장에 도착해보니 한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트랙터가 고구마 밭을 갈고 일꾼들이 플라스틱 바구니에 고구마를 주워 담았다. 그렇게 한 라인을 다 돌고 나서 트랙터에 그 바구니를 실으면 한 과정이 끝나는 식이다. 그 다음엔 건물 안에서 포장을 한다.

    내 임무는 건물 밖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붓는 일이었다. 그 일을 ‘워싱’이라고 하는데 가장 힘든 작업이다. 옷도 다 버리고 바구니가 무겁기 때문이다. 나말고 일본 남자가 있었는데 내게만 그 일을 시켰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조금이라도 힘이 더 세 보이는 사람에게 그 일을 시킨다고 했다.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처음엔 지루하고 몸도 피곤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요령이 생겨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두 과정을 끝내면 오후 4시쯤 된다. 보통 하루에 8~9시간 일했다. 수입은 90~100달러였다. 가끔은 10시간씩 일을 했는데 그런 날은 120달러를 벌었다. 그 정도로 1주일에 5일만 일해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숙식비용 200달러를 빼고도 약 300달러를 저축할 수 있는 것이다.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왜 호주에 왔는지, 뭘 했는지, 어디를 여행했고, 어디가 좋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주말엔 그동안 못한 빨래를 하고 친구들과 도서관에 가서 인터넷 서핑을 했다. 주말 바비큐 파티는 기본이고 바다에 나가 스노클링도 했다. 번더버그는 스킨스쿠버를 배우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힘도 들고 재미도 있었던 농장생활을 끝내고는 친구들과 어울려 멜버른, 캔버라 등지를 여행했다. 귀국을 1주일 남겨놓은 시점에서, 앞으로 호주에 올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에게 한마디 충고한다면 꼭 농장생활을 해보라는 것이다. 색다른 경험을 쌓고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국적 8명이 한 지붕 아래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은 김태형·김숙희 부부

    지난해 11월 호주에 온 김우영(25)씨는 첫눈에도 독립심 강한 청년으로 보였다. 대학 재학 중에 군복무를 마치고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된 김씨는 “경비를 대줄 테니 공부나 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과자상자를 날라 번 돈으로 호주행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

    그는 지금도 건축현장에서 페인팅과 샌딩(표면을 거칠게 마무리해 무광 느낌이 나게 하는 공정) 작업 보조로 일하고 있다. 시쳇말로 ‘노가다’인 셈이다. 처음엔 버스조립공장에서 주급 960달러(약 77만원)를 받고 일했지만 영어 공부 때문에 3주 만에 그만뒀다. 처음 경험해보는 건축현장 일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체험이다. 인생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인생을 공부하는 곳은 비단 건설현장뿐이 아니다. 현재 거주하는 시드니 시내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넓혀가고 있다. 아파트 한 가구에 한국인 4명, 헝가리인 2명, 슬로바키아인 1명, 일본인 1명이 함께 살고 있는 것. 그 중 3명은 여성이다.

    김씨에 따르면 시드니 시내에 거주하는 세계 각국 출신의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이 대부분 이런 형태로 생활한다고 한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의 거실과 일광욕실까지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남녀간에 ‘사고’ 비슷한 것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할 정도는 아닐뿐더러 국제 커플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면서 “젊은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은 장소가 어디든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낮에는 건설현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밤엔 영어 개인교습을 받는 김씨는 남은 기간에 서핑과 스쿠버다이빙을 배울 계획이다.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은 특별한 커플도 있다. 1998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입국한 김대형(30)씨는 지난해 8월 학생비자를 얻어서 다시 호주에 들어왔다. 호주 방문이 처음인 부인 김숙희씨도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다. 그들은 둘 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신분으로 일본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김대형씨의 얘기다.

    “1998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한 후 한국과 일본이 1999년에 맺은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이용해 2001년 일본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일본어를 약 6개월 동안 공부했는데 허드렛일을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에서 ‘한류 붐’이 일기 전이었는데도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서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 워킹홀리데이가 시작되는 단계였고, 한국에서 건너간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도 많지 않아서 구직 여건이 아주 좋았다. 일단 현지인과 똑같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고 일자리도 넘쳐났다. 특히 정부 당국이 일자리를 주선해주는 게 인상적이었다.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서 얻은 최대의 소득은 아내를 만난 것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아내를 일본의 민박집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됐다. 지금은 유학생 신분으로 공부하고 있지만 공부가 끝나면 호주 영주권을 신청해서 정착할 계획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여유로운 생활환경과 맑은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있다는 데 매료돼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고 호주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2세는 이곳에서 키우고 싶다. 호주의 생활여건이 전보다 더 어려워졌고, 일자리도 그리 많지 않은 게 우려될 뿐이다.”

    6월 중순 호주를 방문한 소설가 박완서씨와 이경자씨를 안내하면서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레드펀 지역과 NSW박물관을 둘러보던 중 아일랜드에서 온 20대 남매를 만났다.

    호주 원주민 다큐멘터리 제작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호주 원주민과 만나기 위해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된 아일랜드 출신의 마크 터너(오른쪽), 메이블 터너 남매.

    마크 터너(26)와 메이블 터너(22)는 오직 호주 원주민과 만나기 위해서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됐다. 마크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호주 남단에 위치한 태즈메이니아 섬의 원주민이 영국인에 의해 멸종되는 과정을 공부하다가 호주로 오게 됐다.

    수학을 전공한 여동생 메이블은 오빠의 권유와 남국의 강한 유혹에 끌려 지난해 11월 호주로 건너왔다. 두 사람은 여느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와 다를 바 없이 우선 일을 해서 여행경비를 모았다.

    마크는 쇼핑센터에서 포장 일을 했고, 메이블은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했다. 그들은 당초 계획대로 정확하게 3개월 동안 일한 돈으로 태즈메이니아를 여행했고,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서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었다. 원주민이 하나도 출연하지 못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스토리’를 만든 것이다.

    마크는 이 다큐멘터리를 학교에 제출하면 한 학기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로서는 돈 벌고, 여행하고, 다큐멘터리 만들고, 대학 한 학기를 인정받게 됐으니 1석4조인 셈이다.

    그는 주로 여행자 숙소를 이용했는데,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이 전공하는 인류학 연구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2003년 미국 등지에서 이미 성행하던 인턴십 제도를 호주에 맨 처음 도입한 조성우 (주)NIAA 대표를 만나서 최근 현황을 알아보았다. 필자가 월드타워에 있는 그의 회사를 찾았을 때, 6명의 인턴십 지망자가 바로 그날 아침 시드니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서 이미 자신의 희망직종과 거주계획을 (주)NIAA와 협의한 상태여서 실무적인 절차만 확인하고 계획한 대로 실행에 옮기는 중이었다. 현지의 취업시장이 늘 가변적이기 때문에 업데이트된 취업정보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호주의 인턴십은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일정 경비를 대주고 무급으로 일하는 경우와, (주)NIAA 같은 회사에서 취업을 알선해 유급으로 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가 없어 대부분 유급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당초 무급 인턴십의 취지는 취업이 어려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현장에서 체험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호주 기업에 들어가 전공과 무관한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보수도 받지 못하는 모순점이 발견되자, 돈을 받으면서 경험을 쌓는 인턴십으로 전환하고 있다.

    학생들은 호주에서 막일을 하면서는 영어라는 높은 벽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럴 바엔 차라리 돈을 받으면서 일을 배우자는 현실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호텔경영학과나 조리과 출신의 학생들을 호주업체에 주로 소개하는 (주)NIAA의 경우 사전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지적응 훈련을 시킨 다음에 5성 호텔 등에 취업시킨다. 호주 전역에 한국의 인턴들을 취업시킨 조성우 대표는 “업체의 반응이 아주 좋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취업 연장을 요구하지만 비자조건 때문에 응할 수 없는 형편”이라며 “캔버라 크라운호텔의 인력관리 매니저는 장기체류가 가능한 457비자 스폰서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호텔 관련학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호주 호텔에서 일한 경험이 학점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더 큰 혜택을 누린다.

    일도 하고, 학점도 따고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호주에 인턴십 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조성우 (주)NIAA대표

    전미라(22)씨는 지난해 9월2일 꿈에 그리던 시드니에 도착했다. 전씨는 2003년 학교에서 주선한 교환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1년 동안 다녀왔다. 그곳에서 호텔 수업을 들으면서 실무체계를 공부하다 보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접 체험하면서 배울 수 있는 호텔 근무경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호텔경영학과 4학년 1학기를 마친 그는 졸업을 위해서 15학점을 남겨둔 상태였다. 호주 쪽에 약간의 정보를 갖고 있던 터라 내심 호주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미국 쪽 인턴십 프로그램을 권하는 학교측에 호주에서 인턴십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호주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하여 15학점을 이수해 졸업까지 하게 됐으니 인턴십을 아주 성공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호주에 도착해 살 집을 정한 후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레스토랑, 호텔 등 이곳저곳을 인터뷰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호주의 서비스 직종에서 요구하는 자격증도 땄다. 정확히 1주일 후, 그는 호주에서 첫 일자리를 얻었다. 노보텔이었다. 호주의 아름다운 항구가 한 눈에 들어오는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 낮에는 호주의 평화로움을, 밤에는 화려한 항구의 화려한 밤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일하는 3개월 동안 많은 것을 느꼈다. 일하는 분위기, 동료들과의 관계, 상사와도 벽이 없는 자유로움,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 등이 그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한국의 직장환경과 차이가 있었다. 언어로 인한 장애가 있었지만, 이런 장점들이 외국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 듯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학에서 배운 학문적인 이론을 호주 호텔 근무에 접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인턴십은 크루즈(유람선)에서 시작했다. 그곳에선 약혼식, 결혼식, 생일파티 같은 각종 행사가 이어졌다. ‘시드니 아일랜드 글래스’라는 이름의 배는 시드니 항구 전역을 운항하는데, 그곳에서 하루 8시간씩 일했다. 이곳에서 서비스 실무를 배울 수 있었다.

    세 번째 일터는 게이트 고우어메트라는 기내식 서비스 회사였다. 그동안 호주에서 일한 곳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회사였다. 그 인턴십 또한 대학 수업과 무관하지 않았다. 항공사 업무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한 만큼 돌려주는 사회

    한효정(26)씨는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자신을 좀더 성장시키기 위해 욕심을 냈지만 외국어 능력 때문에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또한 대부분의 회사는 경력자를 선호했다.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길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호주에서 인턴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위에서는 미래가 불확실하다며 극구 말렸지만, 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나름대로 인터뷰를 연습한 데다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한 덕분인지, 한씨는 처음부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비스업이라 힘든 만큼 급여 수준이 꽤 높았다. 또한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호주 사람들의 파티를 체험할 수 있어 현지문화를 터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워킹홀리데이 10년, 배낭족의 천국 호주

    열대우림으로 뒤덮힌 멜버른 댄드넝산을 구식 협궤철도로 오르내리는 ‘퍼핑빌리’ 증기기관차. 호주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에게 여행은 필수다.

    한씨의 전공인 식품영양학과 관련된 기내식 회사가 두 번째 직장이었다. 한국 항공사인 아시아나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항공사에 기내식을 납품하는 곳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기내식 회사에 취업하기 힘든데, 오히려 호주 현지에서 인턴십을 통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고 싶던 일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더니, 그만둘 때쯤 회사에서 계속 일해달라고 제의했다. 그가 인턴십을 하면서 느낀 점은 ‘호주는 자기가 일한 만큼 대가를 보장해주는 사회’라는 것이다.

    워킹홀리데이와 함께 소개되는 우프(WWOOF)는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의 약자다. 1972년 영국에서 시작된 우프는 화학비료의 범람으로 토질이 황폐해지자 이를 우려한 농민들이 유기농법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전수하기 위해 만들었다. 젊은이들이 우프 농가로 찾아가 일정기간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해주면, 주인이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유기농법에 관한 지식도 전수하는 우프의 전통이 형성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보수가 거의 없다.

    그후 10년 가까운 기간 영국에서만 행해지던 우프는 1980년대 초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퍼져나갔다. 1981년 우프가 상륙한 이래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온 호주는 마침내 세계 최대의 우프 그룹을 형성하면서 국제우프그룹의 중심지가 됐다. 호주가 유기농법의 전수와 확산에 치중해온 우프의 전통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국제간 문화교류를 추가한 것도 흥미롭다.

    워킹홀리데이와 우프의 그늘

    하지만 상당수는 ‘전원풍경의 호주농장에서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일방적인 정보만 믿고 별다른 준비 없이 호주에 왔다가 중간에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정작 우프 농가에서 일하려면 일정 수준의 생활영어 능력과 강인한 체력이 필요한데, 그런 대비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적한 농촌지역에 간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한다는 뉴스도 종종 들려온다. 우프 관계자들은 아주 특별한 사례라고 주장하지만 ‘만사불여튼튼’이란 말처럼 여성은 팀을 만들어서 우프에 참가하는 것이 안전하다.

    또 이런 경우는 어떤가. 한국에서 온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중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풍문이 두 차례나 돌았다. 그들의 유족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들리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사실임에 분명한 불행한 일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 1년에 2000만~3000만원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욕심만 앞세워 밤낮 없이 세 직종을 뛰며 휴식과 영양섭취를 소홀히 하다가 변을 당했다.

    얼마 전 숨진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출석하던 주안교회의 진기현 목사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글자 그대로 취업관광 비자이니 본래의 취지를 살려서 적당하게 일하고 여행도 하며 젊은 시절의 한때를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일하는 것 못지않게 안타까운 일은 일부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이 쉽게 동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는 한 여성 집사는 “요즘 젊은이들의 풍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개방된 성의식을 갖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굳이 워킹홀리데이와 우프의 그늘을 거론하자면 위의 사례가 될 것이다.

    바다 건너 호주에 온 한국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이 고생스런 생활을 통해 강한 정신력과 독립심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한인동포들은 흐뭇해한다. 미래는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은 도전하는 자들이다. 세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지구촌을 경험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에게 젊음과 패기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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