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산골 아이들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5-07-29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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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골 아이들에게 심심함은 자신을 찾는 보약’이라는 대목에 시선이 딱 멈췄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인생에서 이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싶다.학교 다닐 때는 성적표에 인생을 맡겨놓고, 사회에 나와서는 친구들의 삶에 인생을 맡겨놓다가 그만 자신을 잃어버리는 게 대부분 인생이다. 자신을 찾아, 자신감을 키우는 산골 아이들의 일상을 한번 따라가볼까나.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산골 아이들

    자연이(오른쪽 두 번째)는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들과 가끔 어울린다. 이야기를 나누다, 휴식을 틈타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산골생활에 대해 몇 번에 걸쳐 글이 나가자 독자들이 아이들 교육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다. 두 아이 다 학교 안 다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창 대학시험을 준비해야 할 나이인 딸 자연이(18)가 집을 짓는다니 더 그런가보다. 궁금함을 넘어 걱정하는 분들도 있다. “부모는 자기 좋아 시골에 산다지만 아이들 앞날은 어찌할 거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 딱 부러지는 정답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식구는 입시 위주 교육에서 너무 멀리 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한두 마디로는 어렵겠다. 공부는? 하루 일과는? 친구는? 대학은? 이 다음은?…. 하나하나가 보통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무위, ‘신동아’ 최연소 독자?

    우리 아이들은 학교식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 짜인 일과나 교과가 없다.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을 때 한다. 그러니 관심 분야가 엄청 넓다. 또한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나이 제한이 없다. 신문과 잡지도 매우 다양하게 본다. 하나만 보던 일간신문을 올 봄부터는 두 개씩 본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정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저녁이면 식구마다 자기 관심분야 기사를 스크랩하는 바람에 신문이 너덜너덜해지기도 한다.

    잡지도 그렇다. 아들 무위(11)는 ‘신동아’ 6월호에 실린 ‘방랑주먹 방배추’를 다 읽었다. 어쩌면 무위가 신동아 최연소 독자일지 모른다. 교과서도 마음 내킬 때 공부한다. 수학을 좋아해 한번은 교과서 한 권을 보름 만에 다 풀기도 했다. 과학도 좋아해 곤충이나 자연 탐사에 관해서는 우리 식구 가운데 ‘선생님’ 수준이다. 물론 노는 것도 좋아한다. 농구랑 축구를 좋아하고 바둑은 저 나름대로 깊이 몰두하고 있다. 요 몇 달 산 바둑책만도 여러 권에다가 도서관에 가면 한두 권 더 빌린다. 컴퓨터 게임도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 게임 관련 책도 탐독한다.



    자연이는 관심분야가 훨씬 더 넓다. 산골에 살아서인지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다. 한창 자랄 때라 몸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외국어도 좋아한다. 외국 영화를 좋아하고, 외국 친구를 사귀고 있다. 외국 문학이나 영화를 번역하지 않고 그 나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한다. 대학 문제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과연 대학이 내게 줄 수 있는 게 뭘까.’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집 손님으로 오면 이따금 물어본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다닌 지 다섯 해. 그동안 변화가 참 많았다. 자연이는 학교 그만둔 이듬해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일찍이 의무교육의 ‘짐’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간다. 아토피 피부도 거의 완치되어 자신감도 커졌다.

    반면에 무위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무얼 하더라도 개성이 뚜렷하다. 본인이 하기 싫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구도 못 말린다. 초등학교를 마친 자연이는 부모가 뭔가를 시키면 싫어도 제법 따라준다. 그러나 무위에게는 눈치를 살펴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 야성 그대로라고 할까.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가끔 “아이들이 초등학교는 나와야 된다니까”하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자식 자랑을 하면 팔푼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야말로 갈 데 없이 팔푼이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교를 그만둘 무렵에는 아이들이 아무래도 부모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당시 나는 교육에 대한 깨달음이 많았고, ‘내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다. 학교를 안 다니지만 아이들이 잘할 수 있다는 결과를 빨리 내고도 싶었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기보다 묻는 방식을 택했다. 섣불리 가르치려들면 우선 아이들이 싫어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는 사실 내 나름대로 답이 있을 경우다. 내 질문은 일종의 유도 질문에 가깝다. 뻔한 답이 나오면 다시 물었다. 질문을 통해 근본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방식을 일러 ‘물음을 남기지 않는 배움’이라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꼬장꼬장 묻는 나를 아이들이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으면 아이들을 다시 보게 된다. 또 아이들은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면서 공부를 내면화해갔다. 그래서인지 공부하는 이유가 다양해졌다. 지난 기록을 더듬어 시간 흐름에 따라 몇 가지를 살펴본다.

    ‘불안’과 ‘괜히’의 차이

    자연이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왜 공부하는지 물었다.

    “안 하면 불안하잖아요. 친구들은 학원도 몇 군데 다니고, 선생님은 잘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시골에도 경쟁은 있다. 말이 시골이지 교육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도시 변두리다. 그 무렵 자연이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경쟁 교육을 받는 아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학교를 그만둔 직후 자연이는 이랬다.

    “안 하면 ‘괜히’ 불안해요. 지금쯤 학교에서 친구들은 공부하고 있을 텐데…. 공부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해요.”

    답변이 비슷한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학교를 그만두기 전과 후에 차이가 있다. ‘당연’한 불안이 아니라 ‘괜히’다.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닌데, 뭔지 알 수 없는 불안. 공부를 함으로써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 짜인 학교생활, 또래 친구랑 놀이에 익숙하던 습관을 하루아침에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아이보다 아내는 불안감이 더 컸다. 과연 아이들이랑 집에서 공부를 잘 해낼 수 있을까. 경쟁사회인데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아내는 자연이와 영어를, 무위와는 수학을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만뒀다. 자연이 실력이 아내를 앞섰고, 무위는 혼자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아내는 저절로 ‘해고’ 당했다. 교사로서 남아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진 셈이다. 나는 속으로 내 교육 방식이 옳다고 쾌재를 불렀다.

    학교를 그만두니 아이들에게 시간이 많았다. 특별히 짜인 일정도 없는데다 학교를 오가는 시간도 고스란히 남았다. 게다가 안테나를 달지 않아 TV도 안 나온다. 그러니 가끔 심심하다.

    아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니, 심심함을 견디기 힘들어함을 알 수 있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 나름대로 놀이를 만들기도 한다. 무위는 정말 많은 놀이를 스스로 만든다. 대나무를 베다가 활을 만들기도 하고, 돌멩이로 볼라(bola·투척용 밧줄)를 만들어 산토끼를 잡겠다고 던지기도 한다. 집 뒤 비탈길에서 흙 썰매를 타기도 하고, 칡덩굴을 밧줄처럼 타고 오르내리기도 했다. 무위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놀이만 모아도 책 한 권이 되지 싶다. 하지만 그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재미가 없다.

    산골 아이들에게 심심함은 자신을 찾게 해주는 보약 같은 것이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돌아보게 된다. 안 보던 책에 눈이 가고, 신문 기사를 보는 면도 다양해진다. 책 한 권 집어 들면 한두 시간은 금방이다. 계절별로 보면 한여름과 겨울에 공부를 더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집을 떠나 어디 먼 곳을 갈 때 아이들은 책 한두 권을 꼭 챙긴다. 심심할 때 보려고.

    동네 도서관에 네 식구만 덩그러니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산골 아이들

    군 도서관에서 아내와 무위가 책을 고르고 있다. 책도 많고 조용하다. 자주 못 가는 게 흠.

    요즘은 심심함에서 거의 벗어난 상태다. 물론 불안 때문에 공부하는 법은 더더욱 없다. 대신에 재미로 공부할 때가 많다. 내가 자랄 때하고는 많이 다르다. 그때는 교사와 교과서가 중심이었다. 어쩌다 마을에 ‘삼국지’라도 한 권 들어오면 동네 아이들마다 돌려가며 보다가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큼 재미있는 책이 귀했다.

    지금은 책이 넘친다. 인터넷도 있다. 아이가 ‘배우겠다’고 한다면 배울거리는 널려 있지 않은가. 어쩌다 서점에 가면 아이 스스로 알아서 책을 고르게 한다. 그러니 더 재미있다. 그리고 비디오나 CD 따위도 아이가 선택한다.

    군(郡)에 있는 도서관도 빼놓을 수 없다. 무위는 한 번에 세 권을 빌려와도 하루 만에 대부분 다 읽는다. 그러고는 본 책을 두 번 세 번 더 본다. 재미가 없어지면 누나가 빌린 책 가운데 볼 게 없나 하고 기웃거린다. 봄, 가을에는 일이 바빠 도서관에 자주 못 가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평일 낮 시간에 도서관에 가면 우리 네 식구만 앉아서 책을 보기도 한다. 우리가 고요한 시간을 선택할 수 있기에 가능하지 싶다.

    공부를 재미나게 하는 데는 환경 못지않게 동기 부여도 중요하리라. 무위에게 동기는 단연 만화다. 요즘은 학습 만화가 쏟아져나온다.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만화를 아이가 고르면 사준다. 그래서 산 만화책이 아주 다양하다. 한자, 서바이벌, 의학, 자연과학, 역사…. 그러나 게임 만화를 고르면 무위의 용돈으로 사게 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만화만 보는 건 아니다. 처음에 무위는 파브르 곤충기를 만화로 보다가 나중에는 여덟 권짜리 책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러 번 읽었다. 한동안 날마다 곤충 이야기를 할 만큼 책에 푹 빠졌다. 책을 보다가 갑자기 똥이 마려우면 책을 들고 뒷간에 가기도 했다. 책에 푹 빠지면 똥을 다 누고도 나올 줄 모른다. 다른 식구가 불러야 나오곤 했다.

    자연이는 한동안 시를 싫어했다. 그 이유는 아무 느낌도 없는 시를 외우고 시험 보던 기억 때문이란다. 학교 그만두고 나서는 몇 년간 시를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제는 시가 마음에 든단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누가 시를 해설하지 않으니 시가 좋아지데요” 한다.

    아는 것 반복하는 공부는 잔인해

    자연이는 글쓰기도 자주 한다. 원고 청탁을 받고 글을 쓴 잡지가 여럿이다. 원고료 받은 걸로 MP3를 샀다. 주제도 다양하다. 지금도 연재 중인 꼭지가 하나 있는데, 주제는 자신이 짓는 아래채 집짓기다. 올 가을부터는 어린이 잡지에도 연재하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 글은 요리 이야기다. 본인이 요리를 배우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어린이의 시각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자연이는 글쓰기를 하면서 보람도 있지만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

    사실 우리 아이들이 하는 것은 공부라기보다 ‘배움’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공부는 반복하여 익힌다는 학습의 뜻이 강하다. 반면 배움은 훨씬 폭이 넓고 자연스럽다. 모든 것이 배움의 대상일 수 있기에 ‘삶이 곧 교육’이란 말과도 이어지는 셈이다. 배움은 알고 있는 걸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데 무게가 실린다.

    아내가 무위에게 수학을 가르치다 그만둔 직접적인 이유도 여기 있었다. 몇 해 전 일인데도 아직 생생하다. 그러니까 무위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아내가 아이에게 덧셈을 가르쳤다. 받아올리기를 가르친 다음 비슷한 문제를 스무 개쯤 반복해서 풀게 했다. 처음에는 무위가 몇 번 따라하다가 이를 거부했다. 아는 걸 왜 자꾸 반복하느냐는 게 이유다. 그러자 아내는 문제를 다 맞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가 가운데 끼어들어 무위 편을 들었다. 틀린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집중도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비슷한 걸 반복하는데 계속된 집중을 요구하는 건 얼마나 ‘잔인’한가.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산골 아이들

    자연이가 어버이날 선물로 그려준 나와 아내 그림. 늘 사이 좋으라고 둘이 손을 꼭 잡은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고 내가 무위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무위는 아내에게 하나를 배우면 꼭 내게 와서 가르치려든다.

    “아빠, 내가 문제 하나 낼까요?”

    “그래? 내봐.”

    “이건 아주 어려운데요. 맞혀보실래요?”

    “뜸들이지 말고 내봐.”

    “6만 더하기 7만은요?”

    무위는 숫자뿐만 아니라 문제를 내는 법,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까지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위는 자신이 배운 걸 누군가에게 가르쳐야 직성이 풀린다. 식구 중에 내가 가장 만만한지 내게 선생 노릇을 톡톡히 한다. 무위의 ‘제자 노릇’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싫지는 않다. 무위가 태어나고 나서 내 삶이 크게 바뀌었기에 나로서는 무위를 감싸는 부분이 많다. 무위는 ‘계획된 임신’이 아니라 ‘어찌하다’가 생겼으니 제 발로 우리 부부에게 온 셈이다. 무위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일 때면 ‘저 아이가 내게 온 이유가 뭘까’를 곰곰이 생각한다.

    아이들이 맨 처음 학교를 그만 다니고자 할 때 이를 받아들인 것은 생명에 대한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몸이 거의 망가졌다가 되살아난 경험도 중요했지만, 농사가 준 깨달음이 컸다.

    하늘 냄새가 나는 오리알

    오리 이야기 하나 해보자. 오리 농법에 쓰는 오리는 잡종강세로 농사에 적합하게 육종이 됐다. 알은 대부분 부화장에서 기계 힘으로 깐다. 이 오리로 농사를 짓고 나서 가을에 그 가운데 몇 마리를 키웠는데 이놈들이 이듬해 봄, 새끼를 깠다. 그때 감격은 지금도 새롭다. 부화장 오리는 제 스스로 알을 까지 못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도 오리가 알을 깠다고 신기해했다.

    그런데 그 새끼들이 다시 어미가 됐고 올 봄에 알을 낳는데 한 마리는 푸른 알을 낳은 게 아닌가. 이제껏 하얀 알만 보다가 푸른 알을 보니 기분이 야릇했다. 농촌진흥청에 문의했다. 야생 청둥오리 알은 푸르단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푸른 알은 먹지 않고 따로 모았다. 알이 하나 둘 쌓이자 알에서 하늘 냄새가 났다. 그러더니 그 알을 어미가 품어 다시 새끼를 깠다. 올 가을쯤 저 새끼 오리들이 다 자라면 하늘로 날아갈지 모르겠다.

    이게 어디 오리뿐이랴. 모든 생명은 자기 생명을 더 생명답게 하고자 한다. 그게 생명의 본성이 아닐까. 병들어 죽을 목숨이 아닌 한, 모두 끊임없이 잘살려고 한다.

    곡식도 그렇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식물의 생육에 필요한 3대 요소가 질소, 인산, 칼리라고 배웠다. 하지만 곡식을 키워보니 사람들이 분석한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지나치면 표가 난다. 부족하면 잎이 노랗게 되거나 열매가 부실하다. 거름이 지나치면 웃자라 병들거나 비바람에 쉽게 쓰러진다. 공부도 그렇지 않은가. 국어, 영어, 수학이 중심일 수 없다. 그렇다고 부모나 교사가 다 해줄 수는 없다.

    내가 믿는 건 바로 ‘생명의 본성’이다. 배움도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잘산다는 건 잘 먹고 잘 자는 것 못지않게 잘 배운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잘 배우는 기준이 뭘까. 한마디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걸’ 배우기다. 잘 배우는 길에는 사람마다 자기 길이 있다고 본다. 이를 고상하게 말한다면 맞춤교육일 수도 있고 개성화라고 해도 좋으리라.

    나는 이를 좀더 구체화하여 ‘몸에 맞는 배움’이라 말하고 싶다. 배우는 데는 몸이 기본이지만 ‘잘’ 배우자면 자기 몸에 맞아야 한다. 사람마다 몸이 다르듯 배움도 다른 게 어쩌면 정상인지 모른다. 같은 시간, 같은 공부를 해도 그 결과는 다르다. 그 이유를 분석해보면 뇌, 집중도, 열의, 호기심, 환경 따위가 거론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종합하여 몸으로 본다. 뇌도 몸의 한 부분이니 몸이 발달한다는 건 뇌가 발달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알고 있는 걸 반복하면 짜증이 난다. 뇌는 용량이 워낙 크기에 늘 신선한 걸 원한다. 집중이나 호기심도 달리 보면 몸이 원하는 배움이다. 호기심이 있는 상태에서 배울 때는 집중이 잘 될 수밖에 없다. 아이가 호기심으로 물어올 때, 눈을 보면 나 자신이 아이한테 빨려드는 느낌이다. 환경도 몸과 분리되지 않는 것 같다. 배울 만한 환경이 아니라면 몸은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한곳에 있어야 한다면 몸이 비비 꼬인다.

    ‘몸에 맞는 배움’은 몸과 배움을 하나로 보는 데 있다.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그런 교육. 몸으로 배운 건 여간해서 잊히지 않는다. 잊었다가도 필요하면 어느새 되살아난다.

    ‘몸 스타크래프트’

    아이들과 몇 해를 함께 지내보니 몸으로 배우는 데도 여러 길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선 쉬운 게 자신의 몸을 자각하고 돌보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몸 관련 책을 자주 보지만 무엇보다 몸을 많이 놀린다. 무위는 보통 낮에는 몸을 움직인다. 무위가 요즘 하는 놀이 가운데 ‘몸 스타크래프트’가 있다. 가상공간의 게임을 오프라인상에서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게임 상황을 머리로 그리면서 집 안팎을 뛰고 구르고 달린다. 축구도 농구도 혼자서 시합을 즐긴다. 어떻게 혼자 하느냐고 아이한테 물어보니 상대방 선수는 물론 심판도 다 있단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그 결과를 내게 알려주는데 대부분 ‘극적인 승부’다.

    자연이는 무위와 달리 책을 좋아해 한동안 집안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우리 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이 있었는데 한 보름을 여러 사람과 함께 걸었다. 교육으로 보면 일종의 체험교육이다. 많은 사람을 사귀었고, 많은 걸 배웠다. 이후 부쩍 몸에 관심을 갖는다. 지난 가을에는 무술축제에 다녀온 뒤 여러 가지 무예를 익히고 있다. 또 다양한 운동과 스트레칭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몸 만들기를 하고 있다. 학교 안 다니는 또래 아이들끼리 만나면 서로 몸이 얼마나 달라졌나 확인하면서 즐거워한다.

    ‘몸에 맞는 배움’은 무엇보다 열린 몸을 전제로 한다. 귀가 열려 있고, 코가 냄새를 쫓고,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일 때 배움은 몸으로 들어온다. 몸 가운데 눈 하나만 봐도 그렇다. 사람이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일 때 오감 가운데 눈이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곳을 보더라도 피로에 찌들어 눈이 충혈된 사람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사람과는 받아들이는 정보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이 좋아하거나 소중한 걸 볼 때는 눈을 크게 뜨고 동공이 커진다. 그리고 기분이 좋다. 새로운 걸 보면 몸이 산뜻해진다. 보기 싫은 데 억지로 봐야 한다면 저절로 눈이 거슴츠레해진다. 물론 얼굴도 찡그린다. 무위는 영화를 보다가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아예 고개를 돌린다. 몸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맞는 배움이란 그러니까 배워야 좋은지 아닌지, 얼마나 오래 배워야 하는지를 몸이 먼저 알고 있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아이들 몸은 아직 온전한 게 아니다. 산골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온갖 유혹이 따른다. 인터넷 게임에 빠지면 눈이 침침해도 잘 느끼지 못한다. 무위는 스스로 게임 중독이란다. 다른 식구들은 무위가 중독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도 본인이 그렇단다. 그 진단은 물론 무위가 신문에 난 게임 중독 기사를 꼼꼼히 보고 나서 내린 것이다. 그 기사에 중독 정도를 체크하는 문항이 있고, 문항마다 점수가 있다. 하나하나 해당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를 합해서 내린 결론이란다. 그러고는 중독에 무작정 빠져들지 않기 위해 공부와 게임을 연계한다. 일기를 쓰면 5분, 수학 한 장을 다 풀면 10분. 한자 받아쓰기는 20분. 이런 식으로 ‘공부한 만큼 게임을 한다’ 고 스스로 정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깨고

    무위가 하는 인터넷 게임은 몸에 무리를 주긴 한다. 자신의 몸에 맞게 자라는 데는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에도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나는 가장 기본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바로 자고 먹고 싸는 것. 세 가지 가운데서도 생명을 가장 온전하게 실현하는 게 잠이 아닌가 싶다. 잘 만큼 푹 자고 몸이 잠에서 ‘저절로’ 깨어났을 때 기지개를 죽 켠다.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몸놀림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잘 때 나타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반면에 잠이 갖는 고유하고 신비한 영역은 이제야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잠은 단순히 피로를 푸는 것만이 아니라고 한다. 성장과 기억, 그리고 창의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산골 아이들

    신문을 스크랩하는 무위. 바둑 먼저, 다음에는 만화를 오린다.

    그럼에도 잠의 신비를 과학이 다 밝힐 수는 없다. 그럴 바에는 자연스러운 생명 본성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나와 아내는 일어나기 싫지만 일어나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게 한다. 언뜻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라 할지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잠은 우리 아이들 치유에 큰 몫을 한다. 자연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한동안 잠을 늘어지게 잤다. 아내가 잔소리를 할라치면 자연이가 둘러대는 이유가 근사하다. 아니, 과학적이다.

    “엄마, 성장호르몬은 잠잘 때 왕성하게 나온대요. 엄마는 내가 크는 걸 반대하지 않잖아요?”

    자연이는 잠과 꿈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바 있다. 어쨌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170cm에 가까울 만큼 키가 컸다. 그러더니 어느 날 “이제 잠을 줄여야겠어요” 하더니 조금씩 늦잠에서 벗어나고 있다.

    무위 역시 몇 해를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때로는 아침 밥상을 차리면 그때서야 부스스 일어날 만큼. 그러다가 올 봄부터 일어나는 시각이 부쩍 일러지더니 여름에 접어들면서 ‘새벽형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6시, 때로는 5시에 일어날 때도 있다. 물론 알림시계에 의존하지 않고 몸이 스스로 깨어나는 시간이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는 날은 안방으로 건너온다. 머리맡에서 넌지시 우리 부부를 깨우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아내까지 덩달아 잠버릇이 바뀌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무위의 늦잠 버릇은 뿌리가 깊다. 길게 보면 10여 년 전 서울 생활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무위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아내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다. 아침이면 알림시계와 ‘사투’를 벌였다. 시계가 울리면 본능적으로 일어나 일단 버튼을 누르고 몸을 웅크리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비몽사몽 뜸을 들이다가 더는 지체할 수 없을 때 화들짝 일어나 총알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몸이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 일어나야 하는 생활. 뱃속 아기 역시 엄마의 긴장을 고스란히 받으며 자랐으리라 믿는다. 잠에 대한 긴장과 억압이 무위의 뼛속까지 밴 게 아닌가 싶다.

    “축하해, 새나라의 어린이가 된 걸”

    그뿐만이 아니다. 무위가 갓난아기 때 산골로 내려왔는데 돌 무렵 내가 무위를 돌본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아기를 조금이라도 더 재우고자 했다. 내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자면 아기는 자는 게 좋았다. 이불을 토닥거린다거나 자장가를 불러주며 더 자기를 바랐다. 지금 돌아보니 아이는 깨어 있고 싶은데 자야 했다. 그러다가 이어진 어린이집과 학교생활에선 계절과 몸 리듬을 따르기보다 등교 시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이 자신의 몸에 남은 억압을 풀어내고 치유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셈이다.

    아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신기해 물어보았다.

    “어떻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니?”

    “글쎄요, 제 몸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제는 일찍 졸려요. 낮에 에너지를 다 써서 그런지.”

    이제 무위는 바른 생활의 시작에 와 있다고 본다. 자기 몸 리듬을 깨닫게 된 것이다. 책으로 배우고 부모나 선생에게서 여러 번 들었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이 아이 몸에 배기 시작한 셈이다. 나머지 식구들이 무위를 격려한다. “축하해. 새나라의 어린이가 된 걸.”

    하지만 무위에겐 아직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 게임과 놀이에서 벗어나야 하고, 공부 자세나 밥 먹는 자세가 아직 반듯하지 않고 덤비듯이 한다.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은 몸을 제대로 못 움직여 몸살을 앓기도 한다. 가끔 또래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곧잘 흥분하다. 그럴 때는 몸에 무리가 간다.

    잠 다음으로 소중한 생명 본성은 먹는 것. 우리는 밥상에서 ‘이것 먹어봐라 저것 먹어봐라, 많이 먹어라’ 이런 말을 거의 안 한다. ‘빨리 먹어라’도 안 한다. 아침은 잘 차려서 배 고플 때 먹는다. 당연히 자기 먹는 것에 열중한다. 저녁은 각자 알아서 가볍게 때우거나 먹지 않고 잔다.

    몸으로 배우고, 배운 게 몸이 되는 산골 아이들

    녹색대학 교육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자녀 교육에 대해 강의하는 아내(맨 오른쪽). “부부 싸움 안 하고, 부모 자신이 제대로 사는 게 아이들 잘 키우는 길”임을 강조한다.

    오늘 아침에 무위는 여섯시에 일어났다. 아이는 제 방을 치우고 나서 공부도 하고 게임도 하고 운동도 하다가 아홉 시가 넘어서 아침을 먹었다. 밥상에서 연거푸 “맛있다, 맛있다” 한다.

    밥상에 우리네가 농사지은 것말고 특별한 반찬이라도 있으면 경쟁이 치열하다. 이를테면 생선 네 마리를 구워 접시 하나에다 놓으면 밥을 절반도 안 먹어서 다 없어진다. 보다못한 아내가 생선을 네 사람 몫으로 나누어놓는다. 한 마리씩 나눠주면 무위는 밥 다 먹고도 생선이 남는다. 마지막 남은 생선을 알뜰히 발라 먹는 모습. 뼈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는다. 우리집 고양이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지식의 소화불량, 지식의 변비

    나 역시 먹는 데는 양보하지 않는다. 아내는 그래도 아이들에 대해 배려를 많이 하는 편이다. 아이들도 가끔 부모를 생각해 오디를 따온다거나 찔레순을 꺾어 입에 넣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귀한 과일에는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다. 복숭아가 처음 열리던 해, 나무에 달린 복숭아가 다 합해봐야 고작 열 개 남짓했다. 일하러 오고가는 길목에 하나씩 따먹었다. 물론 가장 모양 좋고 잘 익은 걸로 골라서. 그러다가 세 개쯤 남았는데 어느 날엔가 한꺼번에 다 없어졌다. 그런데 저녁에 아내가 고백한다. 복숭아나무에 복숭아가 딱 세 개 있길래 셋이서 나눠 먹었단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말을 듣고 나도 고백했다. 벌써 여러 개 따 먹었다고. 그러자 아이들이 한꺼번에,

    “치사해요, 아빠.”

    “새벽에 일하다 배고파봐라. 안 먹고 배기나. 얘들아, 이런 이야기 알지. ‘새벽은 깨어 있는 자에게 온다고. 음 하하하.”

    이렇게 먹는 것에 경쟁이 치열하다. 손님 아이들이 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오히려 그 부모가 아이한테 ‘더 먹어라’고 잔소리하는 게 싫다. 그래도 반복되면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애써서 농사한 건데 억지로 먹이려고 하는 게 나로서는 못마땅하다. 배고플 때 먹는 생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모습이다. 입시 경쟁은 몰라도 먹는 경쟁 하나는 우리 식구가 ‘치열하게’ 하는 셈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먹는 것과 배우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가 아니라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건 몸에 독이 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이상을 알게 됐을 때 고민은 깊어만 갔다. 새로운 걸 알수록 더 목말랐고, 아는 걸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나약함에 괴로워해야 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지식의 소화 불량에다가 지식의 변비라고나 할까.



    그러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배움을 강제하지 않는다. 자신감이란 자신(自身)만의 느낌이 아닌가. 남 따라가다보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나’는 있는데 ‘자신’은 없다는 비극을 우리 아이들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걸 배우다보면 자신감 하나만은 제대로 크는 것 같다. 몸이 자라는 만큼 자신감도 자라는 아이들. 솔직히 이제는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게 많지 않다. 이래저래 나는 팔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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