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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본 한국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의 경쟁력

강대국 세계관에 포박, 주류와 ‘맞장’ 못 뜨는 ‘우물 안’ 책상물림

논문으로 본 한국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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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정치, 혁명이 서양사 연구의 전통적 소재였다면, 과거에 비해 문화적으로 접근한 논문이 늘어난 것도 특징이다. ‘르네상스와 미각의 재발견(연세대 사학과 석사)’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을 통해 본 빅토리아기 영국: 문화를 통한 사회통제와 제국주의(서울대 서양사학과 석사)’ ‘헨델과 18세기 영국: 오라트리오 벤처와 국민적 전통의 창출(서울대 서양사학과 석사)’ ‘프랑스 대혁명기(1789~1799) 민중 축제와 엘리트 축제에 관한 연구(고려대 서양사학과 박사)’가 그 예다. 박물관, 미각, 음악, 축제 등 서양사를 연구하는 소재가 다양해진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논문 주제를 택함에 있어 여전히 지역 편중현상이 두드러진다. 다음은 박지향 교수의 지적이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주와 관련한 연구 논문이 한 편도 발표되지 않았다. 태평양시대가 도래한 이 시점에 호주와 뉴질랜드에 대한 역사 연구가 중요한데도 한국에는 전공자가 전무한 실태다. 학생들에게 미개척 분야의 연구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주제 선택에 있어 단기적 안목으로 유행에 편승하는 경향이 높다. 올해 새로 들어오는 한 학생들은 모두 미국사를 전공하겠다고 해 안타깝다. 유럽통합 문제는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며, 제3세계 연구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연구 지역과 주제를 택하는 데 있어 10~2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아쉽다.”

서구중심주의적 학문 풍토를 비판해 온 서울대 최갑수 교수는 “대개의 논문이 그리스 로마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 미국 등 강대국 위주의 시각으로 서양사에 접근함으로써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재생산하는 경향이 짙다”고 지적하면서도 “‘18세기 후반 계몽사상과 식민주의: 레날의 를 중심으로(서울대 서양사학과 석사)’ 등과 같은 논문에서 유럽 중심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우리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려는 긍정적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평가했다.

이슬람·오세아니아史 연구 없어



동양사학의 경우 37편의 논문 중 중국사를 다룬 것이 32편(박사·12편)에 달한다. 이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국의 파워를 반영한다. 일본 연구 논문은 4편. 반면 중앙아시아사를 다룬 논문은 단 1편에 불과하며, 동남아시아사, 인도사, 서남아시아 역사를 다룬 논문은 전혀 없었다. 현실적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이슬람 지역 연구가 취약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의 중국학 연구는 비교적 국제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대 이전에는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취지에서 한중 관계사 연구가 주로 이뤄졌지만, 이후 중국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게 됐다. 중국사 연구의 본류에 들어가 함께 토론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중국사를 위주로 하는 동양사 연구는 서양사에 비해 사실 파악 작업에 치중하고 있다. 서울대 박한제 교수(동양사)는 “서양사의 경우 역사적 사실이 거의 밝혀진 상태지만, 동양사에서는 아직 밝혀내야 할 사실이 많아 서구와 같은 유희적 담론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미국 등지와 비교하면 재미없는 주제가 많은 편”이라며 “그것만 보면 연구수준이 아직 서양사에 미치지 못한 단계”라고 지적한다.

동양사 연구가 중국에 편중돼 있지만, 현재의 한중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 연구자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중국은 뜨고 있어도, 중국사나 중국철학 연구로는 아직 발길이 뜸하다는 얘기다.

박한제 교수는 “학문이란 당장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라도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선후진국을 나누는 척도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이슬람 등지의 역사 연구자가 전무한 우리 대학원이야말로 후진적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조기에 가시적 성과를 얻으려는 조급증에서 생긴 결과다. 대학에서 문사철이 같이 연구되는 지역연구 단위, 예를 들어 하버드대 EALC(동아시아어문학) 같은 학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사 논문 140편 중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시기는 조선시대(44편)이며, 구한말~일제시대(42편) 연구가 그 뒤를 따른다. 과거에 비해 한국사 연구자의 절대적인 숫자가 증가했고, 다양한 주제를 선택함으로써 연구 영역이 확대된 것도 눈에 띈다. ‘고려전기 삼성육부제와 각사의 운영(연세대 사학과 박사)’ ‘고려시대 권농정책(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 ‘고려시대 서얼 연구(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 등 그동안 다뤄지지 않던 권농정책, 서얼, 삼성육부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도 눈에 띈다.

고려대 이진한 교수(한국사)는 “논문 편수가 증가하고 주제가 다양해졌지만, 정밀한 실증이나 사회과학적 이론을 배경으로 한 논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80년대만 해도 학생들은 대학의 동아리 활동이나 대학원의 세미나에서 경제사, 유물론에 대한 지식을 갖췄으나 최근 입학생 가운데 전근대 전공자들은 이론에 관심이 없다. 석사과정에서 경제사를 공부하겠다는 사람도 자연히 사라지게 됐다”고 전하며 안타까워 했다.

한국사를 연구하면서 ‘우물안 시각’과 민족주의에 갇히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서양사)는 “한국에서 나오는 한국사 연구 논문이 최고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면 오산”이라며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근현대사 연구는 오히려 학문 발전을 저해한다. 미국 등지에서 다양한 관점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대학원의 역사연구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임지현 교수는 “한국사, 서양사, 동양사를 망라하는 비교사적 연구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제안한다. 역사는 동시대에 일어나는 전 지구적 현상인 만큼 거시적이고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맞물려 돌아가는 유럽, 일본, 미국의 근현대사를 모두 잘 알아야 한다. 근대 이후 세계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 분과를 초월해 동시대의 동양사, 서양사, 국사를 함께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령 ‘19세기 여성사’ ‘19세기 이민노동사’와 같은 주제를 잡고 동양사·서양사 학자들이 함께 연구해나가는 유럽의 풍토를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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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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