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회고록 펴낸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독선·분열·무능·부박·부패에 빠졌다”

  •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입력2005-08-12 18: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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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하·김근태 살리려 머리 짜낸 ‘재판부기피신청’과 ‘모두진술권’
    • 사상 검증에 연연하는 언론은 ‘자객(刺客)’
    • YS와 DJ는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 통합할 경륜 없었다
    • YS는 군부독재 청산, DJ는 국민통합, 노 대통령은 21세기 기틀 마련이 소명
    • YS는 자신에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 DJ는 그 반대
    • 정치인은 우스운 존재, 역사의식 없고 신념조차 변해
    회고록 펴낸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김정남(金正男·63) 전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이 최근 펴낸 회고록 제목이다. 684쪽에 달하는 이 책(창비 펴냄)에서 그는 민주화운동에 온몸을 던진 지난 30년의 역정을 오롯이 쏟아냈다.

    대전 출신으로, 이른바 ‘6·3세대’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그룹인 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인 그는 1964년 6·3한일회담반대운동의 배후인물로 구속된 이래 민주화운동에 진력해왔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2월부터 22개월은 교문수석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엔 전태일·김상진·김지하·리영희·윤보선·박종철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 인사의 이름과 3·1 구국선언사건, 5·18민주화운동,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인천사태, 6월 민주항쟁 등 지난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사건들이 열거돼 있다.

    특히 눈길을 잡아채는 것은 민주화운동 관련 비화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상조작에 관한 뒷얘기에서부터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재판한 판사와 맞닥뜨린 시인 김지하의 재판을 연기하려 재판부기피신청을 묘안으로 짜내게 된 속사정, 증인채택과 증거보전신청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법정에서 김근태씨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형사소송법 조항을 샅샅이 훑은 끝에 찾아낸 모두(冒頭)진술권에 얽힌 일화 등이 당시의 절박함을 웅변한다.

    책의 내용도 그렇지만, 실상은 30년을 한결같이 민주화운동에 매진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떨지가 더 궁금했다.



    7월9일, 서울 양재동의 한 오피스텔에 자리잡은 그의 서재에서 3시간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10평 남짓한 이 공간에 ‘우촌누실(友村陋室)’이란 이름을 붙였다. ‘우촌(友村)’은 시국사건 구속자 변론활동을 줄곧 함께해온 이돈명 변호사가 지어준 아호(雅號). 당시 변론을 위한 자료수집에 열정적이던 그에게 감동한 이 변호사가 “너야말로 민중의 벗이다”며 이 호를 붙여줬다고 한다.

    1995년 청와대에서 나온 뒤 김 전 수석은 독서와 집필을 하고 짬짬이 지인들을 만나며 소일해왔다. 새벽 4시에 기상하는 그는 매일 2시간 등산을 하거나 분당 자택 인근의 텃밭을 일군다. 편안해 보이는 남방셔츠에 면바지, 흰 고무신의 소박한 차림….

    그는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사건, 인혁당 사건 진상조사 및 폭로, 김지하 양심선언 발표, 보도지침 폭로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재야의 거물’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를 가리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한번도 자신을 드러내 앞에 나서지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운동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평했다.

    ‘민주화운동 대부’

    -세간에서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데 대한 부담은 없습니까.

    “과분하고 부끄럽죠. 민주화운동은 전 국민적 에너지의 집합으로 이뤄진 건데 누가 대부네 하는 것도 이상하고. 민주화과정에서 스러져간 이가 많고, 살아남은 것조차 죄송스러운데 그런 말을 들으니 외람되고 민망할 뿐입니다.”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 자기네는 박정희의 유신정권과 다르므로 그 유산을 물려받지 않겠다면서 인혁당 사건 관련 생존자나 김지하를 석방했는데, 당시 시사월간지들엔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선정적으로 소개되곤 했어요. 민주화운동과 전혀 관련 없는 이들이 그런 글을 썼어요.

    일례를 들죠. 백낙청 교수는 1974년에 제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는 과정에 서명을 해준 것 때문에 파면됐는데, 앞서 말한 기사들엔 1979년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에 서명하는 바람에 파면된 것처럼 왜곡돼 있어요. 이후 나온 책들도 그걸 본보기 삼아 왜곡이 반복되곤 해서 이런 걸 누군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에 부응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몫이 됐다. 김 전 수석의 제안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개관할 필자를 찾던 가톨릭계 월간지 ‘생활성서’측은 결국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거꾸로 그에게 집필을 맡겼다. 따라서 회고록의 내용은 1999년 2월부터 2004년 8월까지 5년 반 동안 ‘생활성서’에 장기 연재된 ‘역정, 민주화 30년’의 원고를 수정·보완하고,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부분을 추가 집필해 완성한 것이다.

    김 전 수석은 지금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그가 ‘생활성서’에 건넨 육필 원고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념자료로 보관 중이다. 그의 첫 저서인 이번 회고록엔 언론에 보도된 기사, 민주화운동 관련자 증언, 시위에서 외친 구호, 성명서 및 선언문, 각종 재판 관련 기록(상고·항소 이유서, 최후변론, 모두진술) 등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들이 빼곡히 수록돼 필자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본인 외에 민주화운동 관련 집필의 적임자로 염두에 둔 사람이 있었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다만 학자나 대학원생, 기자들 중에 제가 증언하고 구술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써줄 사람이 없을까 하는 생각은 했어요. 제가 관여한 내용이 꽤 많은데 제 손으로 직접 그걸 쓴다는 게 부담스러웠죠.”

    이부영에 얽힌 가화(佳話)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을 돌아보면 소회가 어떻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세월이 순식간에 스쳐 지난 것 같지만, 사실 그때그때마다 힘들었습니다. 아프고 슬픈 일도 많았어요. 우리의 민주화가 30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뤄졌으니 그만큼 많은 희생이 뒤따른 거죠.”

    -늘 ‘배후’로 존재한 데 대한 회한은 없습니까.

    “민주화에 이바지한 이들의 뒷바라지와 심부름을 한 것에 만족합니다. 수배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구속자 가족을 돕는 등 고통받는 이들을 수발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김 전 수석은 ‘생활성서’에 글을 연재할 당시 딱 한 번 순서를 바꿔 쓴 적이 있다. 2003년 6월, 고영구 변호사가 국가정보원장에 내정되자 야당은 1986년 인천사태 당시 수배 중이던 이부영(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 동기)씨를 고 변호사가 숨겨준 일을 공격하고 나섰는데, 이에 대한 해명을 위해 인천사태에 관한 글을 앞당겨 쓴 것.

    “이부영씨는 숨어 있던 고 변호사 집에서 잡히기라도 하면 고 변호사의 팔순 모친과 신경성 위경련을 앓는 부인에게 큰 폐를 끼칠 것 같아 걱정이 많았어요. 그는 제게 ‘도피 중이지만 편안하게 살고 있는 셈인데, 고 변호사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의 집은 풍비박산 나지 않겠냐, 다른 곳에 있었던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잘 알고 지내던 이돈명 변호사 댁에 이씨가 숨어 지낸 것으로 위장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변호사도 그러마고 했어요.

    그런데 고영구 변호사가 국정원장에 지명되자 그런 옛 가화(佳話)를 한나라당의 일부 의원이 큰 잘못인 양 몰아붙이며 성명을 내네 마네 한 거예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리려 글을 쓴 겁니다.

    아무튼 1986년 10월 이부영씨를 숨겨준 혐의로 이돈명 변호사가 잡혀간 다음날, 저와 고영구·황인철·홍성우 변호사가 만나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며 대책을 논의했는데, 고 변호사는 자기가 숨겨줬으니 잡혀가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래봤자 이돈명 변호사도 위계에 의해 관(官)을 속인 범죄가 구성될 테니 고 변호사가 사실을 털어놔봐야 실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모두 눈이 벌개졌어요. 무고한 노인네를 감옥에 먼저 보냈으니…. 저는 이 일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있었던 하나의 미담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국정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고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나요?

    “그가 사의를 표한 6월 초에 한 번 만났어요.

    -왜 그만뒀다던가요? ‘외로워서 사표 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요.

    “그런 건 아니고…요즘 건강이 좀 나빠졌대요. 또 본인이 하고자 하던 일을 대강 해냈다고 생각했고. 기회 닿을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얘기하려 했던 것으로 압니다.”

    군부정권의 과오

    -회고록 내용이 사건 중심으로 서술되다 보니 저자 본인이 겪은 일화가 생각만큼 많지 않아 조금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감이 없지 않죠. 가능한 한 제 주관을 배제하려 한 때문일 겁니다. 직접 글을 쓰다보니 아무래도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기 쉽고,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랑으로 흘러 내용의 공신력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가급적 그런 에피소드는 삼갔죠.”

    -그래도 후세에 남길 책인데, 좀더 흥미롭고 드라마틱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그런 내용은 ‘내가 겪은 민주화운동’이란 주제로 추후 글을 쓸 생각입니다. 이번에 책이 나오자 ‘한겨레’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그런 글을 써달라고 제의해왔어요. 아직 확답은 못했지만.”

    -박정희·전두환 군부정권의 가장 큰 과오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이 컸고, 국제적으로도 국가 위신이 추락했어요. 내재적으로 볼 때도 민주화세력 가운데 젊은층은 굉장히 우수한 인력이었는데, 이들을 민주 대(對)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의 내전으로 몰아넣어 인류 진보와 세계 평화에 기여할 능력과 창의력을 소진시켜버린 것이 큰 과오라고 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조작 폭로와 관련해 ‘동아일보’가 어떤 기여를 했다고 봅니까. 회고록에선 ‘중앙일보’ 법조기자의 역할이 컸다고 쓰셨는데….

    “흘러 지나갈 뻔한 진실을 문제삼았다는 점에서 언론보도는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책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문민정부에서 교문수석으로 발탁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1974년 12월에 YS를 처음 만났어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할 때였는데, 윤형중 신부가 상임대표위원, 함세웅 신부가 대변인, 홍성우 변호사가 사무총장을 맡았죠. 모두 제가 잘 아는 분들이었어요. 저는 모임의 실무자 역할을 했어요. 그때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도 대표위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가 만나게 됐죠. 당시 김덕룡씨가 YS의 비서실장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를 안 만나려고 일부러 새벽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YS를 만나고 나오는데 누군가 쫓아 나와 ‘안녕히 가시라’며 인사를 하더라고요. 김덕룡씨는 사회학과를 졸업한 서울대 동창이죠. 결국 그와 저를 주된 채널로 해서 YS와 재야세력의 협력관계가 형성됐어요.

    이 일을 계기로 YS의 연설문과 성명서를 무척 많이 썼어요. YS의 레테르와도 같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도 제가 만든 겁니다. 당시는 원고작성뿐 아니라 기자들에게 돌릴 유인물 제작까지 제가 다 할 수밖에 없었어요. YS는 연금상태였기 때문에 제가 쓴 원고를 김덕룡씨를 통해 전해주곤 했죠. YS와는 그런 눈물겨운 일이 많았습니다.”

    ‘不在其位 不謀其政’

    김 전 수석은 YS를 위해 자신이 쓴 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1983년 YS가 목숨을 걸고 벌인 단식투쟁의 성명서인 ‘국민에게 드리는 글-단식에 즈음하여’이고, 그 완결편이랄 수 있는 것은 그해 8월15일 워싱턴의 김대중과 서울의 김영삼 이름으로 국민 앞에 낸 ‘김영삼·김대중 8·15 공동성명’이라고 한다. YS의 대통령 취임사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YS는 ‘월간중앙’ 2000년 11월호 인터뷰에서 김 전 수석을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내가 아주 크게 평가한다. 사실은 우리 언론이 그 양반 같은 사람의 글을 많이 실어줘야 한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YS는 제가 세상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줄 압니다. 이번에 제가 쓴 책을 보냈더니 ‘참 큰일을 해냈다’고 격려하더군요.”

    -얼마나 자주 만납니까.

    “더러 만나죠. 올 복날에도 같이 칠면조고기를 먹기로 했어요. 어떤 때는 사람들 만날 때 저보고 배석해달라고 해서 자주 만나고, 또 어떤 땐 좀 뜸해서 몇 달에 한 번 만날 때도 있죠.”

    -주로 어떤 얘기를 주고받습니까.

    “YS가 저를 개인적으로 부를 때는 대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상의하는 경우죠.”

    -YS의 독설과 돌출발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자제했으면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여론인 듯한데요.

    “‘부재기위(不在其位)하면 불모기정(不謀其政)’이란 옛 성현의 말씀이 있어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정사(政事)에 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는 의미죠. 이와 비슷한 얘기들을 저는 YS에게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 분에게 휘호 하나 부탁할 때도 그런 걸 염두에 두곤 합니다. 예컨대 ‘신기독(愼其獨)’ 같은 경구를 써달라고 하는데, 군자는 혼자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가고 또 삼가라는 뜻입니다. 이걸 써 주십사 해서 받았어요. 물론 휘호를 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그 이면엔 ‘쓰면서 한번 뜻을 생각해보시라’는 바람을 담았죠. YS도 그런 점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교문수석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을 헌 일에 보람을 느낍니까.

    “저는 국수주의자가 아닙니다. 당시 청계천에만 가도 만화다 애니메이션이다 해서 이미 일본문화가 들어와 있었잖아요. 그런데 외형상으로만 일본 문화를 막아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래서 YS한테 ‘일본 문화는 수입 개방해야 한다, 그러나 민족적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광복 이후 우리 스스로 민족정기나 자신감을 세워본 일이 있습니까? 총독부 건물이 1924년에 만들어진 건데,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기네 건축기술이 자랑스럽다며 곧잘 사진도 찍어가곤 했어요.

    회고록 펴낸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

    김정남 전 수석은 최근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을 담은 회고록을 펴냈다.

    그걸 보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갖는 일을 단 하나라도 한 뒤에 일본 문화를 수입 개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총독부 건물을 헌 거죠. 다만 그 일과 관련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점은 아쉬워요. 당시 총독부 건물에 가보니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방까지 있더군요.”

    -총독부 건물이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과거의 잔재이지만, 그만큼 잊지 말아야 할 대상이기지 않을까요? 이전한다든지 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명성그룹 회장을 하던 김철호씨가 동해안에 옮겨 지으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는데, 예산 문제 등으로 이뤄지지 못했어요.”

    사상검증 대상이 되다

    1994년 6월호 ‘월간조선’엔 조갑제 당시 편집장이 쓴 장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기사 제목은 ‘보수층의 표적 김정남 수석의 이념과 역사관’이다.

    -수석 시절 ‘조선일보’의 사상 검증 대상이 된 일에 대한 소회를 묻고 싶은데요. 언론에 의해 ‘공산주의자’ 혹은 사상이 의심스런 ‘정부 내 용공주의자’라고 매도당했는데….

    “비겁한 짓입니다. 언론이라기보다 자객(刺客)이라고 할까. 등에 비수를 꽂는. ‘남들이 너를 빨갱이라 그러는데 너 스스로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라’, 이건 5·6공 때 공안검사들이 학생들 잡아다 빨갱이로 만들어놓고 ‘무죄란 걸 네가 입증해봐라’ 한 것이나 다름없는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엔 민족·민주·통일을 지향하는 축과 반민족·반민주·반통일을 좇는 다른 한 축이 있습니다. 사실 민주화가 투쟁을 통해 당당하게 쟁취되지 못하고 변칙적으로 야합해서 이뤄진 까닭에 반민주의 편에 섰던 이들이 폭압적 정권 아래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따져보지 못했어요. 역사와 정의 앞에서 민주주의를 당당히 선언하지도 못했죠. YS와 DJ도 마찬가지였어요.”

    -YS가 원래는 대북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나요? 김 전 수석이나 한완상 통일부총리를 옆에 포진시킨 걸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는데요.

    “야심이 있었죠. 제가 YS의 대통령 취임사에 이런 대목을 넣었어요.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합니다. 백두산이든 어디가 됐든 만납시다. 만나서 이야기합시다’는 내용인데 김 주석도 무척 고무됐을 겁니다.”

    -YS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고, 북측에 15만t의 쌀을 지원하는 등 포용적인 자세를 취했는데, 나중엔 태도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YS도 재임 초기엔 통일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어요. 하지만 북측에서 호응해주지 않았죠.”

    ‘수석 중의 수석’

    -YS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김 전 수석에게 많이 의지했을 텐데, 교문수석에서 퇴진한 것과 후에 차남 현철씨의 영향력이 커진 것에 관련성이 있다고 봅니까.

    “조금이야 영향이 있었겠죠. 현철씨가 마음놓고 일을 시키는 수석이 많았는데 저는 그들과 달랐으니까. 그래서 다른 수석들이 저를 껄끄럽게 여기기도 했어요. 한번은 금융실명제 실시를 앞둔 때였는데, 그때 제가 휴가를 가야 하는데도 안 가고 있으니까 YS가 실무진이 작성한 금융실명제 관련 대국민 담화문 초고를 건네줬어요. 저는 완전히 새로 썼어요.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바꾼 거죠. 지금 기억으로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도 드디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시작합니다’는 내용인데, 나중에 들으니 경제수석조차 금융실명제 실시 방침을 몰랐다더군요.

    그만큼 저에 대한 YS의 신임이 두터웠어요. 제가 쓴 연설문이 아니면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공보수석실에서 저를 부담스러워해 괜히 제 글을 뜯어고치곤 했죠. 일화를 하나 들면, 과거 교황의 유엔 연설 가운데 ‘핵을 든 손으로는 악수를 할 수 없다’는 대목이 있어요. 제가 그걸 YS 취임 100일 기념 연설문의 남북관계 관련 부분에 원용했는데, 공보수석실에선 ‘핵을 든 자와는 악수를 할 수 없다’로 고쳐버렸어요. 북측에서 오해할 소지가 다분했죠.”

    감옥에선 건강이 ‘이찌방’

    교문수석은 그에게 마지막 직업이었다. 평생을 통틀어 월급을 받아본 직장이라곤 ‘평화신문’과 청와대가 전부.

    -생계를 꾸려가기가 쉽지 않았겠습니다.

    “도움을 많이 받았죠. 물론 돈이 없으니까 아껴 썼지만, 생활비는 있어야 하잖아요. 8대 국회의원선거 때 신상우(국회 부의장 역임)씨가 경남 양산에서 30대 나이로 당선됐어요. 그래서 누군가의 소개로 그의 의정활동을 비공식적으로 도와주면서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최소한의 생계비는 확보했죠.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김지하에게 자금을 줬다는 혐의로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잡혀갔을 때 제가 매일 문안편지를 썼더니 풀려난 뒤 한달에 10만원씩 건네주기도 했어요. 제가 수배 중일 때는 홍사덕씨가 생활비를 보탰어요. 김덕룡씨와, 지금은 작고한 황인철 변호사도 도와줬고. 김수환 추기경도 제가 도피 중일 때 20만원을 보내왔어요. 차마 그 소중한 돈을 쓸 수 없어 깊이 감춰뒀다 6·29 선언 이후 수배가 해제된 뒤 아이들 교육비로 썼어요. 애들한테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얘기를 들려줬죠.”

    -1994년에 재산 공개한 명세를 보니 5억7000만원이던데요.

    “대전에 갖고 있던 땅이 공영개발되면서 땅값이 많이 올라서 그래요.”

    -1988년 5월에 가톨릭계 주간지 ‘평화신문’ 창간도 주도하셨죠?

    “당시 재야세력은 언론의 자유를 갈구했어요. 그래서 ‘한겨레’가 국민 모금에 의해 창간될 즈음 가톨릭계도 평화신문을 창간했죠.”

    김 전 수석은 평화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1988년,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 덕에 신 교수는 통혁당 사건의 다른 연루자보다 비교적 빨리 석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문과 책 제목도 김 전 수석의 ‘작품’이다.

    이태의 ‘남부군’도 평화신문 연재물로 기획했는데, 후일 책으로 출간됐다.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씨의 옥중편지글도 ‘나의 주장’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다. 그래서인지 김 전 수석은 뜻밖에도 2002년 ‘문화일보’가 선정한 ‘한국의 출판기획자 3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진실, 광장에 서다’를 보면, 교도관 전병용씨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긴요한 구실을 했음을 알게 된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수감된 서울구치소의 교도관이던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기자 출신으로 수감 중이던 이부영씨가 경찰의 범인 조작 진상을 밝혀내 쓴 편지를 김 전 수석에게 전달했는가 하면, 인혁당 사건 조작의 진실을 알아채고 구속된 상태에서도 그 진상보고서를 작성하던 김지하에게서 이른바 ‘양심선언’ 문건을 건네받아 이를 역시 김 전 수석에게 전달했던 것.

    “제가 처음으로 감옥에 간 1964년만 해도 사형수가 많이 있었어요. 그들에게서 수형생활의 비결을 전수받았어요. ‘감옥 안에서는 건강이 ‘이찌방(いちばん·‘첫째’ ‘최상’이란 뜻의 일본어)’이고, 검사 앞에선 부인(否認)이 이찌방’이란 내용이었죠. 건강법이 독특했는데, 가령 사식을 먹지 않고 관식을 먹되 사탕은 어떻게 먹고, 운동은 어떻게 한다는 거였죠. 그 건강법에 따라 당시 독방에 수용된 정치범 대부분은 냉수마찰을 했어요. 물론 저도 했죠.

    그런데 1968년 서울사대 독서회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3년간 수배를 당하다 1971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잡혀 들어가니 예전의 사형수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사형집행을 한 거죠. 당시 교도관의 이직률이 17%여서 아는 교도관도 없더군요.

    어쨌든 저는 냉수마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관행이 사라져버렸더군요. 그러니 제가 냉수마찰을 하면 교도관들이 신기하다며 구경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전병용씨였어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저를 잘 봤는지 ‘고생하신다’며 해마다 여름에 개를 잡아주는 등 편의를 봐줬어요. 한번은 제가 백기완씨도 데려가 개고기를 먹은 적도 있어요. 당시엔 전병용씨뿐만 아니라 상당수 교도관이 심상치 않은 시국을 염려해 바깥소식을 전해줬어요. 김지하도 자기 회고록에서 교도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썼어요. 이부영·장기표씨 할 것 없이 그들의 덕을 많이 봤죠.”

    -지금의 386들이 직접 겪은 6월 민주항쟁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까.

    “이한열군의 희생이란 큰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우리 국민의 저력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만약 6월 민주항쟁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운동권과 권력간 대치가 더 장기화하고 심화됐을 겁니다.”

    회고록 펴낸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

    김 전 수석은 민주화운동 전력을 가진 정치권 인사들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절차적 정통성을 지닌 YS의 집권으로 30년 군사문화가 청산됨으로써 우리 사회에 일정 정도 ‘의사(擬似)적 민주화’는 이뤄졌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점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까.

    “민주화를 광범하게 정의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 삶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라 봅니다. 1차적으로는 김지하가 ‘양심선언’에서 말했듯이 말의 자유, 해를 보고 해라고 할 수 있고, 달을 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진실을 자신의 언어로 얘기할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가 더 성숙하려면 민주정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는 다양한 계층의 상충하는 목소리를 공동선의 방향으로 조정해내는 것이라 봅니다. 민주화의 최종 목표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 공동체에서 태어난 것을 긍지와 보람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YS나 DJ의 집권으로 민주화의 형식적 요건, 즉 말의 자유는 갖춰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민주화를 위해 마구 달려오기만 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성숙한 민주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했어요. 더욱이 지금 ‘386’이라 부르는 이들은 한번도 그런 고뇌를 해보지 못했죠. 민주화를 권력을 향한 접근으로 봤지, 책임으로 보지 않았어요.”

    공동체에 대한 고뇌 없는 ‘386’

    -YS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군사문화 청산이죠. 광복 이후 우리 정치사에서 제1 사건은 건국입니다. 다음은 30년 군사문화의 청산입니다. YS의 취임사에 ‘이제 다시 정치적 밤은 없도록 할 것이다’라고 썼는데, 실제 YS는 하나회를 청산할 당시 아침에 만나면 ‘한숨도 못 잤다’고 합디다. 국방부 장관에게조차 일부 동기생이 ‘네 배때기엔 총알이 안 들어갈 줄 아냐’고 협박할 정도였으니 YS 역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조깅을 할 수밖에 없었죠.

    비록 5년 단임이지만, 대통령마다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 있다고 봅니다. YS에게 군사독재 청산이 소명이었다면, 지역적·이념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대변한 DJ에겐 국민통합이 소명으로 주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겐 21세기에 걸맞은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일 테고요. DJ는 IMF 외환위기로 국민이 금붙이를 모을 때 진정으로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음에도 분열과 갈등을 확대 재생산한 점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YS가 대통령이 된 후 정치자금을 받지 않기로 한 것도 잘한 일 아닙니까.

    “저는 YS가 안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철씨나 다른 주위 사람들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온전히 YS가 져야죠.”

    -교문수석 시절 재벌총수들도 만나보셨죠?

    “많이 만났죠. 정치자금을 주려는 사람은 없었어요(웃음). 다만 제가 YS와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나니까 YS의 의중을 알고 싶어했죠. 전경련 회장이던 최종현씨는 YS가 자신을 노태우씨의 사돈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어요.”

    -YS와 DJ의 인물됨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두드러질까요?

    “YS는 엉성하긴 해도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입니다. 새벽마다 조깅하고 매일 부친에게 문안전화 드리는 건 보통 정성 아니면 못합니다. 대신 남한텐 관대하죠. 반면 DJ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편이죠. 민주화운동 때도 보면 YS는 자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하지만 위해가 가해진다고 생각하면 정면 돌파하는 능력이 대단했죠. DJ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지혜로운 편이죠. 예컨대 독재정권이 데마고그(demagogue·선동)로 나오면 데마고그로 맞서고 폭력으로 나오면 후퇴해야 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죠.”

    -이 두 인물이 1987년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한 것에 회한은 없습니까.

    “단일화가 안 된 것도 아쉽지만, 당시 ‘4자 필승론’이라고 해서 4명이 출마하면 DJ가 당선되느니, 또는 ‘비판적 지지’니 하는 억지변설을 지어내 스스로를 합리화한 것을 볼 때 민주화세력은 통합보다 분열에 익숙하고 자기합리화에 능수능란하다는 좋지 못한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준 것이 안타깝습니다. YS와 DJ 둘 다 자기 한계와 정략 때문에 민주화가 민족사의 정통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선포하지 못했어요.”

    -12·12, 5·18 사건의 핵심 관련자를 기소할 당시 내막은 없었나요?

    “YS가 집권하자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며, 12·12 사건 피해자인 정승화 일파가 관련자들을 고발해놓았고, 5·18 피해자들도 전두환 군부를 고발해놓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때 민정수석실의 해석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관련자 처벌을 공식적으로 제기할 수 없었지 않냐, 그러니 그 기간은 공소시효에서 빼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1995년 8월인가가 공소시효 만기였는데, 고발 사건들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했어요.

    그때 저는 ‘마땅히 기소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YS는 허삼수·허화평 등 5·18 관련자들이 여당 내에 적지 않은데 전두환·노태우를 기소하면 어떻게 정치를 제대로 해나갈 수 있냐는 의견이었어요. 저는 ‘그렇지 않다. 불구속하되 전직 대통령들을 법정에 세우기만 한다면 세계의 이목 때문에라도 관련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YS는 그 부분에 대해 자신이 없었어요. 다른 수석들도 그랬고. 그 때문에 저만 희화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박계동 의원에 의해 노태우 비자금이 폭로되자 YS의 순발력이 작동해서 곧 12·12 및 5·18 관련 특별법을 만들었죠. 사실은 굳이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어쨌건 12·12 및 5·18 관련자들을 처벌한 일만큼은 DJ도, 노무현 대통령도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교조 교사 복직과 YS의 눈물

    -전교조 해직교사 1500명의 복직에도 김 전 수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압니다.

    “잘한 일이라 생각해요. YS의 대선공약엔 전교조 복직이 없었어요. DJ의 공약엔 있었고. 그런데 제가 아는 전교조 관계자에게서 한 해직교사가 대선 개표상황을 열심히 지켜보다 DJ가 계속 처지자 복직의 희망이 없어졌다며 온 가족이 절망에 빠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어요. 그래서 YS가 당선자 신분일 때 제가 ‘비록 공약사항은 아니지만, 이 일은 YS 당신이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 제 말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더군요. 그래서 가능성이 있다 싶어 강력히 밀어붙였죠. 지금은 전교조 활동이 너무 대결 일변도로 흐르고 있어요.”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사과문도 직접 작성하셨죠?

    “저는 군부정권 때의 전시행정과 ‘빨리빨리 주의’ 때문에 무너지는 게 성수대교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YS가 성수대교 붕괴의 책임이 현 정부에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을 내비치자 전 언론이 ‘최소한 관리책임은 현 정부에 있지 않냐’고 난리를 쳐서 할 수 없이 사과 성명을 작성했어요. YS에겐 장기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당시 야당 대변인이던 박지원씨는 태도가 좋지 않았어요. YS와 DJ는 동병상련을 느낄 만한 처지인데도, 사고가 터지자 ‘김영삼 정부는 사과 정권’이니 ‘밥 먹으면 사과한다’느니 하는 성명을 내며 ‘더티 플레이’를 일삼았어요. 그런데 성수대교 사과 성명을 내고 나자 곧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가 터집디다. 그때 제가 YS한테 ‘매 맞을 것 우리가 다 맞아버리자’고 했죠.”

    -수석 시절,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대를 주창한 적이 있는데, 성과가 있었나요.

    “산업화 세력은 실용주의 세력이고 민주화 세력은 도덕적 세력입니다. 이 두 세력을 결합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IMF 외환위기도 맞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성숙한 민주화·산업화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우리가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를 명쾌하게 이해한 지도자를 갖지 못했어요.”

    -어차피 민주성과 효율성은 좀처럼 양립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서로 보완적일 수 있지만, 상충하는 경우가 더 많죠. 그러나 실용주의 세력의 효율과 민주화 세력의 도덕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한 길입니다. YS는 양 세력을 업고 집권에만 성공했을 따름이지 각 세력을 통합할 만한 경륜이 없었어요. 지금 한나라당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도 집권을 위해 세력을 이용할 뿐 그것을 어떻게 제대로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없었던 결과라고 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

    김 전 수석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시대,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안법 시대, 6공 때의 집시법 시대를 각기 간악, 포악, 교활한 시대였다고 규정한다. 그는 오늘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고 있을까.

    -2005년 7월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져 있다고 봅니까.

    “민주화는 상당한 정도 진척됐죠. 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의식의 성숙도 면에선 미흡하죠. 예를 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관련하여 과격한 투쟁 때문에 외국기업의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든가 교육에서의 일관된 평등주의 등은 문제라고 봅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정치권으로 진출한 인사들의 행태에 대해 쓴소리를 한다면?

    “우선, 민주화운동에서 투쟁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즉 국정운영을 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또한 민주화를 권력개념에서 파악한 결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부족해 독선과 분열, 무능, 무책임, 부박(浮薄), 부패에 빠져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어요. 더 이상 삼류 운동권적인 생각을 갖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 그때의 사랑과 열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고뇌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건강한 실용적 구국운동’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조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부터 깨달아야죠.”

    -초심으로 돌아간 뒤에 할 일은 뭡니까.

    “저는 앞으로 몇 년간이 우리 민족이 웅비할 것인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갈림길이라고 봅니다. 그 해답은 해외로 적극 진출하는 것입니다. 굳이 명명하자면 ‘환(環)차이나 벨트’라고 할까. 옛날 우리 민족이 진출한 것처럼 연해주, 몽골, 중앙아시아, 동남아 등지로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재외동포의 수는 이스라엘이나 이탈리아보다 적지만, 이른바 4대 강국에 동포가 고루 배치된 구조를 가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홍익인간 이념으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고 솔선하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심각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에 기여했거나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게 아니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서면서 강한 이념 지향성을 지녀온 이들입니다. 그들이 지닌 필요 이상의 과격성 때문에 좌우대립이랄까 진보-보수 대립이 치열해지는 경향이 분명 있다고 봅니다. 이제 그 싸움은 접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냉전시대에 처한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그래서 저는 ‘뉴 라이트(new right)’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레프트든 라이트든 싸움만 격화시킨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두 세력은 대립할 게 아니라 국가경쟁력 강화에 함께 눈 돌려야 합니다.”

    과거사 청산, ‘통로’만 열어줘야

    -과거사 청산에 대한 견해는?

    “진실은 밝혀져야죠. 하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밝혀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가령 가장이 무능하거나 포악해서 가정이 파탄났다고 칩시다. 그가 나쁜 짓을 했다면 물론 책임을 물어야죠. 하지만 무능함의 책임을 그 개인에게만 묻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저의 생각은 ‘통로’만 열어주자는 겁니다. 일단 누구라도 과거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해 통로만 마련해주고, 다만 그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은 역사가나 학자들이 하는 게 옳지 않냐는 겁니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을 힘으로 무리하게 해버리면 되레 그 효과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많은 ‘나쁜’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게 됩니다.”

    -송두율 교수의 변론요지서도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와 인연이 있습니까.

    “송 교수의 변호인단 대표는 김형태 변호사죠. 그런데 이돈명 변호사가 송 교수의 재판을 법정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데, 그가 느낀 점을 들려준 것을 제가 마지막 변론요지서로 썼어요. 그때가 2004년 3월이죠.”

    -앞으로도 집필활동을 계속할 건가요.

    “1975년 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이름으로 양심선언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그 운동의 전개과정과 박정희 정권 이래의 갖가지 용공조작 실태, 민주화운동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에 대해 쓸 생각입니다. 하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제가 1975년 2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인혁당 사건 관련자 구명운동을 했고, 1980년 5월 김재규가 사형당하기 전에도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한 겁니다. 그런 일들을 한 것이 오히려 그들의 명(命)을 재촉한 게 아닌가 하는 회오(悔悟)가 남습니다.

    저는 김재규를 살리면 민주화가 되고 만약 그를 놓치면 민주화는 물 건너간다고 생각했지만, YS나 DJ는 신군부에 잘 보이기 위해 서명운동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어요. 저는 정치인을 두 가지 점에서 우습게 여기는데, 하나는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신념이란 게 정작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 광장에 서다’를 통해 과거의 진실을 새로 내보인 김 전 수석에게 작별인사를 겸한 질문을 던졌다. 우문(愚問)은 현답(賢答)을 바라는 기자의 특권 아닌 특권 아니던가.

    -진실은 언제쯤 당대의 광장에 제대로 서게 될까요.

    우문에 대한 답은 이랬다.

    “사회가 진실을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진다면 진실이 감춰지는 일은 점차 사라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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