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100년 만에 찾아낸 멕시코 이민 1세대 신상명세서

고종황제 친위대에서 농사꾼까지, ‘일 포드’호 최초 승선자는 1089명

  • 김지현 재미 자유기고가 lia21c@hotmail.com

    입력2005-08-16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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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제물포항에서 멕시코 이민선에 오른 한국인들. 몰락해가는 조국을 뒤로하고 이역만리 낯선 땅으로 떠난 그들은 누구였고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멕시코 이민역사 연구가 이자경씨가 17년에 걸친 조사와 추적 끝에 새롭게 밝혀낸 멕시코 한인 이민사의 진실.
    100년 만에 찾아낸 멕시코 이민 1세대 신상명세서

    1905년 5월 12일 멕시코 도착 직후 유카탄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이민 1세대들.

    “1900년대초 당시에도 이민 사기단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05년 4월2일 1033명의 한국인을 태운 영국배 한 척이 인천항을 떠났다. 이 배는 1000여 명의 승객을 태웠지만 여객선이 아닌 화물선이었다. 화물선에 1000여 명의 사람이 탔으니 식사가 변변할 리 없었다. 이런 항해는 한달 보름 동안 계속됐다. 배가 도착한 곳은 멕시코의 살리나 쿠르스항. 그 배에 탔던 한국인들은 그곳이 하와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아서 멕시코로 온 것이다. 항해 중 2명의 어린이가 죽어 멕시코 땅에 도착한 1031명. 이들이 멕시코로 건너간 한국이민자들이다. 이들은 노예처럼 애니깽 농장에서 한 많은 삶을 살면서 사라져갔다. 악조건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았고, 자녀교육에 공을 들였다.”

    이 글은 지난 1977년 12월1일부터 13일까지 시리즈로 방송된 동아방송(DBS) 특집리포트 ‘아메리카 이민 80년’에 실린 내용 중 일부다. 28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멕시코 이민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만큼 새로운 조사나 연구가 없었다는 방증이다.

    올해는 멕시코 한인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미국 LA에 거주하는 이민역사 연구가 이자경(61·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위원)씨는 지금 힘겨운 저술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씨는 오는 9월 ‘멕시코 한국이민 100년사’를 출간할 계획이다. 10년간 멕시코 현지를 직접 답사하며 사료를 수집해 1998년 발간한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의 완결편인 셈이다.

    이씨는 “첫 번째 책은 문학적 요소가 많은 반면, 이번에 내는 책은 학술적 가치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이씨가 ‘멕시코 한국이민 100년사’에서 가장 공을 쏟은 분야는 100년 전 멕시코 이민선을 탄 사람의 이름을 찾는 일, 다시 말해 멕시코 한국 이민자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다.

    새로운 기록 ‘한인 초기농장 보고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과연 누가, 그리고 몇 명이 제물포항(인천항)에서 멕시코 이민선 ‘일포드’호를 탔던 것일까.

    인천부사는 인천을 떠난 이민자를 1033명으로 기록했지만, 이민자를 모집했던 대륙식민합자회사의 자료에는 1035명과 1046명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1046명은 대륙식민회사측이 항해 중 사망한 2명과 멕시코에 도착한 후 살리나 크루스 병원 등에서 사망한 9명 등 11명을 1035명에 합한 수로 보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또 일본 외무성 통상국 자료 가운데는 1033명에 단독자(독신) 196명을 합한 1299명을 이민선 탑승자로 보는 기록도 있다.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인천부사에 기록된 1033명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최근 이자경씨가 이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자료를 찾아냈다. 일본 외무성 통상국이 멕시코 한인노동자 관련 모든 자료의 근거로 삼고 있는 1차 자료 ‘한인 초기농장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05년 5월15일 이후 라파엘 페온, 올레가리오 몰리나 등 11개 대농장주에게 분배된 한인 수는 1085명이다. 이 자료를 기초로 항해 중 사망한 2명과 살리나 크루스 병원에서 사망한 2명을 합하면 최초 인천을 떠난 이민자는 모두 1089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인천부사의 기록보다 56명이 많은 숫자다. 멕시코 이민선의 통역을 맡았던 권병숙은 고국으로 보낸 편지에 사망자가 5명(항해 중 2명, 살리나 크루스 병원에서 3명)이라고 적었고, 대륙식민회사측은 총 11명으로 집계하고 있어 1089명도 정확한 수치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그간의 사료를 비교해보면 가장 근사치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한인 초기농장 보고서’를 기초로 일본 외무성 통상국이 1911년 1월에 편찬한 ‘제2회 이민조사보고(第二回 移民調査報告-北美合衆國 墨西可國 基二)’ 문건에는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이 최초 분산 배치된 32개 농장 및 농장주 명단과 한인 분배수를 표시한 도표가 포함돼 있다. 이 같은 자료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참조). 지금까지는 한인이 배치된 농장이 22~24개로 알려져 왔다.

    이자경씨는 이에 대해 “유카탄의 대농장주 11명이 자신들이 소유한 농장뿐만 아니라 친인척 소유 농장에 재분산시켰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기록상으로는 32개 농장으로 재분산된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1908년 12월 한인이 수용된 농장은 42개로 늘어났다. 자료에는 한인들이 ‘다른 농장에서 도망쳐왔거나, 옮겨왔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씨는 “농장간 매매행위로 인해 한인들이 옮겨가면서 수용돼 농장 수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동안 학계의 조사 결과, 대한제국의 몰락을 피해 달아난 소수의 전직 관리에서부터 광무(光武)군인, 양반, 소작인, 잡역부, 떠돌이, 무당(또는 곡비(哭婢)), 신부 그리고 내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대륙식민회사가 강제로 납치한 걸인, 부랑아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과 고향, 출신성분 등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100년 만에 찾아낸 멕시코 이민 1세대 신상명세서

    교민들이 세운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탑.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한인 이민자들은 당시(1903~1905) 미 이민국에서 입국수속을 담당했기 때문에 명단이 보존돼 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1908년부터 새 이민법에 의해 항구나 철도역을 통해 입국하는 외국인의 신상명부를 의무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기에 그보다 3년 전인 1905년에 살리나스 쿠르스항에 도착한 한인들의 신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씨는 끈질긴 추적 작업 끝에 이처럼 역사 뒤편에 버려진 멕시코 이민자의 신상을 거의 대부분(1025명)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가운데 70%는 사망시기까지 확인됐다. 이씨는 “멕시코 이민자들 중에서 1025명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번 다시 이런 작업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간의 고초를 토로했다.

    이씨는 10여 년 전부터 멕시코 현지에서 수집한 각종 1차 자료를 위주로 명단 작성 작업을 시작했다. 미주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인 ‘신한민보’ ‘공립신보’를 비롯해 대한인국민회의 문서자료와 조선 말기 국내에서 발행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명단을 수집했다.

    이름 하나를 발견하면 그 인물의 행적을 찾기 위해 USC(서던캘리포니아 대학) 한국전통도서관에서 수십년치에 달하는 신문 마이크로필름을 돌려야 했다. 그러기를 수개월째, 피를 말리는 작업에 이씨는 몸살과 눈병까지 앓았다.

    이씨는 지난해 말 도산학회에서 발행한 ‘미주지역한국민족운동사자료집’ 중 묵서가국(墨西可國, 멕시코를 의미) 유가단도 미리다 지방회원명록(地方會會員名錄)(1909~1911) 및 재묵동포인구등록(在墨同胞人口登錄 1919), 묵국오악기지방회(墨國五岳基那地方會 1912) 창립회원 명단록 등 일본 사료, 멕시코 정부가 1920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와 주고받은 서류 등에서도 이민자들의 이름과 활동상황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자료를 기초로 가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이민자들은 고종황제의 친위대 소속 간부부터 평범한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출신이 매우 다양했음을 밝혀냈다. 이씨는 그 과정에서 독특한 내력을 지닌 한인 이민가족과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종황제 친위대의 기구한 삶

    멕시코 이민 1세대 가운데 미국으로 근거지를 옮겨 6세대까지 뿌리내린 김윤원씨의 후손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필자는 이씨를 통해 김씨의 후손들을 알게 됐고, 그들을 통해 한 많은 멕시코 한인이민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봤다.

    김윤원씨는 1905년 당시 고종황제 친위대 고위직 인물이었다. 멕시코로 이민 온 후에도 초기 정착지인 유카탄주에서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많은 공헌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6월14일 필자는 LA에서 살고 있는 김씨의 셋째딸 김미선(91·미국명 줄리아 이데)씨를 만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는 어머니와 형제들끼리 한국어를 사용했다”며 인터뷰 중 가끔씩 한국어를 섞어 말했다.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을 보여주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지난 90년의 삶은 한 편의 역사 대하 드라마를 연상케 했다.

    1905년 4월 인천항. 영국 선박 ‘일포드’가 출항하기 직전, 일본 경찰들이 배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의 황실군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강력히 반발한 친위대 고위인사 김윤원씨를 체포하려 했다. 김씨는 부인 송애연(24)씨와 다섯 살난 딸 은선, 세살배기 아들과 함께 멕시코 이민선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당시 김씨는 31세. 다행히 김씨는 함께 승선한 한인의 도움으로 일본 경찰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황해도 양반 출신인 김씨와 서울의 좋은 가문 출신의 부인 송씨였지만, 부부 앞에 펼쳐진 멕시코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다. 김씨 부부는 에네켄(henequen

    ·일명 ‘애니깽’) 농장일은 물론 빨래, 다리미질 등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에네켄 농장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김씨는 1909년 5월9일 유카탄 메리다에 국민회 지방회를 창립해 총무로 활동한 데 이어 5월12일 멕시코 이민사회 최초의 한인교회 ‘한인감리교 미션’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 직전인 1908년 광무군 출신인 이근영씨 등과 함께 숭무학교를 조직한 터였다.

    김씨는 국민회 지방회관 옆에 여관을 개업해 오가는 동포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동포사회에서 분쟁이 있을 때면 언제나 중재에 나섰다. 동포를 돕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100년 만에 찾아낸 멕시코 이민 1세대 신상명세서

    1멕시코 초기 이민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한 김윤원씨. 그는 고종황제 친위대 고위 인사였다. 2 김윤원씨의 맏딸 은선씨의 27세 때 모습. 3 셋째딸 미선(91)씨가 남편 이데씨와 포즈를 취했다.

    그러던 1910년경, 김씨는 멕시코 북부 소노라(Sonora)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미국의 애리조나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엘 티그레(El Tigre) 석탄광산에 일자리를 잡았다. 국경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1912년 어느 날 김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인 전도사와 동행한 박모씨를 만나게 된다.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던 그는 맏딸 은선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이들에게 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LA에 도착한 뒤 6개월 동안 은선은 고아원에서 생활해야 했다. 은선은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온 박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은선은 박씨에게서 나쁜 인상을 받았다. 더욱이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은선은 점점 두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박씨는 고아원에서 은선을 데리고 나와 강제로 결혼해버렸다. 당시 은선은 12세였다. 1년 뒤 박씨와의 사이에서 첫딸 그레이스가 태어났다. 은선의 딸은 은선의 여동생보다 겨우 6개월 먼저 태어났다. 은선은 곧바로 또 임신한다.

    한편 멕시코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씨는 크게 상심하고, 자신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됐다고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919년 이른 봄, 소노라 마을 중국인들의 구정잔치에 다녀온 김씨는 급성맹장염으로 급서하고 만다. 부인과 어린 자녀 7명이 남겨졌다.

    남은 가족은 부인과 맏아들 미도(당시 10세, 라파엘), 둘째딸 화선(마누엘라), 셋째딸 미선(당시 5세, 줄리아), 둘째아들 완도(파블로), 셋째아들 영도(프란시스코), 갓 태어난 막내 문도(페드로), 그리고 미국에 있던 맏딸 은선(미국명 매리)이다.

    미선씨는 “그 무렵 한밤중에 가끔 어머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소노라 마을에는 제대로 된 의사가 없어 아버지가 숨지기 전 열흘 동안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만약 그때 아버지를 의사에게만 보였더라면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다.

    멕시코→미국→멕시코→미국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은선씨는 멕시코에 남겨진 어머니와 동생들 걱정이 앞섰다. 그는 가정부로 일하는 집 주인에게서 200달러를 빌렸다. 그러고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그 돈으로 가족들을 미국으로 밀입국시켰다. 그후 은선씨는 평소 총을 들이대며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폭력적인 남편 박씨와 이혼하고,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캘리포니아 다뉴바 농장에서 일하던 한 남자와 재혼하면서 이들 가족의 근거지도 캘리포니아 다뉴바 농장 인근으로 옮겨갔다. 계부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은선씨와 동생들은 공부 대신 돈을 벌기 위해 농장으로 내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은선씨의 전남편 박씨가 앙심을 품고 미 이민국에 은선씨 가족을 불법입국자로 신고한 것. 은선씨는 체포를 모면했으나 어머니와 동생들은 모두 체포돼 1922년 멕시코로 추방됐다. 미 이민국은 이들 가족을 멕시칼리라는 국경도시에 내려놓았다. 이민국에 신고한 박씨도 그들을 밀입국시킨 혐의로 체포돼 징역을 살았다.

    멕시코 땅에 버려진 은선씨 가족은 앞길이 막막했다. 집은커녕 당장 끼니조차 해결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한 멕시코인의 도움으로 중국식당에서 일하며 먹고 잘 수 있었다. 닭장 같은 움막에서생활했지만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 영주권자인 은선씨의 계부가 가족초청 수속을 밟아 이들은 추방당한 이듬해인 1923년에 다시 미국땅에 정식 입국한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이들은 오렌지 카운티의 토마토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은선씨는 자신이 농장에 나가 일하는 대신 동생들은 학교에 다니게 했다. 이 문제로 계부와 자주 충돌했다. 하지만 은선씨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은선씨의 동생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계부의 등쌀에 못 이겨 집을 나오고 말았다. 화선씨와 미선씨는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농장에서 일을 해 세 남동생의 학비를 댔다. 남동생들이 모두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남동생들은 모두 군대에 갔고, 전쟁이 끝난 후 군인연금으로 대학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희망을 버린다면 그것으로 끝”

    은선씨는 네 번 결혼했으며, 그 사이에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매우 길다. 매리 김-박-서-오(MaryKim-Park-Suh-Oh)다. 성 다음에 남편 성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첫 번째, 두 번째 남편과는 이혼했고, 나머지 두 남편과는 사별했다. 그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준 사람은 네 번째 남편 오관선(사무엘 오)씨였다.

    한편 미선씨가 필자에게 보여준 족보를 보면 김씨의 2대 후손들은 모두 한인을 배우자로 삼았고, 3대에 와서 처음으로 타인종과 결혼했다. 은선씨의 막내 딸 아네트가 그 주인공. 그녀는 고교시절 라틴계인 루디 캄포스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성당에서 했는데 신부 가족으로는 어머니 은선씨만 참석했을 정도로 타인종과 결혼하는 데 가족들은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 은선씨는 멕시코인 사위 집에서 막내딸과 함께 35년을 살았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은선씨의 남자 형제 다섯 명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그의 네 아들도 전장에 나갔다. 둘째아들 해리 서는 진주만 폭격이 있기 직전 17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해 무공훈장을 여럿 받았다. 그리고 유명한 육군 레인저 부대에 차출돼 북아프리카 전선과 시실리, 이탈리아 전투에 참가했다. 그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리 서의 아들인 팀 서 역시 베트남전에서 육군 레인저 부대원으로 복무한 것. 그 또한 적에 포위된 아군을 구조하기 위한 헬기 구출작전에 참가해 전과를 올리고 동성훈장을 받았다. 팀 서는 제대 후 석사 과정을 마친 후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4년 LA 경찰국에 투신해 최초의 아시안 특별수사반 한국담당관이 됐다. 그후 마약단속반 등에서 활약하다 2000년에 25년간의 경찰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그의 동생 더글러스 서(Douglas Shur) 역시 형을 따라 LA 경찰에 투신했다.

    은선씨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늘 나쁜 생각을 품지 않고 좋은 기억만 하려고 노력했다. 은선씨는 가끔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너희들이 희망을 버린다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건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오래 전 아버지가 자신을 미국 땅으로 보내면서 한 말이 그녀에게는 가훈이었다. 은선씨는 1996년 12월에 사망해 캘리포니아주 델라노의 노스컨 묘지에 네 번째 남편과 나란히 안장됐다. 멕시코 땅에서 사라질 뻔한 안동 김씨 김윤원씨의 명맥은 이렇게 미국 땅에서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한편 이자경씨는 멕시코 이민 1세대 명단을 정리하면서 이름은 같은데 자료에 따라 나이가 다르게 나와 있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또 이민자들이 한국에서 쓰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조사를 어렵게 했다.

    조사 과정에서 이씨가 확인한 개명자는 39명으로 모두 남성이다. 어떤 이민자는 두 번이나 개명한 경우도 발견됐다. 예를 들어 ‘이이봉쭭이병세(李柄世) 쭭이윤상(李允相)’ ‘이사봉쭭이병헌(李柄憲)쭭이인상(李仁相)’ 등이 그런 경우다.

    16~40세 남자가 주역

    이름이 확인된 1025명을 성별로 보면 남성이 870명, 여성이 155명으로 조사됐다. 이 숫자는 멕시코 이민단의 통역을 담당했던 권병숙이 밝힌 통계수치인 남성 874명(성인 687명, 아동 187명), 여성 159명(성인 127명, 아동 32명)과 비슷하다.



    나이별로 보면 연령이 확인된 862명 중에 21~25세가 253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체 승선인원의 약 30%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 다음으로 31~40세 173명(20%), 16~20세 126명(15%), 26~30세 122명(14%) 순으로 나타났다. 노동 적정 연령인 16세부터 40세까지의 이민자가 78%에 이른다( 참조).

    이민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62세의 허성재씨로, 그는 1917년 메리다에서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씨의 ‘멕시코 이민 100년사’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국인, 일본인 등 타인종의 멕시코 이민 배경도 다루고 있다. 이씨는 “한국 이민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면 타인종의 이민 역사도 함께 다뤄 동시대를 걸어가는 역사로 시각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100년 만에 찾아낸 멕시코 이민 1세대 신상명세서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블랙레이크 골프리조트에서 열린 가족 단합대회에 200여 명의 김윤원씨 후손들이 모였다.

    이씨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인의 멕시코 이민 역사는 우리와 판이했다. 일본 이민은 양국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1888년 멕시코와 평등한 조건으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1888)한 다음 이민을 실시했다. 일본 최초의 평등조약이다. 멕시코 역시 일본을 우대했다.

    일본은 멕시코에 이민을 보내기에 앞서 1893년에 현지에 조사관을 파견했으며 또한 문화·친선행사 등을 벌였다. 일본의 이미지 선양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4년 후 1897년에 현지 농장의 토질검사를 거쳐 농지를 구입한 다음 비로소 1897년 3월, 농업 이민자 34명을 처음으로 보냈다.

    이들 이민자를 태운 상선 ‘갤릭’호가 요코하마를 출항, 47일 만에 멕시코 남단에 도착했다. 일본 이민자를 태운 이 배는 5년 후 제물포(인천항)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을 실어나르게 된다.

    일본 이민자들은 멕시코 치아파스주의 ‘소코누스코의 에노모토’ 농업이민 단지를 개척했으나 3년 만에 실패했다. 그러나 1900년부터는 양국 정부의 허가를 받은 이민회사들과 계약을 맺은 노동 이민자들이 철도, 광산, 사탕수수 농장 등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이민자들은 한인들이 일하는 에네켄 농장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자국 이민자들의 에네켄 농장 노동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에네켄 농장의 착취 실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 멕시코의 일본인 이민자들은 본국 정부와 멕시코 주재 일본공관뿐만 아니라 멕시코 정부로부터도 여러 면에서 보호를 받았다.

    국제 사기극에 농락당한 고종황제

    이와는 반대로 멕시코의 한국인 이민자들은 영국계 멕시코 국적의 존 마이어스라는 국제 브로커가 일본인과 짜고 벌인 국제 사기극에 농락당했다. 마이어스는 당시 일본에 본부를 둔 대륙식민회사의 한국지부를 통해 1904년부터 멕시코 계약 노동자를 본격적으로 모집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간행하는 ‘황성신문’과 ‘대한일보’에 10여 차례 모집광고를 냈는데 한마디로 허위 과대 광고였다. 다음은 1904년 12월17일에 실린 광고 내용이다.

    ‘북미 멕시코국은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워 근년에 일(日)·청(淸)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한국과 멕시코는 통상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나 최혜국으로 대우할 것이다.’

    그리고 이 광고에는 9개 조항의 계약조건도 실려 있었다.

    ‘가족이민의 경우 7세 이상 자녀에게 무료 교육, 부녀자에게는 닭과 돼지를 치게 하고 하루 노동 시간은 9시간이며, 노임은 하루에 멕시코 은화로 최저 1원30전부터 3원이고… 계약이 끝나면 보너스로 은화 100원을 지급한다.’

    이러한 광고 내용과 계약조건이 하나부터 끝까지 거짓임을 안 것은 이민자들이 현지에 도착한 첫날부터였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이민자들은 하루에 69센트를 받았는데 에네켄 농장에서는 불과 25센트밖에 받지 못했다.

    나중에 멕시코 이민의 참상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 고종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동포들을 구하라”고 했지만, 일본은 방해공작을 펼쳤고, 멕시코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민자들이 떠난 그해(1905) 11월17일 한국은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령이 되면서 이들은 ‘국제미아’ 신세가 됐으며, 다시 5년 후 한일강제합방으로 나라 없는 ‘망국의 백성’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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