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성, 오해와 편견의 역사’ 피터 우드 지음/김진석 옮김/ 해바라기/496쪽/2만2000원
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고와 자원 및 분야가 상생하고 교류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즉 학제적 결합이 필요한 단계로 진입했다고 보는 게 옳다. 20세기 중반부터 급격히 대두한 ‘복잡성 과학’과 ‘다양성 연구’의 사례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또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전자 네트워크를 보면서 우리는 이미 전통적 시공간을 뛰어넘어 광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젠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확실히 바뀌었다. 공급자 중심의 획일화에서 소비자 중심의 다양화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산업사회에서 양성평등의 사회 활동이 정책적으로 추진되고, 대도시 중심의 인프라 집중에서 벗어나 국가 균형발전이 이야기되며, 교육현장에서도 성적표가 사라지고 다양한 개인의 개성을 적성대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근간에 ‘다양성은 아름다운 것’ 혹은 ‘다양성은 자연의 본질’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이런 패러다임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현상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국가 중 가장 민주화되고 다양성이 인정된다고 여겨지는 미국이 이제는 가장 보수적이고 지구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키는 폭압적인 ‘제국’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시점에 미국의 지성인으로 보스턴대 인류학 교수인 피터 우드가 다양성의 사회적 인식 과정을 집요하게 분석하고 비판한 저서를 읽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다양성
피터 우드는 다양성을 예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정한 시각으로 무분별한 ‘다양성 예찬론자’를 강력히 비판한다. 제레미 리프킨 식으로 하면 ‘다양성의 종말’이라는 표제를 붙였을지도 모를 정도다. 따라서 다양성에 대해 폭넓은 식견으로 꼼꼼히 따져 나가는 이 책을 대충 읽으면 오독(誤讀)할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일부만 발췌해서 인용할 경우 다양성 지지자와 비판자에게 모두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피터 우드의 주요 분석 대상은 자연의 다양성이 아닌 사회적 다양성이다. 목표를 다시 한 번 좁히면 현실의 다양성이 아닌, 다양성이라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피터 우드는 미국인들이 마치 사실인 양 이야기하는 사회적 다양성은 대부분 실제 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다양성은 미국식 상업자본주의가 활용하는 프로파간다인 광고에나 존재하며, 다양성 자체가 사람들의 상식적 정서에 부응하기 위한 ‘브랜드’이자 소비되는 ‘상품’ 자체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한다. 다양성은 학생들에게 학습되고, 정치적으로 옹호되며, 학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대중에겐 강요되며, 기업에 이용되어, 궁극적으로 소비되는 무엇이다.
이런 다양성은 자연적 상태로서의 다양성, 즉 본질적 다양성이 아니라 다양성의 ‘담론’일 뿐이고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저자는 결코 다양성 자체를 부인하거나 “다양성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성이라는 자연의 본질을 인위적으로 재단하고 이용하는 ‘다양성 예찬’을 일축한다.
저자는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라는 작품을 인용한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에 의해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의 원전 시나리오로도 쓰인 이 작품은 “인간은 자연의 다양성과 조우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진정한 다양성은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경이롭고 막강한 자연의 야성적 힘이라는 것. 이는 불확정적이고 불확실성을 내포한 급격하고 거대한 변화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