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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②

민족지도자들의 분열, 좌우 대연정의 꿈은 무너지고…

  • 이철순 부산대 교수·정치학 cslee@pusan.ac.kr

민족지도자들의 분열, 좌우 대연정의 꿈은 무너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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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동의 해방정국. 38선을 그은 것은 미국이지만 분단을 재촉한 것은 국내 정치세력의 분열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자존심 대결과 주도권 다툼. 그들이 민족의 이익보다 정파 이념을 앞세우면서 분단 극복의 길은 멀어져만 갔다. 과연 광복 직후 좌우 대연정은 불가능한 것이었나.
민족지도자들의 분열, 좌우 대연정의 꿈은 무너지고…

8·15광복 직후 연합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역에 몰려든 환영인파. (동아일보)

올해는광복 60주년이자 분단정권이 수립된 지 57년째 되는 해다.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남북분단을 애석해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민족은 분단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혹자는 만약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분단의 외인론(外因論)이다. 만약 외세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좌우익간의 심각한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최악의 경우 내전을 거쳤을지라도 분단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분단의 외인론은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강대국이 약소국 정치에 개입했다고 해서 모두 분단된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강대국 점령하에서 내부의 분열을 억제하고 대연정을 구축함으로써 슬기롭게 분단을 방지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반도에는 분단의 내적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른바 분단의 내인론(內因論)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는 한반도 분단의 성격은 국제적 요인에 의한 분단(독일형, 이른바 국제형)의 성격과 민족 내적 원인에 의한 분단(중국형, 이른바 내쟁형)의 성격이 뒤섞인 복합형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외세가 개입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분단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고 내부의 역량으로 분단을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100년 전에 이렇게 단언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과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다(Those who can not remember the past condemned to repeat it)”. 외세의 규정력이 약화된 탈냉전 시대를 맞아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우리 민족은 분단의 씨앗이 뿌려진 광복 직후의 역사를 반추함으로써 분단 지속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45년 8월15일부터 9월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는 시점을 전후로 국내 정치세력이 좌우 대립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치안유지권 이양받은 여운형

1945년 8월10일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는 연합군이 진주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실시할 것이며 연합군 중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으로 알았다. 종전 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안정적인 귀환대책을 수립해야 했던 총독부는 8월10∼15일에 당시 일반 민중에게 영향력이 있는 인사라고 판단한 여운형·송진우, 안재홍과 독자적으로 치안유지교섭을 벌였다. 송진우는 일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으면 조선민중에게 괴뢰로 비칠 것을 우려해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해 여운형은 실무자의 의사 타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8월15일 새벽 총감관저에서 당시 총독부 실권자인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만난다.

일제는 단순히 치안유지권을 이양하기 위해 협상하려 했지만 여운형은 이를 건국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인식해 실질적인 ‘정권이양’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정치범 석방, 3개월치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구속과 간섭 금지,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불간섭, 노동자의 건설사업 참여에 대한 불간섭 등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이를 수락했다. 회담이 끝나자 여운형은 곧바로 건국준비회(이하 건준)를 구성해 공공안정, 정치범 석방, 식량배급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날 오후에는 건준 입회하에 정치범들이 석방됐다. 다음날인 16일 오후 3시, 안재홍은 건준 명의로 대국민 방송을 했다. 방송 내용은 자위대 신설, 정규군 편성, 총독정치 종료 등 건준이 하나의 정부라는 인식을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고, 안재홍은 이를 세 번이나 방송했다. 16일의 대국민 방송은 일반 민중에게 건준이 좌우를 망라하는 정치조직체로서 합법성을 갖는 정부기구라는 인상을 주어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 이상의 건준 지부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건준은 광복 후 급조된 정치조직이 아니었다. 광복 직전까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여운형의 건국동맹, 안재홍의 신간회 계열, 장안파 공산당으로 불리던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전선이 광복 후 공개적으로 건준 조직으로 표출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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