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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③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 정경환 동의대 교수·윤리문화학 cw3581@hanmail.net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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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던 민족지도자 3인. 김구(왼쪽)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었고, 김규식(가운데)은 좌우연합론을 주창했다. 반면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미 군정, 백범 귀국 소식 통제

백범이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을 접하고 “아! 왜적의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입국하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를 종용했다. 백범이 해방 소식을 듣고 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 대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비통해한 것은 해방된 조국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선견(先見)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민족의 설움을 그는 귀국과정에서 몸소 겪어야만 했다.

중국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진두지휘하던 백범은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에 따른 깊은 충격에서 벗어나 9월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해방정국에 임하는 자신과 임정의 시각을 밝혔다. 여기서 백범은 14개항의 당면정책을 천명하면서 임정이 주축이 돼 “국내외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선교단체,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6항)을 언급했다. 또한 1항에는 “임시정부는 최속 기간 내에 입국할 것”임을 밝혔다. 김구의 이런 언급은 비록 미 군정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지만 임시정부가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의 9월3일 성명은 남한의 실제적 권력인 미 군정을 자극했다. 미 군정은 김구가 임정의 주석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한다는 사실을 임정측에 강경한 어조로 전달했다. 임정을 하나의 정파나 정당으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정부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미 군정의 완고한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또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 인물인 김구의 자주독립 움직임에 미리 쐐기를 박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래서 백범은 중국 정부가 마련한 열광적인 송별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11월23일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이 보낸 군용비행기를 타고 쓸쓸히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만 했다.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 15명은 오후 1시 군용비행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오후 4시5분경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백범은 1919년 3월 조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환국한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이 백범의 환국 소식을 통제한 탓에 김포공항에는 환영인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밖을 볼 수 없는 밀폐된 장갑차를 타고 숙소인 경교장에 도착했다. 백범이 경교장에 도착한 지 한 시간 후인 6시경 미 군정은 “오늘 오후 4시 백범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민족의 비극이었다. 백범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금방 퍼져나갔고 경교장 일대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로 가득 찼다.

우사 김규식은 한국 근현대사에 어느 누구도 견주기 힘들 정도로 큰 위업을 남겼다. 그럼에도 우사에 대한 연구는 다른 이에 비해 미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만포진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냉철한 지성을 갖춘 우사는 광복 이후 자신의 삶을 좌우 통합을 위해 바쳤다. 그러나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좌절과 고난이었다. 결국 그는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북돼 모진 시간을 보내다가 조국통일의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조국” “통일”을 외치면서 이승을 떠났다. 비록 좌와 우가 손을 잡는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통일사상은 민족사에 뚜렷이 남아 있다.

“좌우 이념은 민족이라는 틀에 용해돼야”

그에게서 이념은 민족의 가치에 비하면 하위 개념이었다. 그는 1897년 17세에 미국에 유학해 로녹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영문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에 눈뜬 사람이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고 기독교청년회 총무직 등을 맡아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교육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됐으나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는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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