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TA는 결국 정치적 산물 아닌가. 대통령이나 총리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건 동남아 브루나이의 골프장에서건 협정에 서명하고 사진 찍는 것을 즐기겠지만, 그러는 사이 FTA로 상대적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나라들의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2003년 5월. ‘자유무역협정과 미국의 무역정책’을 주제로 한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 토론회에서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FTA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의 변심엔 이유가 있다
레나토 루지에로 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 무역담당 편집자인 가이 드 존키에로 등이 패널로 참여한 이 토론회에서는 1995년 WTO가 출범할 때까지 모두 69건의 FTA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통보됐지만 그중 정작 GATT의 승인을 받은 것은 6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런 주장을 펼친 사람은 IIE의 자문위원장 리처드 쿠퍼 교수였다. 쿠퍼 교수에 따르면 현존하는 대부분의 양자간 FTA가 GATT로 상징되는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미숙아 신세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의 근거를 알아보려면 GATT의 출범 배경에 대해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WTO 출범 당시까지 세계 무역질서의 ‘헌장’으로 여겨진 GATT는 조약 체결국에 대한 ‘무차별 원칙’을 제1의 운영원리로 삼는다. GATT 협정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결국에 특별대우나 차별대우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FTA와 같은 이른바 특혜무역협정은 조약 체결 상대국에 대해서는 관세 감면과 같은 혜택을 주지만 그렇지 못한 제3의 무역 파트너들에게는 오히려 시장 접근을 어렵게 하는 장벽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다시는 국가간 무한경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자간 무역체제라는 안전장치를 만들자며 국가간 공조를 중요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국제교역의 현실을 살펴보면 이런 정신은 사라지고 FTA와 같은 특혜무역협정과 지역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결국 이는 국제 경제 질서에서 다자간 합의를 통한 명분보다는 양국간 경제적 이해와 같은 현실적 요인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