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단은 ‘수기(手記)통장’에서 비롯됐다. 손으로 썼다는 의미의 수기통장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이 명성그룹을 해체하는 데 이용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있지도 않은” 통장이다. 명성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면 으레 ‘수기통장’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실수였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김 회장의 불쾌감은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그는 “지금 와서 진실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냐”며 역정을 냈다. 그는 기자에게 그때껏 녹음한 인터뷰 내용을 모두 지워달라고 요구했다. 워낙 완강한 태도여서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명성 사건의 진실
20년 전 사라진 명성그룹의 총수를 만나려고 한 계기는 지난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도국제도시를 취재하러 갔다가 김철호 회장 얘기를 들었다. 송도에 거대한 운하 공사가 시작되는데, 김 회장이 안상수 인천시장에게 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는 것. 그의 ‘운하 건설론’이 재미있었다.
“과거 한국은 육지에서 바다(세계)로 나가야 했지만, 미래에는 세계인이 바다에서 육지(한국)로 들어온다. 그 시대를 준비하려면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운하가 필요하다.”
이 한마디에 안 시장은 그날로 운하 공사를 지시했다.
그뒤 김 회장에 대해 취재해보니 세상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전남도청, 강원도 동해시 등의 지방자치단체는 지역개발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를 강사로 초빙했고, 충북 보은군수는 그를 헬기에 태워 120만평에 달하는 토지를 보여주며 개발계획을 의뢰했다. 기업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설교통부와 청와대 실무자들도 그를 만나 의견을 경청했다. 유승권 도시마케팅 사장이 운영하는 ‘도시마케팅포럼’은 그를 회장으로 추대, 그가 지금껏 닦아온 국토 개발 노하우를 활용할 방안을 찾고 있다. 마치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처럼 바빠졌기에 김 회장은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어떤 얘기를 하고 다니기에 아직도 그의 입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많은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1년여를 끌면서 겨우 마주한 자리는 그렇게 엉망이 됐고,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여 후. ‘신동아’ 4월호 마감을 나흘 앞둔 3월11일 오전 8시, 김 회장은 뜻밖에도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다시 약속시간을 잡아줬다. 이틀 뒤인 3월13일 우리는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끝내지 못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인터뷰의 초점은 그가 그리고 있는 미래 한국의 레저산업에 맞춰졌지만, 명성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자리마저 망칠 수 없어 기자는 아무 말 없이 4쪽짜리 기사를 그에게 건넸다. 정치 분야의 인터넷 논객으로 잘 알려진 독고탁씨가 정리한 명성 사건의 진실에 관한 글이었다. 지난해 ‘5공화국’이란 TV 드라마에 명성 사건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실체를 파악하는 데 미흡하다고 생각한 독고탁씨가 취재해 쓴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글을 읽은 뒤 김 회장은 “이것이 명성 사건의 실체이자 진실”이라고 확인했다. 다음은 필자의 동의를 얻어 간추린 주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