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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⑩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신여성 선두주자’는 왜 남편과 자식을 버렸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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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 신식살림이라고 누가 와서 보더라도, 피아노나 하나 놓고 라디오나 놓고 커피 한 잔이라도 내놓아야지. 그 정도도 못하면 뭐가 신식이란 말이오!”

“그러게 말이야.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산다면 모르지만 10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니고 나서 신식결혼이라고 해 가지고 누가 시어미 버선 짝이나 꿰매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고 있단 말이오!” (‘신여성과 결혼하면’, ‘별건곤’ 1927년 12월호)

남성중심주의에 젖은 남성이 신여성을 악의적으로 매도한 글을 가지고 신여성 전체의 결혼관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혼여성의 사회활동이 금기시되던 1920~30년대 신여성에게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무 생각 없이 겉멋으로 여학교에 다니던 여성뿐 아니라 사회지도자급 여성도 곧잘 돈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며 살자는 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잣집에 시집가 행복하게 잘살았다면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박인덕의 화려한 귀국



1931년 10월, 온 나라의 이목은 6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인덕에게 쏠렸다. 박인덕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부터 ‘노래 잘하는 박인덕’ ‘연설 잘하는 박인덕’ ‘인물 잘난 박인덕’이란 평판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3·1운동 때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의 기하, 체육, 음악담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 열사가 그의 제자다.

재색을 겸비해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박인덕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배재학당 출신 청년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 김운호는 박인덕을 아내로 맞기 위해 동대문 밖 홍수동(지금의 창신동)에 저택을 짓고, 다이아몬드 반지와 만원짜리 피아노까지 선사했다. 당시 만원이면 고급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청년부호와 결혼했다고 민족과 여성을 향한 박인덕의 열정이 식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을 향한 열정은 결혼 후 더 커졌다. 박인덕은 맏딸 혜란을 출산한 직후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 교사로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박인덕은 얼굴만 잘났는가? 아니 그보다 더 칭찬할 만한 것은 그의 재주고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그의 건강이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가 하면,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의 영어와 음악 선생으로 가정교사로 하루 평균 5시간 이상을 가르치면서 두 아이를 젖을 먹여 기른다. 해산하기 전 하루나 이틀, 해산한 후 2~3주 동안 학교를 쉬는 이외에 하루도 학교를 쉬는 일이 없다. 그렇게 건강에 무슨 비결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비결요? 아무 비결도 없습니다. 시간 맞추어서 하루 세 번 밥 먹고 시간 맞춰 하루 8시간 이상은 꼭 자고 힘써 일하고 유쾌하게 노는 동안에 자연히 건강한 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 나은 지 2주일쯤 되면 나는 벌써 학교에 갑니다. 갑갑해서 더 들어앉아 있을 수 없어요. 어린아이에게는 꼭 젖 주는 시간을 정해놓고 아침에 나갈 때 충분히 배불리 먹이고, 점심 때 돌아와 또 잘 먹인 다음에, 네 시에 돌아와 또 먹입니다. 그렇게 습관을 해오면 으레 그 시간이 되기 전에는 젖을 찾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정신이 들기 시작하여 내 얼굴을 익숙히 알게 되면 잘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침이면 으레 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아침에 떼놓고 나가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돌이 지나서 걸어 다니게 되면 으레 아침이면 엄마는 학교 갈 줄 알고 갈 때 따라 나와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합니다. 주일날이나 국경일에는 오늘은 왜 나가지 않느냐고 묻지요. 아이들이 다 건강합니다. 큰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는데요, 창가를 곧잘 해요. 창가선수로 뽑혀 다닌답니다.” (‘재주 있고 인물 잘나고 좋은 건강을 가진 박인덕 여사’, ‘동아일보’ 1926년 1월27일자)

박인덕은 청년부호와 결혼하고도 하인 한 명 부리지 않고 두 아이를 낳아 손수 키웠다. 학교 두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개인교습까지 했다. 어지간한 열정과 체력 없이는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다. 박인덕의 일 욕심, 공부 욕심은 끝이 없었다. 박인덕은 1926년 7월, 다섯 살 난 맏딸 혜란과 세 살 먹은 둘째딸 혜린을 서울에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 김운호와 요코하마 부두에서 헤어지면서 3~4년 안에 돌아오리라는 기약을 남겼다. 여성계에서 손꼽히는 재사였던 만큼 박인덕의 미국 유학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있던 박인덕(30세) 여사는 돌아오는 20일에 다년간 숙망이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아주 웨슬리언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사는 김운호씨의 부인이요 두 아기의 어머니요 칠십이 되신 홀어머니의 따님이십니다. 여사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두 따님, 늙은 어머님을 떠나 얼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밟게 된 것은 여사의 마음 가운데 “조선 여자사회를 위해 좀 더 잘 배운 일꾼이 되어보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깊은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박인덕 여사는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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