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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에게 듣는 개발연대 비화

“광부, 간호사 몸값 갚으려 머리카락 자르고 쥐도 잡았죠”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에게 듣는 개발연대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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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원장은 함께 수학하던 독일 친구의 아이디어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4만명을 파견하기로 한다. 이들의 3년치 월급을 독일에 묶어두는 조건으로 1억5000만마르크(40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았다. 사실상 이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정신적 씨앗이었어요.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서독 국민은 박수를 보냈지. 서독 국회의원들은 대(對)정부 질의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이것이 박 대통령을 초청한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2차 상업차관 2억마르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독이 한국에 선사한 것은 상업차관만이 아니었다. 돈 꿔달라고 조르는 박 대통령에게 서독의 에르하르트 수상은 만찬 자리에서 매우 귀중한,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놓을 일곱 가지 조언을 했다. 이를 통역한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더라.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독일을 보라.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한국에도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달릴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폴크스바겐은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자동차가 다니면 고용이 늘고,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고 세금이 들어온다.”



얘기를 듣는 박 대통령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수상이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다. 그러니 제철공장을 만들어라.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자동차 연료로도 필요하지만, 앞으로는 석유화학공업 시대다. 나일론 섬유, 플라스틱 공업 등 연관산업이 일어난다. 독일은 마이스터라고 하는 기능장(技能長) 제도가 있다. 한국도 기술 인력을 육성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한 나라의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주겠다(실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냈다).”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에르하르트 수상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자 박 대통령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그러나 수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애국가, 그리고 눈물바다

“독일은 프랑스와 32번을 싸웠다. 독일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일이 없다. 그러나 전쟁에선 모두 패했다. 독일인은 지금도 한이 맺혀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박 대통령은 화난 사람처럼 “우린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한국을 36년 동안 지배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 수상은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원장은 이 대목을 통역하면서 일본 정부가 서독 수상에게 이 얘기를 부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사과하면 받아줄 수는 있다. 우린 아량이 없는 국민은 아니다”라면서 굳은 얼굴을 폈다. 이것이 한일 국교정상화의 씨앗이 됐다. 이듬해 한일협정이 체결된 것. 서독 수상과 나눈 두 시간 남짓한 대화가 한국의 역사를 바꾼 셈이다.

박 대통령은 독일에 도착한 이튿날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으로 향했다. 미국도 외면한 경제원조를 서독이 약속하기까지 광부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500명의 광부는 얼굴에 석탄이 묻고 온통 흙투성이였다.

“탄가루와 때에 찌든 작업복을 입고 우리를 맞는 광부들을 보자 가슴이 턱 막혔어요. 박 대통령은 이들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지. 그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나요. 우린 이렇게 못 살지만 후손에겐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할게요’라고 연설을 했어요. 그러곤 애국가를 불렀고, 마지막엔 모두 눈물을 흘렸죠. 서독 대통령도 울었고, 박 대통령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울었어.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리무진 창문을 붙들고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통곡을 해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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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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