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할 일 다 해가면서 신명나게 놀아보세∼

  • 글·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photo7@donga.com

    입력2006-06-16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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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더니 선인들은 어찌 수백년이 지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기막힌 말들을 남겼을까. ‘노세 노세 젊어 놀아/늙어지면 못 노느니라/놀아도 너무 허망이 하면 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 소크라테스 저리 가라 하는 ‘사철가’ 한 소절에 허황된 욕심 사라지고, 해이해진 마음 다잡는다. 한번 가면 그만인 인생, 신명나게 살아야 맛인 것을.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봄은 갔다가 年年이 오건만/이 내 청춘은 한번 가고/다시 올 줄을 모르네 그려/어와 세상 벗님네들/인생이 비록 100년을 산다 해도/人壽瞬若 擊石火요/空手來空手去를/짐작허시는 이가 몇몇인고/노세 노세 젊어 놀아/늙어지면 못 노느니라/놀아도 너무 허망이 하면/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바쁠 때 일하고 한가할 때 틈타서/이렇듯 친구 벗님 모아 앉아/한잔 더 먹소 덜 먹소 하여 가며/할 일을 하여 가면서 놀아보세….

    이왕 한 김에 ‘진도아리랑’도 불러봅시다. 원래는 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북치며 불러보죠.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짬을 내 양천공원으로 나온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녹음이 짙은 공원 한가운데서 카메라를 의식 않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노래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싶은가 보다.

    “혼자 이렇게 북치고 노래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북소리가 크게 울리니 잡념이 겁나서 들어오질 못하죠. 허허.”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이동기(李東햖·49) 검사장은 지난 2월 부임했지만 지척의 양천공원에 나와 보긴 처음이다. 지난해 대검찰청 형사부장으로 재직하며 부동산 투기사범을 강도 높게 수사했던 그는 ‘21세기 전략 검찰청’으로 지정된 서울남부지검 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10년, 20년 뒤 검찰청의 모습을 미리 구현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검찰청 지하 체력단련실에 북과 장구를 갖다놓은 지 이미 오래지만 장단에 맞춰 노래할 겨를이 없었는데, 야외에서 북채를 잡고 노래까지 부르니 흥이 절로 나는 모양이다.



    이 검사장은 2004년 6월 전주지검장으로 부임하면서 북과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북 정읍 출신인 그는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뭔가 의미 있는 걸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전북도립국악원 임청현 교수로부터 국악수업을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 임 교수가 관사를 직접 방문했다.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잠깐 짬을 내 검찰청 인근 공원에 나온 이동기 검사장은 소풍 나온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래가 절로 나왔다.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이 검사장은 지난해 전북 임실지역 문화축제인 소충사선문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국악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자신의 국악 실력이 여전히 귀동냥 수준이지만 폭넓은 시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15층 아파트 7층에 살았는데, 수업이 있는 날이면 창문을 다 닫고, 바닥에 보료를 두껍게 깔고, 그 위에 목화솜을 넣은 두꺼운 방석을 2개나 얹은 다음 찢어진 북을 올려놓고 연습했어요. 그런데도 아래층에선 전쟁이 난 줄 알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죠. 명절이면 아래층 할머니께 선물 대기 바빴습니다(웃음).”

    수업은 중머리, 중중모리부터 시작해 자진모리, 휘모리로 발전했고, 어느 정도 가락을 맞출 줄 알게 되자 단가(短歌)와 아리랑도 배웠다. 판소리는 완창하려면 수궁가는 3시간, 춘향가는 8∼9시간이 걸리는 터라 이 검사장은 대신에 3∼4분짜리 단가를 배웠다. 즐겨 부르는 곡이 ‘사철가’. 그중에서도 놀 땐 놀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해야 늙어서 후회가 없다는 마지막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1년여 만에 전주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해 4월 서울로 올라온 뒤로는 주위에 피해를 줄까봐 마음껏 북을 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출퇴근 길에 자동차 안에서 임청현 교수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틀어놓고 합죽선으로 장딴지를 때리며 장단을 맞추는 게 유일한 낙. 길이 막혀도 짜증낼 일이 없어졌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MP3와 북을 반드시 챙기고, 어딜 가든 북이며 장구 같은 우리 국악기 소리가 들리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는 국악과 인연을 맺은 뒤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지난해 추석 무렵, 일면식도 없던 조상현 명창이 그에게 무형문화재 윤덕진씨가 제작한 북을 보내온 것. 조 명창은 이 검사장이 추석을 앞두고 국악을 사랑하자는 취지로 쓴 ‘전북일보’ 칼럼을 보고 감동해 선물을 했다고 한다. 조 명창은 이 검사장에 대해 “나이와 직업을 떠나 국악을 사랑하는 좋은 친구”라며 “국악을 세계무대에 내놓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그를 보면 100만 응원군을 얻은 것보다 더 든든하다”고 했다.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클래식은 고상하고 국악은 촌스럽다’는 편견을 깨고, 누구나 단가 한 곡 정도는 부를 수 있길 바란다는 이 검사장.

    서울남부지검장 이동기 북·판소리

    이 검사장이 보물처럼 아끼는 북과 장구. 조상현 명창은 지난해 그에게 북을 선사한 데 이어 최근 장구를 보내왔다.



    이 검사장의 국악사랑은 직업관(觀)과도 연결된다. ‘검사라고 해서 세상의 모든 악(惡)을 일거에 척결할 수는 없으므로 사회악을 어느 범위에서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백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검사의 역할이며 그 위에 색칠을 해나가는 것이 수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판사는 검사가 그린 그림에 대해 평가를 하지만, 검사는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창조적인 예술가죠. 특히 평검사 때는 수사만 하면 되지만 부장검사 이상이 되면 ‘지휘권’을 갖게 돼 수시로 신속·정확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때 수사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사 전반을 섭렵하고 있어야 하죠. 그래서 독서를 하고, 문화예술 공연도 관람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경험이 축적되어 신속하고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죠.”

    국악을 접한 뒤로 조급증이 사라지고 나태와는 구별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이 검사장은 ‘사철가’ 노랫말처럼 ‘삶을 즐기되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신명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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