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3월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이러한 분위기는 권위주의 해체와 민주주의 달성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낙관은 비관으로 전환되고 급기야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12·12쿠데타에 따른 강경파의 군부 장악은 권위주의체제가 지속되는 것은 물론 다시 견고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권력블록 내부에서 논의됐던 타협을 통한 민주화는 허공의 메아리가 됐고, 지배블록 자체도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민주공화당과 새로운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 그리고 재빨리 신군부 권위주의호(號)에 승선한 관료와 독점자본 등으로 분열되고 재편됐다. 바야흐로 신군부와 관료, 독점자본 연합이라는 새로운 지배블록이 형성됐다.
전국적인 재야세력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도 제도적 개혁을 강조하는 점진주의자와 대중 동원을 통한 가투(街鬪)를 주장하는 행동주의자로 분열됐다. 학생운동도 재학생 중심의 단계적 투쟁론과 복학생 중심의 전면적 투쟁론으로 분열됐다. 지배블록 내의 온건파 소멸, 민중 전선의 분열, 그리고 제도권 정치세력의 대안 창출 부재로 신군부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고 그들의 독점적 권력 장악은 민주화 이행의 물꼬를 권위주의 재강화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박정희 사후 민주화를 갈망한 세력에게 5·18민주화운동이나 ‘80년 서울의 봄’은 민중의 불가항력적인 항복을 뜻한다. 반대세력의 무기력한 대응은 신군부의 위상을 한층 제고시켰다. 이 과정에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사례에서 보듯 민중의 거센 저항과 이에 대한 강력한 제압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창출하면서, 자신들만이 유일한 정치세력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군부가 가장 선호한 전략적 선택은 ‘전면 대결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로의 공공연한 복귀’였다.
8분 만에 이뤄진 정권 탈취
1980년 초반의 민주화 시도는 준비 안 된 민주화 세력의 ‘우연적 기대’가 ‘필연적 좌절’을 겪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1987년의 민주항쟁과 전두환 주연, 노태우 조연의 6·29선언으로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런 점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는 한국정치사와 민주화의 역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 체결로 500년 역사의 조선을 삼켜버렸다. 이는 참으로 역사상 보기 드문,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침탈이었다. 을사늑약 체결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이보다 훨씬 더 짧았다. 단 8분 만에 끝난 분(分)치기 찬탈이었다.
1980년 5월17일 오전 10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 장관 주재로 육해공군의 주요 지휘관 44명이 참석한 전군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10·26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 군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고 국민을 겁주고 위압을 과시하자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주영복 장관이 정치풍토 쇄신, 불순세력 제거 등 정치적 발언을 하자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이 반론을 폈다. 이에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이 회의는 이미 정해진 안건을 놓고 의견을 듣는 자리”라고 차단하자 더 이상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회의 결과를 가지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이날 오후 최규하 대통령을 면담해 전군지휘관 회의내용을 보고하면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 해산, 국가보위부 설립을 건의했다. 최 대통령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