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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22

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 김승채 고려대 겸임교수·정치학 ksc77@korea.ac.kr

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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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하기 위한 국무회의는 이날 밤 9시42분 무장군인이 에워싸고 있는 중앙청에서 열렸다. 야전전투복에 총에 착검까지 하고 복도 양쪽에 도열한 군인들 앞을 지나 외부 전화가 차단된 중앙청 국무회의실에 도착한 국무위원 중 상당수가 이미 초주검의 상태였다. 반(反)역사적 을사늑약에 부(否)를 던진 의로운 선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서슬 퍼런 강압적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몰라도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은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계엄의 전국 확대 선포의 건’에 대해 제안 설명은커녕 찬반토론도 없이 가결했다.

이로써 부마항쟁과 10·26사태를 거치면서 활활 타오르던 민주화의 불길은 단 8분 만에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계엄치하에선 대통령 바로 밑에 계엄사령관이 위치하도록 계엄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에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통수권 전체가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에 대항하거나 군부의 강압을 이겨낼 어떠한 기제도 실질적으로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는 전두환에게 권력이 이양됨을 의미한다. 결국 전두환은 8분 만에 정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권력욕 강한 ‘투박한 군인’

전두환은 1931년 경남 합천군의 벽지인 율곡면 내천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따라 1~2년 만주에 가서 소학교 1년을 다니다가 귀국해 대구에서 독학으로 소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6학년 학적부에 기재된 그의 성격은 “침착한 성질을 가지고, 겸손·친절하고 모든 일에 열의 있음. 주의력, 기억력, 이해력이 풍부하며 책임감이 왕성함”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전두환은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곳에서 평생의 인연이 된 노태우를 만난다(노태우는 1년 후 경북중학교로 전학). 육군사관학교가 정규 4년제로 개편된 첫해인 1951년 전두환은 11기로 입학했다. 원래 그는 육군종합학교 후보생에 지원해 합격했으나 어머니가 합격통지서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종합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육사 입학이 뒷날 대통령에 오르는 데 발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전화위복이었다. 전두환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과 한국 정치사의 중대한 이정표가 육사 합격통지서로 바뀐 셈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생들은 육군의 정사(正史)가 자신들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전두환은 졸업하면서 “나는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군 실무에서는 단연코 으뜸가는 장교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육사 졸업앨범에 ‘멸사돌진(滅死突進)’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것은 군인 전두환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대위에 지나지 않은 그가 혼자 군사혁명의 본거지인 육군본부로 가서 박정희를 만나 “이 군사혁명을 지지할지 반대할지 직접 판단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한 것이나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함께 일하자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한사코 사양하고 군에 남은 점에서도 군인 전두환의 저돌적인 면모가 읽힌다.

1969년 11기 이후의 장교모임인 북극성회 회장을 맡은 그는 11기의 선두주자로 부상하면서 지도자의 꿈을 키웠다. 그의 군인정신은 월남전 파병 당시 “강한 훈련만이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한다” “용자(勇者)는 살고 겁자(怯者)는 죽는다” “전우를 아껴라”고 말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집권과정이 비슷하고 정치 통제와 경제 집중을 국정운영의 초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종종 박정희와 비교된다. 하지만 박정희는 주변 엘리트였고, 전두환은 핵심 엘리트였다. 국가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사형의 박정희와 달리 그는 운이 좋은 출세지향적 군인이었다.

전두환은 심신이 강건하고 성격이 소박·단순·정직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강인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10·26사태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김재규를 민주 의사(義士)로 추앙하고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일부 여론을 묵살하고 아비를 죽인 패륜아를 그대로 살려둘 수 없다며 처형한 것이나,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수사에 비협조적이면서 자신을 일선지역으로 쫓아내려 하자 12·12로 반격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행정학자 2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대통령 평가 설문조사(1998년 한국외국어대 안병만 교수)에 따르면, 전두환은 응답자들로부터 박정희(44.5%) 다음으로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만 통치자로서는 존경한다’는 평((21.8%)을 받았다. 이는 전통적인 인간관계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익숙한 국민정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전두환의 출세욕은 민주적 가치관이나 도덕률로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했다. 그는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체계적으로 익힐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투박한 군인이었다. 이런 면은 그가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 재임 중의 엄청난 비리로 법원으로부터 추징금 2250억원을 선고받고 여론의 질타를 받았을 때 사리사욕을 챙긴 것이 아니라며 자신감 있게 결백을 주장한 점, 그리고 수감 중 울분을 삭이지 못해 옥중단식을 하다가 석방될 때 기자회견을 하면서 웃음 지으며 당당하게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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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채 고려대 겸임교수·정치학 ksc77@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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