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엔론사의 회계부정 사건에서 최고경영자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투명성 이슈가 크게 부각됐다.
“우리가 남이가?”
이러한 변화와 발전에도 아직 한국의 재벌그룹은 여전히 눈앞에 닥친 변화의 물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재벌들이 고수하는 현재의 지배구조가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투명성 제고가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과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투명성을 높이면 어떤 혜택을 보는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된다. 분명한 사실은 기업의 투명성이 기업가치 제고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장하성 교수의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그는 한국의 상장기업 지배구조를 분석한 결과, 지배구조를 10% 개선할 경우 22%의 주가 상승을 가져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같은 혜택을 보자면 법규나 제도의 준수를 넘어 경영진은 투명성이 실제로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 재벌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일각에서는 재벌 2세가 경영권을 승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만일 재벌 2세의 역량이 출중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CEO 선임 절차로 검증됐다면 오히려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재의 왜곡된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아직 대부분의 재벌기업에선 이러한 검증 절차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에서 장남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져 있지만, 글로벌 관점에선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만일 예전의 관습을 고수한다면 재벌그룹은 물론 한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다.
투명성 이야기를 꺼내면 상당수 한국인은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투명성이란 씨앗을 한국에 심는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른바 ‘정(情)’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한국인의 미(美)이자 특성이라고 말한다.
정을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번역하고 나서도 미묘한 의미 차이가 느껴진다. 한영사전에선 ‘정’을 ‘감정’ 또는 ‘느낌’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정이 많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감정이 많다’는 뜻이 돼버린다.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다.
흰 봉투에 거액의 돈이…
나의 한국인 동료 한 사람은 정이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듯 애매한 개념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 한국인은 기업 경영 자체가 ‘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관계’라는 것이 결국 ‘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정은 한국 사회에 두 가지 관점에서 중대한 이슈를 제기한다. 첫째, 정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은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이 상호간의 관계 형성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간주한다. 예컨대 한국인은 비즈니스를 하면서 계약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문서를 주고받는 것은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쯤으로 인식한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을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안을 문서로 정리하는 것은 추후 발생할 잡음을 사전에 차단하는 길이다. 이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충 대충’ 하고 ‘알아서 하겠지’ 하는 지레짐작은 나중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단순히 실망하는 것뿐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대가 변했다. 사업은 더욱 복잡해지고, 상호작용이 빈번해졌다. 과거의 파트너와 함께 일하면서 학연이나 지연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면 지금은 전혀 끈이 닿지 않는 사람과도 신뢰를 쌓고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
사업상 맺은 인맥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도덕성도 있어야 한다. 사업 파트너와 사적인 친분은 가지더라도 일할 때는 정직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구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