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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불민한 후학이 장영희 교수님을 보내며

  • 이남희│동아일보 역량강화팀 기자 irun@donga.com│

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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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네가 쓴 기사 정말 껄끄럽다”

‘여성동아’에 글을 쓰던 2006년 봄, 교수님을 인터뷰한 기사의 초고를 보여드렸다가 당신을 “비극의 여왕으로 그렸다”며 무섭게 혼이 났다. ‘신체장애, 암과 싸우는 극복의 상징’으로만 그려지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쓴 기사, 이런 방향이라면 정말 껄끄럽다. 장애나 암 투병 이미지가 많아서 서강대 교수나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가려지잖아. 작년 인터뷰에 비해 차별화되는 내용도 없고, 새롭게 내는 책 얘기는 적게 들어가 있네. 난 내가 극복의 상징으로 그려지는 걸 원하지 않아. 나처럼 행운을 많이 가진 사람은 없는데 말이야.”

‘동아일보’에 들어와서 “기사 작성은 기자 고유의 권한이다” “취재원을 장악하라”고 배웠지만, 그 모든 원칙이 교수님 앞에서만큼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교수님과의 초반 ‘기(氣)’ 싸움에서 난 이미 져버렸다. 그 어떤 글보다 잘 쓰고 싶었던 교수님 인터뷰 기사에 대한 처참한 혹평. 나는 교수님의 지적을 들은 뒤 기사를 새로 썼다.

두 번째 원고를 본 교수님은 “새로운 팩트가 강조돼야 한다”며 제목까지 바꿔 달아주셨다. 마치 학창 시절 교수님의 무시무시한 빨간 펜 코멘트로 채워진 영어 리포트를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교수님은 당신이 가르쳐 사회에 내보낸 학생을 ‘애프터 서비스’ 하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글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교수님께 “괜찮게 썼더라”고 칭찬받는 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교수님이 떠난 지금, 그 목표는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았다.

교수님의 삶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번역가로서의 업적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살아있는 갈대’ ‘톰 소여의 모험’ 등 수많은 번역서를 남겼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 ‘한국문학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교수님의 번역 문장은 영어의 묘미를 정확한 한국어로 맛깔스럽게 표현해낸다. 뉘앙스를 최대한 살리고, 군더더기는 줄인 살아 꿈틀대는 문장! 그의 가르침을 삼분의 일도 흡수하지 못한 건 내가 불민한 탓이다.

교수님에 대한 나의 기억은 몇 가지 두드러진 이미지로 요약된다. 목발을 짚고 강의실 문을 당당히 들어서던 모습, 반짝이던 눈망울과 웃음 띤 얼굴, 소녀적 감성이 묻어나는 따뜻하고 담백한 글, 다소 높은 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병마와 싸우면서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정력적인 모습…. 그 무시무시한 에너지와 열정에 나는 늘 압도되고 말았다.

살아 꿈틀대는 문장

나는 5월10일 빈소에 들러 교수님과 작별인사를 했다. 무심한 제자가 연락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늘나라에서는 자유로운 두 다리로 마음껏 뛰고 날아다니시라고.

5월13일 서강대 성이냐시오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 교수님의 오랜 친구인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는 나를 또 한 번 감복시켰다.

“많은 이에게 희망 전하는 명랑 소녀로 살자고 나와 다짐했던 영희.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미안해요’ 하고 웃고 있네요. 꽃을 든 천사여. 편히 쉬소서. 지상에 두고 간 그의 향기 속에 슬픔 중에도 위로 받으며 그리움을 달랩니다. 영희야 잘 가, 그리고 사랑해!”

봄이 오면, 나는 장영희 교수님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이다. 서강대 캠퍼스에서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도, 스물네 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친 교수님을 인터뷰한 때도, 교수님과 영별(永別)한 계절도 모두 햇살이 눈부신 봄이다. 세 번째 쳐들어온 간암과 맞서 싸우며 교수님이 그토록 기다린 계절도 푸르른 봄이 아니던가.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 말은 어쩌면 그 학생보다는 나를 향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

‘나의 선생님’은 어느덧 ‘우리 모두의 스승’이 되셨다.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 희망의 메시지는 영원히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눈부신 봄날 영면한 고 장영희 교수

그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을 가르치고 세상을 떠났다.

신동아 200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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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동아일보 역량강화팀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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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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