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크리스털병에 담긴 최상급 코냑, 탐욕을 마비시키다

‘칵테일’과 ‘루이 13세’

  • 김원곤│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입력2009-06-04 2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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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한번쯤 인생역전을 꿈꾸고 쓰디쓴 좌절을 맛본다. 인생역전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모든 세속적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그래서 술을 찾는다. 큰맘먹으면 고급 술 한 병 마시면서 신분 상승한 기분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털병에 담긴 최상급         코냑, 탐욕을 마비시키다
    영화 ‘칵테일’은 로저 도날드슨 감독의 1988년 작품으로 세계적 흥행 배우인 톰 크루즈의 20대 중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영화의 기본 얼개는 칵테일 제조를 직업으로 하는 바텐더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특히 돈 많은 여자를 통해 단번에 인생역전을 이루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세속적 욕망과 좌절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한 깨달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는 막 군복무를 마치고 동료 장병들의 호위 아래 지나가는 뉴욕행 고속버스를 패기만만하게 세워 타는 브라이언 플래니건(Brian Flanagan·톰 크루즈 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기쁨과 기대도 잠깐. 브라이언은 특별한 경력과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한 모든 회사에서 거절당한다.

    크리스털병에 담긴 최상급         코냑, 탐욕을 마비시키다

    영화 ‘칵테일’

    할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밤에는 TGI 프라이데이 레스토랑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낮에는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는 생활을 시작한다. 바 매니저인 더글라스(덕)(Douglas Coughlin·브라이언 브라운 분)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해박한 칵테일 지식으로 단번에 브라이언의 바텐더 스승이 된다. 지극히 현실적인 덕은 뉴욕에는 멍청한 천사 투자가들과 돈 많고 할 일 없는 여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목표는 돈 많은 여자를 만나 성공하는 것이다. 브라이언은 이런 덕의 인생관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어쨌든 힘든 학업 병행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선다.

    마침내 브라이언과 덕은 그때까지의 인기를 바탕으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나이트클럽에서 바텐더 일을 시작한다. “내가 만든 칵테일에 미국이 취한다”고 말할 정도로 브라이언은 칵테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랄이라는 한 도발적인 여자 고객이 등장하면서 묘한 상황이 전개된다. 결국 브라이언과 덕은 고객들 앞에서 싸움을 벌이고 결별하기에 이른다.



    크리스털병에 담긴 최상급         코냑, 탐욕을 마비시키다

    영화 ‘칵테일’

    ‘칵테일과 꿈’

    덕과 헤어진 브라이언은 돈을 벌기 위해 평소 염두에 두었던 자메이카로 떠난다. 해변가 작은 바에서 바텐더로 기반을 잡아가던 어느 날, 술에 취해 쓰러진 친구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청순한 모습의 조르단 무니(Jordan Mooney·엘리자베스 슈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조르단과의 데이트 중 브라이언은 칵테일 장식용 미니우산을 보면서 이런 걸 만드는 사람은 큰돈을 벌 것이라며 부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

    자메이카로 온 지 2년, 뜻밖에 덕이 브라이언 앞에 등장한다. 소원대로 돈 많은 여자를 만나 결혼해 신혼여행을 온 것이다. 덕은 브라이언을 ‘항상 가난하고 어리석은 여자만 만나는 못난이’라고 놀리면서 자극한다. 이에 약이 오른 브라이언은, 바 손님 중에 돈 많고 나이 든 여자를 유혹해보겠느냐는 덕의 내기 제안을 수락한다. 결국 유혹에는 성공하지만, 우연히 이를 지켜본 조르단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뉴욕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 후 브라이언도 뉴욕으로 돌아와 그 돈 많은 여자와 동거하며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아보려 했으나 이런 관계가 늘 그러하듯 사소한 일을 계기로 결별한다. 브라이언은 후회하면서 조르단을 찾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정하기만 하다. 그러나 조르단은 브라이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대부호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조르단의 집을 찾아간 브라이언에게 조르단의 아버지는 1만달러짜리 수표를 내주면서 더는 딸을 만나지 말라고 말한다. 브라이언은 수표를 찢어버리고 나온다.

    조르단의 집을 나온 브라이언은 그날 밤 고급 사교클럽을 운영하는 덕을 찾아간다. 그날 그가 확인한 것은 덕이 겉보기와 달리 막대한 사업 빚과 방탕한 아내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날 브라이언이 다시 찾아갔을 때, 덕은 술병 유리조각으로 손목 동맥을 끊고 자살한 뒤였다.

    크리스털병에 담긴 최상급         코냑, 탐욕을 마비시키다

    영화 ‘칵테일’

    덕의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은 브라이언은 바로 조르단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를 데리고 나온다. 같이 살고 싶으면 너희들 힘으로 살라는 조르단 아버지의 원성을 들으면서. 결국 둘은 그들만의 힘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죽은 덕이 생전에 만들어놓은 ‘칵테일과 꿈(Cocktails & Dreams)’이라는 상호로 바를 연다. 손님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조르단은, 자신의 배속에 쌍둥이가 들어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행복에 젖은 브라이언은 “오늘 술은 모두 공짜”라고 소리친다. 돈에 인색한 늙은 바텐더 삼촌은 경악하며 “노(No)! ”를 외친다.

    영화 ‘칵테일’에는 제목에 어울리게 수많은 칵테일 이름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레드아이(red eye)’를 필두로 ‘진 토닉’ ‘싱가포르 슬링’ ‘스크루드라이버’ ‘마티니’ ‘큐바리브레’ ‘벨벳해머’ ‘알라바마슬램머’ ‘엔젤리트’ ‘가미카제’에서부터 ‘오르가슴’ ‘죽음의 발작’이라는 이름의 칵테일까지 실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물론 이들 칵테일이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코냑은 프랑스의 브랜디 산지 이름

    대부분 고객이 주문하는 형식으로 이름만 표현되지만, 이름만으로도 주의를 끄는 것은 단연 ‘레드아이’일 것이다. 이 칵테일은 큰 컵에 맥주와 토마토 주스를 담뿍 담은 다음, 컵 모서리에 날달걀을 톡 쳐서 껍데기는 버리고 속만 넣어 그대로 마신다. 이 칵테일은 브라이언이 처음 덕을 만났을 때 덕이 한잔 만들어 마시는 장면을 시작으로, 둘이 사업을 구상하는 장면에도 등장하고, 오랜만에 자메이카에서 재회했을 때 덕이 처음 건네는 인사도 “레드아이를 만들 줄 아느냐”는 것이다. 그 후 배 위에서 브라이언이 덕 부부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브라이언이 만든 ‘레드아이’를 마신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술은 칵테일이 아니다. 종반부에 등장하는 코냑(Cognac) ‘루이 13세’다. ‘루이 13세’는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세계 제2의 코냑 회사인 레미 마르탱(Remy Martin)의 최고급 브랜드다. 이 술은 우리나라에서 한때 뇌물사건에 연루돼 매스컴을 장식하면서 꽤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코냑은 브랜디의 일종이다. 브랜디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를 말한다. 세상의 모든 술은 기본적으로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뉜다. 곡물로 만든 발효주가 맥주이고 이를 증류한 것이 위스키라면, 포도로 만든 발효주는 와인이며 이를 증류한 것이 바로 브랜디다. 물론 브랜디란 명칭은 포도로 만든 증류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로 만든 증류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칼바도스(Calvados)’로 대표되는 애플 브랜디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포도로 만든 브랜디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냥 브랜디라고 할 때는 보통 포도 브랜디를 자동적으로 의미한다.

    브랜디는 이론적으로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생산된다. 그러나 브랜디의 명산지로는 프랑스의 코냑 지방이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고, 나머지 지역의 브랜디들은 코냑의 그늘에 가려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오늘날 브랜디의 대명사로, 심지어 브랜디와 동의어로 혼용되는 코냑이란 명칭은 실상 프랑스의 브랜디 산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 지방에서 나는 브랜디에 한해 코냑으로 지칭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코냑은 브랜디이지만 모든 브랜디가 다 코냑은 아니다’란 말이 있는 것이다.

    코냑은 원래 많은 오드비(eau de vie·코냑의 원료가 되는 개별 증류액)를 적절히 혼합(블렌딩)한 술이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숙성 연도 표시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많은 오드비 중 법적 규정에 따라 최단 숙성 연도의 오드비만을 숫자로 표시할 경우, 그 밖에 사용된 더 오래 숙성된 오드비들의 가치가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에 처음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곳이 세계 최대의 코냑 회사 헤네시(Hennessy)였다. 1865년 당시 소유주였던 아구스테 헤네시(Auguste Hennessy)는 우연히 사무실 창문 걸쇠에 장식된 별을 보고 코냑의 숙성 연도에 별 문양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star system’으로 별 하나는 최소 2년 숙성 제품, 별 두 개는 4년 숙성 제품, 그리고 별 세 개는 6년 숙성 제품을 가리켰다. 이보다 오래 숙성된 제품들은 모두 vieille(old)로 표시했다.

    Hennessy는 이후 수십년에 걸쳐 ‘star system’을 VS, VSOP, Napoleon, XO 체계로 바꾸어나갔다.

    ① VS는 ‘Very Special’의 약자로 최소 3년 숙성의 오드비를 함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입된 용어다.

    ② VSOP는 ‘Very Special(또는 superior) Old Pale’의 약자로 최소 5~6년 숙성된 오드비를 함유하고 있다. 이 용어는 1817년에 훗날 영국의 국왕 조지 4세가 되는 당시 섭정왕자(prince regent)가 헤네시사에 코냑을 주문하면서 특별히 ‘very special old pale’한 것을 원한 데서 비롯됐다.

    ③ 코냑 등급에서 ‘Napoleon’은 흔히 100년 숙성 제품 혹은 코냑의 최상위 등급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실제로는 최소 6년 숙성된 오드비를 사용하는, VSOP보다 조금 상위 등급의 코냑을 가리키는 용어다.

    ④ 유명한 이니셜 ‘XO’는 1870년에 처음 사용됐다. ‘Extra Old’의 약자로 알려져 있지만, ‘extraordinary’의 약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약자가 아니라 단순히 옛날 헤네시사 직원들이 코냑통을 배에 선적하기 전에 표시하던 기호였다는 설도 있다. ‘XO’는 최소 15년 이상 숙성된 오드비를 원료로 사용한다.

    ⑤ 최근 웬만한 회사들은 ‘XO’보다 상위 등급으로 ‘Extra’ 등급을 내놓고 있다. 각 코냑 회사의 최상위 제품으로는 각 회사가 자랑하는 최장 숙성 오드비들만 배합한 등급이 있다. 이들 제품을 따로 부르는 명칭은 없고, 레미 마르탱사의 ‘루이 13세’, 헤네시사의 ‘리처드 헤네시(Richard Hennessy)’ 등이 거기에 속한다.

    영화 ‘칵테일’에서는 브라이언이 조르단의 아버지가 준 수표를 찢어버리고 나온 날 저녁, 덕의 사교클럽을 찾아가면서 ‘루이 13세’를 선물로 들고 간다. 브라이언이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팔에 끼고 있던 특유의 새빨간 상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덕과 브라이언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덕의 배 안 호화 거실에서 이 술을 마신다.

    40~100년 사이의 술 1200여 종 혼합

    브라이언이 어떻게 이 술을 구했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상자를 열고 ‘루이 13세’ 병을 보면서 “바카라 크리스털”이라면서 감탄하는 모습에서 그도 처음 마셔보는 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바카라 크리스털(Baccarat crystal)은 프랑스 북동부 로렌지방의 바카라라는 마을에서 만드는 크리스털로 오랜 역사와 함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 때문에 고급 코냑 제품 용기로 종종 사용된다.

    ‘루이 13세’를 두고 브라이언과 덕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다. 병마개를 연 브라이언이 덕에게 “브리딩을 시켜야 할까?(Should we let it breathe?)” 하고 묻자 덕이 “50년 동안 숨을 쉬지 않았으니 이미 죽었어. 그냥 마시자”고 대답한다. 오래된 와인처럼 술의 향과 맛을 최대화하기 위해 병마개를 연 뒤 잠시 공기와 접촉하는 시간을 둬야 할지 묻는 질문에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해 이미 죽은 목숨인데 새삼 공기를 주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답하는 덕의 너스레 섞인 익살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당시 덕의 힘든 정신 상태를 은연중에 암시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또 여기서 ‘50년’이라고 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코냑은 위스키와 달리 정확한 저장 햇수를 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루이 13세’의 경우 40~100년 사이의 술 약 1200종을 혼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취한 상태에서도 계속 술을 마시려는 덕을 브라이언이 말리자, 덕은 “행운은 사라지고 머리는 피폐해졌지만 술만은 남아있다”면서 계속 마신다.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듯.

    크리스털병에 담긴 최상급         코냑, 탐욕을 마비시키다
    김원곤

    1954년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의학박사(흉부외과학)

    우표, 종(鐘), 술 수집가

    現 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덕의 죽음 자체도 상징적이다. 덕은 ‘루이 13세’ 병을 깨 크리스털 조각으로 손목동맥을 그었다. 바텐더에서 일약 억만장자로 변신하길 꿈 꾸었으나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덕이 부의 상징이랄 수 있는 ‘루이 13세’ 병 조각으로 목숨을 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부에 대한 맹목적인 탐욕은 결국 깨진 병 조각처럼 깊숙이 우리의 삶을 찔러 들어오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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