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불교의 ‘자아’는 면역학의 ‘자기’… 알레르기 극복은 곧 열반의 과정

알레르기의 면역학적, 불교적 이해

  • 입력2009-05-29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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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자아’는 면역학의 ‘자기’…        알레르기 극복은 곧 열반의 과정

    면역세포인 T세포(왼쪽)가 암세포에 붙어있는 모양.

    뇌사(惱死)’는 인간의 생존이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에 의해 규정됨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된다. 근대철학의 기수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정신과 사유가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는 본질임을 분명히 했다. 과연 정신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한가.

    관념철학은 이에 대해 옳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의학은 이런 결론을 용인하지 않는다. 뇌사 상태에 빠져도 인간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뇌사 상태에서도 면역 기능은 활동한다. 뇌의 명령 없이도 면역체계는 외부 바이러스나 내부 음식물의 독소를 방어하고 제거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식으로 생각하면, 면역은 인간의 사유 활동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본질인 셈이다.

    불교의 깨달음과 지혜는 자아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자의식’ 때문에 시작된다. 소유와 집착은 자의식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면역학도 불교의 ‘자아(自我)’처럼 ‘자기(自己)’와 ‘비자기(非自己)’라는 비과학적이고 모호한 개념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우주론적 세계(불교)와 그 극단적 대칭점인 마이크로 세포(면역학)의 세계, 너무 다른 것 같지만 분자론적인 해석이 거듭될수록 불교의 자아와 면역학의 자기는 서로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의 자아와 면역세포의 자기인식

    불교의 최고 경전인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관(觀)은 황새가 먹이를 바라보는 모습을 형상화한 한자. 먹이를 살피듯 마음을 한 곳에 두고 요모조모를 따져본다는 뜻이다. 사냥할 때 덥석 달려들면 반드시 실패다. 고요하게 평정심을 가지고 먹이를 둘러싼 모든 주변 환경을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보는 속성을 가진다. 따라서 자신이 바라보는 한쪽 면에 모든 가치를 두고 집착한다. 코가 막힌 사람은 코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눈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전체 중의 하나일 뿐. 자살도 사랑 명예 돈 등 어느 한 가지 면에 집착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자재보살’에서 관은 이처럼 두루 보아서 머물지 않고 ‘자기’를 깨어서 관찰한다는 의미이고, 자(自)는 자아를 가리키며, 보살은 보리살타라는 말로 ‘지혜가 존재함’을 뜻한다. 따라서 관자재보살의 전체적 의미는 ‘자아를 요모조모 입체적으로 지켜보는 곳에 지혜가 존재한다’로 요약된다. 면역이 우리 몸속에서 일으키는 이물질과의 전쟁도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시작한다.(다다 도미오의 ‘면역의 의미론’ 참조)

    우리 몸을 지키는 군인에 해당하는 대식세포 마크로파지는 이물질인 ‘비자기’가 침입하면 이를 우선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그러고는 그 파편을 자기(대식세포)의 고유이름이자 바코드인 ‘hla 항원’ 위에 싣는다. 국방부에 해당하는 ‘헬퍼 T세포’는 그 바코드를 보고 피아를 식별한 후 T세포나 B세포에 싸울 것을 명령한다. 그 싸움이 곧 면역반응이다. 그런데 헬퍼 T세포가 이물질을 비자기로 인식하는 과정은 자기와 다름을 스스로에게 조회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이때 이물질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개의 객체인 비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변해서 생긴 비자기로 인식된다. 만약 대식세포의 바코드가 처음 ‘홍길동’이었다면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탐식하고 난 뒤에는 ‘홍길동 S’로 바뀐다. 이 바코드는 매우 입체적이지만 헬퍼 T세포는 대식세포의 이런 변화를 한쪽 면만 보지 않고 요모조모 따져본 후 자기의 비자기화를 인식한다. 그런 후에 바이러스와 세균의 전쟁을 이끈다. 바로 ‘관(觀)’의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불교의 ‘자아’는 면역학의 ‘자기’…        알레르기 극복은 곧 열반의 과정

    봄철 꽃가루는 불청객 알레르기를 유발한다.

    1960년대까지의 면역학은 우리 몸의 면역계가 이물질을 손쉽게 나와 다른 남으로서 비자기로 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지금의 면역학은 원래의 자기를 인식하는 기구가 자기의 비자기화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자기는 언제나 자기라는 시각 위에서 인식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점은 관자재보살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일련의 면역반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혈간세포라는 뿌리세포로부터, T세포, B세포, 마크로파지 등 다양한 세포로 분화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이런 분화는 쉼 없이 계속되면서 변형되고 새롭게 자기 조직화된다. 외부적 자극이 없이도 내부의 신경계와 반응하면서 파도처럼 출렁인다. 세포 간의 비율은 한 번도 고정되지 않는다. “자아는 시공이 각기 다름에 따라 쉴 새 없이 변하며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과 같다

    ‘반야(般若)’를 한자로 풀이하면 배가 항구에서 떠나면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면역세포는 비자기의 침입에 대해 합목적적이고 통합된 반응을 보임으로써 이물질과의 전쟁을 종식시킨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면역세포의 승리로 종식되고 몸은 직전의 평형상태로 돌아간다. 바로 배가 떠나온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셈이다.

    열반(涅槃)의 경지…알레르기 사라진 상태

    면역학에서 단백질이라는 거대한 정보 덩어리는 계속 분해과정을 거치면 폴리펩타이드의 상태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몸이 ‘자기’로 인식하던 단백질은 ‘비자기’로 바뀐다. 잘게 쪼개지는 과정에서 숨겨진 정보가 속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몸은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기가 상당히 애매해진다. 비자기 또한 자기가 쪼개지는 연장선에 존재하며 순간순간 비자기로 인식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불교에서의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가르침과 맞닿는다. 모든 우주가 자기라는 뜻이다.

    단백질뿐 아니라 세포 속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우리 몸속에는 어느 곳이나 신경전류가 흐르는데 전류를 발생하는 발전소 기능을 하는 물질이 미토콘드리아다. 미토콘드리아의 원래 모습은 박테리아. 원시세포 상태에서 세포 내로 침입해 발전소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이는 거꾸로 ‘이물질’인 비자기가 자기 내부로 들어와 자기화한 증거가 된다.

    단백질은 폴리펩타이드에서 더 잘게 부서지면 펩타이드의 상태로 바뀐다. 이 상태에 이르면 자기와 비자기를 인식하는 인식 장치조차 사라지면서 면역반응은 사라진다. 바로 자기가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자아가 사라진 상태 즉, 열반(涅槃)을 의미한다.

    열반은 바다로 비유하면 ‘펄’을 의미하는데 모든 생명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서서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상태를 뜻한다. 자아가 소멸됨으로써 평온과 지혜가 찾아오는 해탈의 경지. 자기를 놓으면 평화가 찾아온다. 이렇듯 불교의 자아와 면역학의 자기는 맞닿아 있다.

    불교의 ‘자아’는 면역학의 ‘자기’…        알레르기 극복은 곧 열반의 과정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現 갑산한의원 원장.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 이사, 한의학 박사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이런 면역반응의 단계 어떤 곳에서 자기와 비자기를 인식하는 시스템에 고장이 오면 자기가 자기를 공격하고, 비자기인 이물질이 오히려 활개치고 다니는 상황이 오는데 바로 이럴 때 일어나는 질환이 알레르기이고 류머티스와 같은 자가면역성 질환이다. 불교로 따지면 알레르기를 극복하는 것은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고, 그 반대쪽은 아귀지옥(餓鬼地獄)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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