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 짚고 헤엄치기’ 포기하고 사업청산 택하는 사람들
- 막대한 적자 버티는 한전의 비법은 ‘국가예산 투입’
- 가정용 전기 팔아 번 돈으로 산업용 전기 손실 보전한다?
- “제조업 경쟁력 생각하다 전기공급체계 붕괴할 판”
아시아나항공(35%), 인천공항공사(34%), 현대중공업(31%) 등이 주주로 참여했던 이 회사는 1997년 집단에너지법에 따라 집단에너지 사업자로 지정됐다가, 2004년 전기사업법 개정으로 구역전기사업제도가 생기면서 자동으로 구역전기사업자 자격을 얻었다. 구역전기사업제도란 소비자와 가까운 곳에 민간업체가 발전소를 건설해 전기를 직접 판매하게 함으로써 송전설비를 건설하는 비용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제도다. 지금까지 31개 업체가 참여해 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인근에 LNG 발전시설을 지어 가정용 소비자에게 전기를 판매해왔다.
문제는 이들 사업자들이 자신들의 LNG 발전소는 가동률을 낮추고, 대신 한국전력에서 대비전력 명목으로 싸게 사온 전기를 소비자에게 단순 재판매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고 있다는 사실. 인천공항에너지만 해도 그간 아예 자체발전을 하지 않고 한국전력에서 전기를 100% 사서 단순히 되팔기만 했다. 그것도 1kWh당 92원에 사서 116원에 공급하는 ‘땅 짚고 헤엄치기’식 장사였다. 현재 한전에서는 예납금을 받고 이 회사에 매달 25억원어치 정도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자체 생산한 ‘비싼’ 전기는 한전에 팔아 재미를 봤다는 점이다. 감사원은 지난해 인천공항공사 감사 과정에 인천공항에너지가 2004년 6월부터 3년6개월간 자체 생산한 전기를 한국전력거래소에 판매해 262억원의 부당 수입을 올린 사실을 적발해냈다. 한전이 민자 발전사업자들 봉이냐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한전 관계자의 말이다.
“당초에는 각 구역전기사업자가 해당지역 전기수요의 60% 선까지 자체 발전하는 것으로 계획됐지만, 2007년과 2008년에는 업체에 따라 자체 발전율이 10~20%선으로 떨어졌다. 나머지는 대부분 한전에서 싸게 사온 전기를 소비자에게 비싸게 팔아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엄청난 차액을 챙기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아니고 무엇인가.”
‘울상 짓는 봉이 김선달’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한전이 이들 회사에 파는 전기값과 이들 회사가 각 가정에 파는 전기값이 꽤 크게 차이가 나는 가격구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기사업법의 허점도 한몫했다. 한전 관계자는 “전기사업법에 따르면 구역전기사업자는 구역 내 발전 수요의 60%를 감당할 수 있는 설비만 갖추면 지정이 가능하도록 돼 있을 뿐 이 설비를 가동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면서 “이런 마당에 굳이 손해를 보면서 발전설비를 가동할 사업자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서두에서 본 것처럼 이렇듯 땅 짚고 헤엄치기 사업을 해온 회사들이 막대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줄줄이 사업 포기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천공항에너지만의 일이 아니다. 2008년 한 해에만 구역전기사업자 5곳이 사업을 접었고, 2009년 들어서도 벌써 4곳이 손을 들었다. 현재 사업 포기를 검토하고 있는 업체만 6곳. 절반 가까운 사업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울상 짓는 봉이 김선달.’ 언뜻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국제 에너지 가격’이다. 2008년 초부터 널뛰기 시작한 유가와 LNG 가격 때문에 수지가 맞지 않아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 인천공항에너지의 경우 현재 체납한 가스요금만 24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구역전기사업체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밖에서는 우리가 앉아서 돈 번다고 비판하지만, 우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 발전을 위해 구매하는 LNG 가격이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보다 세 배 이상 뛰었다. 그렇지만 판매단가는 kWh당 27.8원이 오르는 데 그쳤다. 발전원가가 판매단가를 넘어선 지 오래다. 관할지역 소비자에게 난방도 함께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발전설비를 아예 세울 수도 없다. 돌리면 돌릴수록 적자가 쌓이는데 무슨 수로 버티나.”
전문가들은 “국내에서는 열병합발전소의 경제성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국전력의 한 관계자는 “열병합발전소는 1년 내내 열과 전기를 함께 공급해야 경제성과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겨울철에만 난방용으로 열을 공급하기 때문에 수익성을 확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2008년 9월9일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에 출석한 김쌍수 한국전력공사 사장(오른쪽). 이 자리에서 김 사장은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않을 경우 올해 3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된다”며 “정부의 추경예산 지원 외에는 손실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살펴보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발전이 그렇듯 수지가 안 맞는 사업이라면, 전기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한국전력은 과연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무슨 특별한 비책이라도 있는 걸까. 비록 한전의 발전비율 가운데 40%가량이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과 관계가 적은 원자력발전이라고는 해도, 화력발전의 비중이 여전히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엄청난 적자를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가재정을 투입해 보전한 것이다. 한전 내부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이 회사는 3조659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영업외이익을 감안해도 3조원 가까운 적자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국회는 추경예산을 통해 6680억원을 한전에 지원했다. 고스란히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예산이었다. 국제에너지시장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올해 예상되는 적자규모도 만만치 않다. 유가 70달러, 유연탄 가격 100달러, 환율을 1200원으로 상정하고 작성된 내부 전망치는 올해 영업적자 규모가 2조446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08년 현재 한전의 부채는 26조원에 가깝다.
물론 여기에는 공기업 한전이 안고 있는 비효율 문제도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지난해 추경예산 논의과정에서도 이와 관련해 다양한 지적이 불거진 바 있다. 엄청난 적자에도 한전 임직원들의 임금이 연평균 6% 내외로 꾸준히 상승했다거나, 2008년 한 해 한전이 지출한 접대비가 공기업 가운데 최고를 기록했다는 비판 등이다.
그러나 한전의 전체예산에서 인건비 등 이른바 ‘관리가능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내외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비효율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윤원철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의 말이다.
“한전의 경영효율화를 통해 줄일 수 있는 적자폭은 높게 잡아도 연간 2000억~3000억원 내외일 것이다. 애초에 원가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전기를 파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늘어나는 적자와 부채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전기요금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당장은 전기요금을 적게 냈지만 결국은 한 바퀴 돌아 세금이라는 형태로 그 차액을 고스란히 지급하게 되기 때문이다.”
값싼 전기 펑펑 쓴 탓에
낮은 전기요금으로 발생한 적자를 세금으로 메우는 구조는 형평성에서도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 소비자에 따라 전기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고 적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를 세금으로 메우면 그 부담은 전기사용량과는 무관하게 분담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기를 쓰는 사람 따로, 부담을 지는 사람 따로라는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현재의 전기요금이 그 용도에 따라 다르게 매겨지는 구조 때문에 더욱 심화된다. 주택용과 일반용, 산업용, 농사용 등 모두 6개 항목 가운데 산업용과 농사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해온 것이 그간의 체계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에는 1kWh 당 114.97원의 요금을 부과하지만 제조업 공장에는 70.84원만을 매기는 식이다.
전체 전기판매량 가운데 산업용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음을 감안하면, 산업용 전기에 원가 이하의 요금을 부과하는 현재의 구조가 불어나는 적자의 주원인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가격이 높은 주택용이나 일반용 전력 소비자의 부담으로 산업용이나 농사용 전력 소비자의 지출을 줄여주는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한 해 동안 한국전력에서 생산하는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한 사업체는 삼성전자(86억9600만kWh)였다. 현대제철(70억6100만kWh)과 포스코(47억1100만kWh)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 사업체들은 당연히 원가보다 싼 산업용 전기를 사용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지난해의 경우 삼성전자는 1523억원의 보조금을 한전으로부터 지원받은 셈이된다. 현대제철과 포스코도 그와 비슷한 수준. 에너지경제연구원의 김진우 선임연구위원은 “이쯤 되면 평범한 서민들의 돈을 모아 대형장치산업 재벌들의 전기값을 대신 물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불균형 구조는 197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전기값을 인위적으로 낮춰 기업들의 해외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책적으로 설계됐다. 그로 인해 생산원가를 낮출 수 있었기에 제철 등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는 데 보탬이 됐다는 게 옹호론의 근거다. 실제로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업체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조업체라는 점에서, 지난 산업화 시기 이 같은 견해에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놓고 보면 이 때문에 산업 전체의 에너지 효율이 낮아지는 문제가 누적돼온 것도 사실이다. 워낙 전기값이 싸다보니 에너지를 마구 사용하는 양상이 정착됐다는 것. 한 전문가는 “기업 쪽에서 보자면 굳이 에너지 효율이 좋은 생산설비로 교체할 이유가 없다. 절약할 수 있는 전기료보다 교체비용이 훨씬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우리나라 산업의 에너지 효율구조에 관한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이 같은 문제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제학계에서 통상 ‘에너지 원단위(原單位·intensity)’라고 부르는 통계지표는 한 나라의 산업이 1000달러의 부가가치를 생산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2006년 에너지 원단위는 0.32다. 풀어 말하자면 1000달러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데 석유 320kg 분량의 에너지를 사용했다는 말이다. 반면 같은 기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평균은 0.19로 한국의 60%에 못 미친다. 일본은 0.10에 불과하다. 제조업만 한정해서 놓고 보면 한국 0.37, OECD 평균 0.14로 격차는 더 벌어진다.
같은 돈을 벌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는 이 같은 구조는 한국의 에너지 해외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심각한 문제다. 김진우 선임연구위원은 “한 해 수입되는 1차 에너지의 40%가 전력생산에 투입된다”면서 낮은 전기값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악화되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고 지적한다.
LNG를 전기로 바꾸어 각 산업체에 전달하는 동안 48%의 손실이 발생한다. 중유의 경우 58.2%에 달한다. 반면 산업체에서 석유를 직접 사용할 경우 손실률은 20%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 세금으로 보전해가며 틀어막은 전기요금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산업구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지난해 6월 발간한 보고서는 이렇게 해서 생긴 국가 전체 손실액이 9000억원이 넘는다고 추산하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전기값이 원가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업체들은 제철과 반도체, 석유화학 등으로 그 업종이 한정돼 있다. 이들 업체의 원가에서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개 1% 미만. 1위를 차지한 삼성전자의 경우 산업용 전기료가 10% 가까이 인상된다고 해도 원가에 미치는 영향은 0.1% 내외에 불과하다는 게 한전 측 추산이다.
“보다 탄력적인 방파제”
현재의 전력요금 체계가 가진 장점으로 흔히 내놓는 또 한 가지 근거는 급변하는 국제에너지시장의 가격변화에서 우리 기업들을 보호하는 완충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기값이 낮은데다 유가 변동 등에 상관없이 같은 가격을 유지하기 때문에 고유가 파동에서도 국내 산업이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역할이야말로 공공부문이 맡아야 할 몫이라는 견해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한국의 산업구조가 국제시장의 흐름과 유리되어 장기적인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부터 화석연료 고갈 같은 전반적인 추세가 피부에 와 닿지 않으므로 생산방식을 전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재편하는 작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에너지 다소비형 1·2차 산업의 비중을 줄이고 3차 지식서비스산업의 비중을 늘리는 구조 재편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가장 결정적인 한계는 이러한 구조가 계속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이 전기공급자에게 막대한 적자와 부채가 누적될 경우 한전의 파산 등으로 아예 현재의 전기공급체계 자체가 붕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윤원철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쉽게 말해 연료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현재의 전기요금 체계는 완전히 딱딱한 방파제다. 당장은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나게 거센 파도가 몰려오거나 충격이 쌓이면 언젠가 한순간에 붕괴할 수도 있다. 국제 에너지 가격의 변동을 고스란히 전기료에 반영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부분은 연동하는 탄력적인 구조로 가야 방파제도 존재할 수 있다. 세계시장의 흐름에 완전히 내맡기는 것과 완전히 분리되는 방안 사이의 적절한 중간지점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장기적으로 전력가격을 시장조절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 역시 당장은 현실적인 타협책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방법론이 연료비 연동제의 도입과 산업용 전력가격의 인상. 한전 역시 ‘현실적인 목표’로 인식하고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연료비 연동제의 경우 국내의 다른 에너지 가격은 국제시장 가격의 변동을 소비자 요금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가스나 난방의 경우 IMF 위기를 전후해 모두 이 같은 연동제를 택했지만, 전기만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어 에너지 가격이 오를 경우 국내 에너지 수요가 전기로 쏠리는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전기요금체계도 이러한 연동구조를 갖고 있다.
지난해 6월 한국개발연구원이 수행한 관련 연구는 기본요금과 전력량요금의 두 항목을 더해 전기료를 산출하는 현재의 방식을, 기본요금+전력량요금+연료비조정요금의 세 항목으로 나누어 산출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있다. 연료비가 5% 이상 오르거나 내릴 경우 이를 반영해 요금을 부과하자는 것. 물론 이 경우도 변화하는 연료비 항목은 정부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산업용 전기료의 인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현재의 체계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산업용 전기가격만을 인상하는 것이 가장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상황이 열악한 중소제조업체의 경쟁력 약화 같은 부작용도 피하기 어렵다. 대신 한전 측이 장기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방안은, 현재는 가격 차이가 심한 일반용과 교육용, 산업용 전기를 통합하고 대신 전압별로 요금을 부과하자는 것. 이렇게 되면 일반용 전기를 사용하는 서비스산업과 산업용 전기를 사용하는 제조업 간의 차별도 없앨 수 있고, 소규모로 전력을 사용하는 중소제조업체의 부담 증가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그 골자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이렇듯 지난 수년간 계속되어온 문제제기에 정부 역시 인상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지난해 고유가 파동을 거치면서 전기료 인상에 대한 공감대는 더욱 굳어진 상황.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등 정책결정자들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전기요금 체계 개편의 당위성을 강조한 바 있다. 부분적으로나마 산업용 전기요금이 인상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4월 관련 전문연구기관은 이와 관련한 청와대 보고를 진행한 바 있다. 에너지 소비구조의 현실과 그 대안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전력요금 개편방안을 담은 보고였다. 이 자리에서 정부 고위관계자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에서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강행하기란 간단치 않다는 이야기다.
지경부가 최근 심야전력 요금을 우선 인상한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이러한 고민의 산물로 해석된다. 판매단가가 45.69원에 불과해 원가의 60%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공급되는 심야전력은 물가지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인상해도 당장 ‘눈에 보이는 악영향’이 적은 편이다. 5월11일 김영학 지경부 제2차관은 “상반기 중 인상을 검토하고 있으며 한전이 요구하는 7.5% 인상도 옵션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러나 낮은 전력 가격이라는 메리트 때문에 심야전력용 난방장치 등을 설치한 일반 소비자의 반발이 없을 수 없고, 한전이 요구하는 산업용 전기료 인상의 경우 물가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부정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부는 일반 소비자가 당장 피부로 느끼게 될 가정용 전력요금의 경우에는 아예 인상 가능성 자체를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난해에는 유가 때문에, 올해는 환율 때문에 한전의 상황이 간단치 않다는 걸 왜 모르겠나. 그러나 당장 환율이 떨어지고 있고 유가가 어떻게 될지도 지켜봐야 할 텐데, 한번 올려놓으면 내리기 힘든 전기료에 손을 대는 것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가정용 전기료는‘위에서’ 결심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산업구조 측면에서 보자면 다양한 논증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현재의 전력요금체계 개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물가안정과 서민보호 ‘명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전기가 생활필수재인 만큼 낮은 가격을 유지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가격구조의 왜곡을 지적하는 측에서는 낮은 가격을 유지해 불특정 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현재의 시스템이야말로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한다. 차라리 소득이 낮은 계층에 전력사용 보조금을 주거나 이들에게만 별도로 전기료를 매기는 것이 옳지, 이들을 이유로 전체 전기시장을 왜곡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 같은 논리라면 사실상 일반 서민이 내는 가정용 전기료에서 번 돈으로 산업용 전기료를 보전하는 식의 현재 체계는 더욱 재검토 필요성이 높아진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모두 언급을 꺼리는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낮은 전기료를 유지한다고 해서 그 부담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식의 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은 고스란히 세금의 형태로 다시 국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구조에 관해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설명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전기요금 체계 때문에 재정에서 충당해야 하는 자금의 규모는 얼마이고 장기적으로는 어느 정도에 육박하게 될지, 거꾸로 이러한 체계를 개편할 경우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는 확인하기 어렵다. 가장 큰 이해 당사자인 한전이 공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요금체계 개편 관련 자료에도 이에 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고, 전문가들 역시 그러한 ‘총량비교’는 학계에서도 진행된 바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 전문연구자는 이를 두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전의 현실적인 이해와 근본적인 전력구조 개편 문제를 꺼내고 싶지 않은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촌평했다. 전기요금체계 왜곡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고민하자면 결국 완전한 시장체제 도입이나 민영화 논의로 연결될 수밖에 없지만, 한전이든 정부든 이를 극도로 경계하기 때문에 논의가 닫힌 틀 안에서만 맴돈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시장체제 도입에 따른 부작용이나 문제점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동안 일부 국가에선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력산업에도 도입해 전력산업에도 경쟁논리를 도입하려고 했다. 한전 관계자는 “전력산업의 속성이나 구조를 제대로 모르는 경제학자들이 전력산업 구조개편 문제를 주도하다 보니 당초 예상한 긍정적인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 게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도 김대중 정부에서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일환으로 한전의 발전 부문을 자회사로 분할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이래 대부분 중단됐다. 이 같은 흐름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을 넘긴 현재도 마찬가지.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한계가 일부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전 관계자는 “발전 자회사로 분할해놓았기 때문에 사장 자리만 5개가 더 늘어나는 등 비효율이 증가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 상황에서 한전의 구조적인 적자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안은 전력요금체계 개편이다. 한전 주변에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전의 선진화는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많다. 그러나 전기요금 인상 문제만 해도 너무나 신중한 행보를 보이는 정부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문제를 과연 제대로 손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