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가 화제다. 친구의 아내를 탐하는 신부. 충격적인 설정이다. 그런데 친구의 아내를 탐하는 자가 신부라서 문제인가, 친구의 아내를 탐하는 자체가 문제인가?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내 손에 신문을 쥐고도 옆 사람이 펼친 신문 내용이 더 궁금한 게 사람 마음이다. 남이 가진 것을 탐내는 인간의 본능, 영화가 놓칠 리 없다.
주목되는 부분은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항목이다. ‘탐하다’는 사전적으로 ‘어떤 것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어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를 의미한다. 탐한다는 것은 축자적으로 무엇을 욕심내는 것을 뜻하지만 사실상 이는 단지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 심리 상태 이상의 행위를 내포한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대한 질투. 탐하는 것은 질투라는 심리적 갈등을 위반으로 실현한 행동이다.
남의 것이라 탐해서는 안 되지만 남의 것이라 또 탐이 난다. 사람은 내가 갖지 못했지만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질투하고 욕망한다. 내게는 없는 좋은 차, 훌륭한 집, 아름다운 아내는 상대적 빈곤감과 자괴감을 부추긴다. 탐하는 마음은 초라한 자기 확인이라는 고통 속에 ‘나’를 밀어넣는다. 100석 부자라도 1000석 부자 옆에서는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남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조항은 중세엔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조항과 구분되기도 했다. 여기엔 재미난 상상이 가능하다. 남의 ‘집’이 단순히 타인 소유의 재산을 상징한다면 아내는 재산 이상의 감정적 연루와 닿아 있다. 집과 아내 사이에는 인간 대 인간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윤리적 문제가 있다. 남의 아내는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다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이자 그의 아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탐나도 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왜일까? 내가 아닌 내 친구의 아내이고, 내 친구의 남편이고, 내 친구의 집이고 차이기에 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멋져 보이는 것은. 사람들은 그래서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고 빼앗고 싶은 마음은 욕망을 부추긴다. ‘남의 것’이기에 더 중요하고 필연적이며 미치도록 탐나는 그것. 그런데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십계명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탐하는 것이지 탐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의 것은 탐이 난다.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더더욱 탐해서는 안 된다. 탐내되 탐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적 억압인 셈이다.
모두 빼앗았으나 어느 하나 내 것일 수 없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은 탐내는 질투로 침잠한다. 질투는 힘이 세서 때로는 의외의 결과물을 일궈내기도 한다. 성공의 밑거름에는 역설적이게도 언제나 질투가 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상관없다. 바로 이웃이기에, 그들이 바로 내 곁의 사람이기에 비교되고 탐이 난다. 당신의 소유물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 때, 욕망과 질투에 시달리는 빈곤한 영혼들. 때로 영화는 그 쓸쓸한 영혼들에게 연민과 위로의 시선을 건넨다.
알랭 들롱의 강렬한 눈빛으로 기억되는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타인의 삶을 탐내고 탐하는 자를 잘 보여준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탐하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가난한 삶을 일확천금으로 탈피하고 싶은 가난한 청년 리플리에게는 필립이라는 동창생이 있다. 리플리와 달리 필립에게는 유능한 아버지와 그로부터 물려받을 재산, 그리고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다.
성공을 꿈꾸는 리플리에게 필립의 삶은 그의 결핍을 확인시켜주는 리트머스지와 같다. 필립은 리플리가 너무도 간절히 원하는 것을 쉽게 갖는다. 아니 필립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다. 리플리는 생각한다. ‘필립이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만이라도 내게 있었더라면.’ 그런데 필립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 리플리가 보기에 필립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진 행운아인지조차 모르는 바보이자,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감사한 마음도 없이 행운을 남용하는 난봉꾼이다. 필립은 버르장머리 없고 거만한 철부지에 불과하다.
필립의 삶은 리플리에게 상대적 결핍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게다가 필립은 리플리를 하인처럼 부리고 프랑스 애인 마르주 앞에서도 그를 모멸한다. 필립의 태도는 리플리의 결핍감과 자괴감을 분노로 바꾼다. 리플리가 보기에 필립은 그만한 행운을 누릴 자격이 없다. 그래서 리플리는 필립의 사인을 연습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필립’이 되기로 한 것이다.
영화에서 리플리는 자신을 무시하는 필립에게 모욕감을 느끼고 증오심에 그를 살해한다. 마음으로는 이미 수차 그를 죽이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평생토록 갖고 싶어하는 것들을 필립이 모두 갖고 있기에 그는 필립의 모든 것을 탐한다. 그의 감정이 증오가 아닌 질투였음은 리플리가 단지 필립을 없애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필립이 되고 싶어했다는 데서 분명해진다. 그는 단순한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삶, 필립의 삶을 탐낸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삶을 사는 것, 타인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눈이 부시도록 태양이 빛나는 어느 날, 필립이 되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리플리는 자신이 버린 시체와 마주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은 리플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행복의 정점 너머 리플리의 비밀은 서서히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은 시간 리플리는 필립으로서의 삶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닻이 뭍에 닿는 순간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고 말 것이다. 리플리의 행복은 어차피 타인의 것이기에 궁극적으로 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것이다. 미칠 듯 갈증을 불러일으키던 필립의 삶을 빼앗기는 하지만 그것은 찰나적 소유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결국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는 리플리의 비애는 타인의 삶을 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영화 ‘어톤먼트’
‘친구의 아내와 놀아난 신부.’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박쥐’는 도발적 시놉시스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50명의 피시험자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 죽음의 바이러스 연구에 신부 상현이 자원한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헌신해 세상에 이로움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기도가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상현은 이브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음에 이르지만 수혈로 갱생한다. 문제는 그가 흡혈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언뜻 ‘박쥐’는 흡혈귀가 된 사제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신성한 인간인 신부와 인간의 문제, 죄책감을 다루는 작품으로 보인다는 의미다. 하지만 좀 더 중요한 문제는, 그가 피를 먹는다는 사실이 아닌, 친구의 아내를 빼앗는다는 데 있다. 상현은 친구의 아내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친구, 그러니까 그 여자의 남편마저 살해한다. 친구의 아내와 섹스를 하고, 피를 빨아먹고, 살인하는 것, 상현은 신부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한꺼번에 저지른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신부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남의 아내와 섹스하고 피를 빨고 살인을 해도 될까? 물론 안 된다. 신부 상현이 저지르는 행동들은 신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친구의 아내를 탐하거나 흡혈을 하거나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
상현은 말한다. “전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 그게 죄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그는 친구의 아내를 탐해 그녀를 얻는다. 그런데 그는 그 공간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살이 썩어들어가는 지옥 속의 삶은 탐나는 타인의 삶을 탐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질투를 안겨주지만,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투에서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싶을 때, 그리고 금지어들 때문에 삶이 탱탱해진다.
그러므로 ‘박쥐’는 탐나지만 탐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탐나는 것을 탐하는 순간, 인간은 흡혈귀가 되어 햇빛을 피해 다녀야 한다. 인간이 흡혈귀가 되는 경계는 탐냄과 탐함의 경계와 일치한다. 인간은 남의 아내를 보고 욕망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뜨겁게 간음하지만 아닌 척 외면한다. 친구의 아내를 탐내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럼에도 친구의 아내를 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질 수 없으니 파괴해버리는 심정
영화가 시작되면 소녀 브리오니가 직각보행으로 어딘가 서둘러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단발의 금발머리 소녀의 꼭 다문 입술과 야윈 팔이 선병질적 인상을 풍긴다. 소녀는 엄마에게 달려가 첫 번째 희곡을 완성했음을 알린다. 그런데 그 희곡 내용이 수상하다. 영화 ‘어톤먼트’는 사랑을 거절당한 여자의 드라마다. 브리오니는 로비를 사랑하지만 로비는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를 사랑한다. 브리오니는 어리다.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소녀,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언니 세실리아는 브리오니에게 없는 관능미를 갖고 있다. 세실리아는 브리오니에게 없는 그것으로 로비와 사랑을 나눈다. 브리오니는 용서할 수 없다. 그 사랑법은 브리오니가 따라 할 수 없는, 아직은 남의 것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가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환한 햇빛 아래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정원에 서 있지만 로비와 세실리아의 자태는 색정적이기 그지없다. 몸에 달라붙은 속옷을 입고 분수에 뛰어드는 세실리아와 그녀의 손을 가로채듯 잡는 로비. 그들의 눈빛은 멀리 있는 브리오니의 체온마저 상승시킨다. 영악한 브리오니는 깨닫는다. 로비의 저 눈빛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던져주지 않은 ‘에로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브리오니는 엉겨있는 세실리아와 로비를 보고 ‘변태’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는 둘의 행위가 이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야릇한 느낌을 선사했기에 저주한다. 브리오니는 둘의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하지만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원하지만 아직은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질투심은 결국 그 운명을 훼방 놓겠다는 잘못된 ‘연출자’의 각오로 실현된다.
브리오니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로비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아 그를 파괴하고 싶어졌다는 것을. 마치 경쟁자가 생겼을 때 소중히 아끼는 장난감을 되레 부숴버리는 못된 아이처럼, 브리오니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로비를 파멸시키고 싶어한다. 가슴 아픈 것은 브리오니의 사랑법이 어른이 된 우리들 가운데도 있다는 사실이다.
브리오니는 마지막 순간 고백하고 구원을 받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용서받기 어려울 듯싶다. 브리오니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양식을 빌려 로비와 세실리아의 비극적 멜로드라마를 해피엔딩의 로맨스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렇게 해서라도 둘의 사랑을 완성해주고 속죄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바람은 말년에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덜어내고자 하는 노인네의 이기심과 다를 바 없다. 고백함으로써 브리오니는 구원받고자 한다. 고백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하지만 구원은 또 다른 곳에서 행해져야만 할 것이다.
‘어톤먼트’가 구원이나 고백이 아닌 ‘속죄’의 뜻일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속죄는 끝이 없다. 끝이 없어야만 한다. 한 소녀의 치기 어린 욕망이 전쟁과 그토록 밀접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원리가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역시 살아남은 자의 후회와 고백으로 기록되곤 한다. 신이 되고 싶었지만 징벌만 내릴 뿐 구원을 줄 수 없었던 브리오니. 그녀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허구의 창조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그들은 잔인하다. 하지만 신을 흉내 낼 뿐 그들은 신이 아니다. 신은 삶을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관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겸손할 줄 모르는 복 받은 자들
그의 이름은 신이 가장 사랑한 자다. ‘아마데우스(Amadeus)’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Beloved of God)’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신이 사랑한 남자 모차르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626편의 명곡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이름은 세계 어디에선가 호명된다. 영화는 신이 사랑한 오만하고 겸손할 줄 몰랐던 천재를 독살했다며 소란을 떠는 한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 남자는 감히 자신이 천재 음악가를 독살했다고 소리 지른다. 아니 고해한다.
1985년작 ‘아마데우스’는 요절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사망 전 10여 년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모차르트의 삶을 그 주변 인물 살리에르의 눈을 통해 조형했다는 점이다. 세기의 천재,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곡가와 동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평범한 음악가, 살리에르. 예술가에게 타인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탐욕은 존재의 아이러니와도 같다. 예술가는 타인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탐내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발굴하고 키워나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끝끝내 넘을 수 없는 재능의 한계 때문에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모차르트와 동시대를 산 살리에르 역시 그런 의미에서 불운한 예술가였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실존 인물의 삶을 상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으로 인해 그늘진 삶을 살아야만 했던 살리에르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아마데우스’가 불멸의 작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살리에르는 지금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을 대표한다. 우리는 살리에르처럼 평범하기에 노력해야 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1%의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런데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 그렇게 쉽게 재능을 소모하는 이들은 평범한 우리들로 하여금 상대적 결핍을 느끼게 한다. 상대적 결핍감은 우울하고 초라한 자기 발견이기도 하다. 아마데우스, 그가 재능을 화려하게 선보일수록 평범한 우리, ‘살리에르’는 안타깝게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질투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들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처절한 심리적 갈등으로 인해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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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사랑한, 이 재능 있는 사람들은 좀체 자신의 재능에 겸손할 줄 모른다. 그들은 아침이면 눈을 뜨고 갈증이 생기면 물을 마시듯 자신의 재능을 소비한다. 밤새 기다려도 오지 않는 뮤즈가 경솔한 그들에게는 무시로 인사를 건넨다. 천재의 특권인 양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 탐나는 재주를 지닌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아주 짧은 시간 탕진하고 세상과 결별한다. 그들의 빛나는 재주는 인류의 중요한 자산이지만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그늘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 재주는 탐나지만 결코 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탐내지만 탐내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더 남의 것이 탐나지 않을까? 탐나지만 탐해서는 안 되는 것, 인간다움이란 어쩌면 거기서 시작되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