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백낙청

부르주아 출신으로 가시밭길 택한 ‘민족문학론’의 대표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9-05-29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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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유한 집안 내력, 미국 유학 경험, 서울대 교수. 귀공자 백낙청의 앞날은 확실하게 보장돼 있었다. 그러나 분단된 조국을 두고 고고한 상아탑에 안주할 수 없었던 그는 계간지 ‘창비’를 창간하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후 문학과 사회과학,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허물며, 진짜 선비는 멀티플레이어임을 증명해보였다.
    백낙청
    세계적인 경제위기 국면에 남북관계마저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나라 다스리기는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국민은 지금 심란해하고 있다. 현 정부는 남은 3년9개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민주화와 통일, 평화운동에 앞장선 백낙청은 2009년을 맞으면서 ‘거버먼트(government·주로 공권력을 갖고 다스리는 ‘정부’라는 뜻으로 쓰임)’보다 넓은 의미의 ‘거버넌스(governance)’ 체계를 형성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여기서 거버넌스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나라를 이끌지 않고 사회 각 부분 세력과 협동·합의하에 국정을 협치(協治)하는 정치형태를 의미한다. 백낙청은 현 정권이 남은 기간 정교한 사회적 장치, 곧 거버넌스의 틀을 새로 짜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나라 다스리기의 새로운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민주화 20년의 성취, 아니 대한민국 60년의 성취마저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창비’ 주간논평 ‘거버넌스에 대하여’, 2008년 12월30일)

    백낙청은 대중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그리고 언론 및 여러 전문 집단, 이익단체를 포함한 시민사회가 정당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국정 참여의 길을 열 때, 경제위기며 국정 난맥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백낙청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 나라의 대표 지성이다. 그는 ‘분단체제’라는 한국의 자생적 개념을 도입,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분단이라는 리바이어던’(성경 ‘욥기’에 나오는 지상 최강의 수생 동물)을 마주하고 살았고, 그것이 어느새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차고 앉아있음을 강조했다.

    ‘2009년 분단현실의 한 성찰’(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강연)을 통해 그는 통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내면적 분열상을 예리하게 분석,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사회엔 분단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이를 자신들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데 유능한 세력이 있는가 하면, 분단 극복을 역설하며 그 목표를 위해 헌신해온 통일세력이 있다. 이 강연에서 백낙청은 진보의 이름을 내걸었으나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불철저한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백낙청은 민생과 민주주의, 남북관계에 있어 우리는 현재 ‘3중 위기’ 속에 ‘역주행’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보수와 진보의 ‘만남’을 강조했다. 그가 좌우 혹은 남북의 문제점을 모두 포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자, 종래의 그의 시점이 이동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눈총도 있었다.

    28세에 계간지 ‘창비’ 창간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존의 잣대에 얽매임 없이, 줏대 있는 중도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컨대 민주주의 문제에 있어서는 분단체제가 남한의 독자적 민주화에 부과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남북화해의 진전과 결부된 현실적인 개혁노선에 합의하며, 민생문제에서도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그 하위범주로서의 분단체제가 떠안은 조건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세계시장으로 열린 한반도 경제권의 건설과 남한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새로운 종합적 설계를 짜야 합니다.”

    2007년 고희를 맞은 백낙청이 어떤 사람인지 딱히 규정하기란 간단치 않다. 학문 전공으로 보자면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영문학자이고, 문학 활동으로 보자면 평론가로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을 창간해 이끌고 있고, 6·15공동선언 실천 남측 대표직을 맡았던 통일운동가다. 어느 것 하나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중을 따지기 어렵다.

    그중에서 ‘창비’는 그의 공부와 실천의 중심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창비’가 창간된 것은 1966년 1월. 창간호에서 백낙청은 권두논문으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발표했다. ‘창비’는 청년 지식인 백낙청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었고, 권두논문은 그의 문학적 선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8세. 132쪽에 정가 70원짜리 창간호는 문학에 대해 고민하던 이들에게 눈앞에 드리운 안개를 걷어낸 경이로운 지적 마당이었다.

    ‘창비’는 그때 무엇을 지향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백낙청은 순수문학이니 관변문학이니 하는 기성문단에 정면으로 도전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문학은 현실의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야 하며, 현실 구성원이 처한 위기를 반영해야 하며, 나아가 그 구성원 대다수의 복지를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백낙청

    1980년, ‘80년대를 맞이하여’ 좌담중인 송건호, 강만길, 백낙청, 서남동(왼쪽부터).

    동시대의 구체적인 현실을 끊임없이 민족사의 맥락 안에서 통합하고, 그때그때 현실이 요구하는 이론적 필요에 백낙청만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발표한 주요 평론집의 표제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민족문학의 현 단계’ ‘민족문학의 새로운 과제’ ‘민족문학의 새로운 고비를 맞아’ ‘오늘의 민족문학과 민족운동’ ‘지구화시대의 민족문학’ ‘분단시대의 최근 정세와 분단체제’ 등은 그의 저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백낙청의 저술을 관통하는 것은 언제나 긴장된 역사의식과 한결같은 사명의식, 그리고 당면한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당대 문학의 성취와 과제를 점검하는 자세다. 그의 글과 사색에는 굳어진 관습과 피상적인 흐름에 도전하는 전복적이고 논쟁유발적인 치열함이 내장되어 있다. 염무웅은 “그가 수도자 같은 성실함과 철저함으로 휴식 없는 자기 확장의 길을 걸어간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산 우리 모두에게 복된 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창비’가 처음 나왔을 때다. 소설가 이문구는 “낯설 수밖에 없는 가로짜기 조판인 데다가, 논문은 길고, 쉽게 정이 가는 잡지가 아니었다”는 인상기를 남겼다가 이내 ‘창비’ 진영에 합류했다. 누군가는 “중국의 혁명가 천두슈(陳獨秀)가 만들었던 ‘신청년’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고 ‘창비’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술회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창비’는 내 문학과 삶을 갈고 닦게 해준 학교”라고 ‘창비’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토로했다.

    ‘창비’가 첫선을 보이자 기성문단에서는 거의 신경질적으로 반발했다. “문단에 사회과학주의 비평을 하는 데가 있다”는 1960년대식 ‘색깔시비’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창비’는 부쩍부쩍 성장해갔고, 백낙청이라는 청년논객은 1969년 ‘시민문학론’을 발표함으로써 초기 비평의 한 시대에 획을 그었다.

    민족문학의 세계사적 사명

    당시 소시민의식과 관련된 작품이 주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민족문제라든지 역사적 현실을 이야기하면 불온시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이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거대 서사보다 세설(細說)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김승옥의 경우 감각적 문장으로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의 정신적 쇠락을 묘사, ‘감수성의 혁명’을 이루었다는 대단한 평가를 받은 시절이다.

    백낙청 문학평론의 본격적 전개는 1973년 그가 미국에서 돌아와 문단으로 복귀한 때부터 시작된다. 이 무렵부터 20여 년 동안 그의 문학적 사유는 ‘민족문학론’으로 수렴된다. 한용운 김수영 신동엽 등에서 싹터 신경림 시에서 열매를 맺은 민중성과 현대성의 독특한 결합은, 바꾸어 말하면 예술성과 운동성의 결합이라는 개념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이때 백낙청은 민족문학론의 선구적 역할을 맡으면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2) 등을 내놓았다. ‘민족문학론’은 문학전문가가 아니면 논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그 분야 전문가의 설명을 인용하면 오히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차라리 백낙청 자신이 1996년 3월24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내용 중 비교적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 다음의 대목을 인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문학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분단시대의 민족이기 때문에 반(反)분단이 핵심이 되어야 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찾으며,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참여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이 주장을 불온한 것이라고 낙인을 찍었고, 1980년에 급진적인 젊은이들로부터는 노동해방이나 민족해방 등의 기치를 내세우지 않고 어물어물 넘어간다고 해서 ‘소시민적 민족문학’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양쪽의 협공을 받은 셈이죠.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면 그동안 ‘창비’가 주장해온 민족문학론이 옳은 것으로 실증됐다고 봅니다. 문학은 민중성이나 운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되고, 어디까지나 예술성과 균형을 맞추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백낙청은 여기서 한발 나아간다. 한반도의 분단된 양쪽뿐만 아니라 한반도 바깥 세계도 한국 현실의 일부를 이룬다며 개방적이면서 세계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때때로 그는 문학론의 범위를 넘어 세계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제기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민족의 경우에는… 이러한 부당한 질서에 대해 자기방어를 해야겠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출발해서 이것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질서가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에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백낙청 회화록’ 1권 중 ‘어떻게 할 것인가’, 창비, 2007)

    이러한 발언은 백낙청의 사유 전개과정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제3세계 문학의 일원으로서 한국 민족문학의 세계사적 의의와 남다른 사명을 강조해서 나온 것이다.

    화려한 ‘창비사단’ 면면

    1990년‘민족문학과 세계문학’(3)이라는 부제를 단 ‘민족문학의 새 단계’를 펴낸 지 16년 만에 백낙청은 동명의 부제를 단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을 내놓았다. 그는 책머리에 이 평론집을 낸 것은 통일시대 한국문학에 이바지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라고 했다.

    “남북분단이 엄연히 지속되고 있는데도 벌써 통일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것은 공연한 말장난으로 들릴지 모른다. 나 자신 처음에는 ‘통일시대’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여 쓰는 소심성을 보였었다. 그 후 6·15공동선언을 지켜보고서는 ‘분단시대 겸 통일시대’라는 얼핏 보면 모순되는 표현을 내놓았다.”

    백낙청

    2005년 6·15 민족통일대축전 남측 민간대표단 단장으로 평양을 방문한 백낙청.

    계간지 ‘창비’는 백낙청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창비’는 백낙청 문학비평의 호수와 같다. 이 호수에 백낙청은 자신의 문학평론과 사회변혁론, 민족통일론 등을 채워 넣었다. ‘창비’ 호수에 합류한 문인들의 행렬은 쟁쟁했다. 김정한 이호철 고은 신경림 이문구 조태일 황석영 윤흥길 방영웅 등 지금은 문단에서 원로급인 소설가와 시인들이 ‘창비’의 날개를 더욱 높고 넓게 펼쳤다.

    여기에 인문 사회과학계의 진보적 지식인들까지 가세했다. 백낙청은 우리 사회의 각 부문에서 민주·민족·민중적인 양심세력을 끌어들이는 투망질에도 남다른 공력을 들였다. 이제 ‘창비’는 문예지 차원을 넘어 한국에서 선진적인 평론과 논문이 실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공론의 장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판 분서갱유’와 유사한 경험을 하는 등 수난의 길을 걸었다. 리영희는 ‘창비신서’로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 등으로 감옥생활까지 했고, 백낙청 자신은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 서울대에서 쫓겨났다. 강만길은 저서‘분단시대의 역사인식’으로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고, 그 밖에 수많은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1980년대 중반까지 고달픈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 ‘창비’가 없었다면 이들 ‘인텔리겐치아 백수들’의 근거지가 어디 있었을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와중에 ‘창비’는 이듬해 봄호를 준비하면서 도피 중이던 김지하의 시와 백낙청의 논문을 게재했다. 염무웅은 그때 ‘어디 칠 테면 마음껏 쳐보라’는 배짱을 부렸다. 판금(販禁)의 빌미를 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리영희의 평론이 실린 여름호는 결국 긴급조치 위반으로 판금됐고, 조태일의 ‘국토’와 ‘신동엽전집’ 등이 잇따라 서점가에서 자취를 감췄다. 양성우의 시집 제목 그대로 ‘겨울공화국’이었다. 이 시절의 백낙청에 대해 황석영은 ‘경기 야간’출신이라고 놀렸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유학까지 마치고서는 변변한 직장도 없이 실업자 노릇을 한다며 황석영이 특유의 유머를 발휘한 것이나 실상은 실천적 지식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듬뿍 담은 말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백낙청은 서울대에 복귀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창비’의 숨통을 아예 끊어버리려 했다. 1982년 김지하의 시집‘타는 목마름으로’를 창비사에서 펴내자 군사정권은 시집 전량을 압수하는가 하면 세무사찰까지 자행하고는 그것으로 모자라 ‘창비’를 폐간했다. 창비사는 부정기 간행물인 무크지(誌) 형태로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출판사 등록 자체를 취소시켜버리는 야만적 조처를 서슴지 않았다. 창비사는 ‘본명’ 대신 ‘창작사’란 반토막짜리 이름을 사용하면서, 억압과 저항이 동반상승한 1980년대를 넘겼다. ‘창비’가 복간된 것은 ‘1987년 체제’가 성립되고 난 뒤다.

    백낙청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문단에서는 ‘창비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백낙청씨는 하나의 정부다”라고까지 했다. 어떻든 그 시절 ‘창비사단’은 막강했다. 소설가 박완서는 ‘창비’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의 기쁨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처음 ‘창비’에서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일급 작가가 됐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기뻐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하는데 창비사에서 책으로 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도 다른 출판사와 비교해보는 마음 같은 것 없이 쾌히 승낙했다. 아무튼 ‘창비’가 나를 알아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사표

    백낙청이 겪은 수많은 고난을 알면 알수록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걸맞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리영희는 1991년 ‘창비’ 창간 25주년을 기념하는 글에서 백낙청에 대한 인상비평을 남겼다. “나처럼 힘겹게 살아온 사람의 눈에는 처음 만난 그 편집인은 그 창간사의 필자일 수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귀공자풍의 백면서생이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대표적 부르주아 계층이다. 내가 조금은 경멸하고 많이는 부정하는 소위 미국대학 출신이라! 그의 집안 내력과 현재 상황 또한 그가 굳이 그런 깃발을 들고 나설 아무런 이유가 없는 터였다.”

    ‘창비’ 복간 때 편집위원으로 참여, 수십년 백낙청과 가까이 지낸 최원식은 백낙청의 신언서판을 들어 자신은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면서 그를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사표로 삼았다고 했다. 최원식이 본 백낙청은 정말 잘난 모습이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관옥(冠玉) 같은 얼굴에 몸피도 알맞고 키가 후리후리해서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다. 말에서도 문어를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구어로 녹여내 듣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 데는 선생을 따를 이가 없는 최고의 고수다. 문장으로 볼 때 선생은 일류의 산문가다. 선생의 산문은 양학(洋學)을 ‘지금 이곳’의 현실주의에 맞게 탈구축 재구축한 우리 문장의 신경지다. 무엇보다 선생의 최고 덕목은 탁월한 판단력이다. 문학평론가로서 선생은 작품 맛을 보는 데 기막히게 날카롭고 섬세하다. 선생의 문학적 판단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판단과 불가분리로 맺어져 있다. 우리 앞에 닥쳐온 크고 작은 사태에 직면하여 그 고갱이를 드러내 명쾌한 대응책을 짚어내는 선생의 지혜로운 판단들에 나는 얼마나 빚지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선생은 실무 감각에도 진짜 강한 선비다. 우리가 흔히 아는, 생활에 무능한 반쪽 선비가 아니라 군자불기(君子不器), 요즘 말로 바꾸자면 ‘진짜 선비는 멀티플레이어다’쯤 될 것이다.”(‘백낙청 회화록을 말한다’에서 축약)

    평생지기이며 동지인 고은은 “백낙청은 앞에 있지만, 늘 뒤에도 있다.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 마시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했다. 고은이 보는 백낙청은 어떤 골짜기나 유역의 지식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현상과 사물을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백낙청을 알게 된 필자 역시 그를 잘 아는 분들의 인상기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 무렵 필자는 중구 저동 뒷골목의 작은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창비’를 창간호부터 사서 읽으면서 그때까지 생소했던 문학과 예술 방면에 조금씩 눈떠갔다. 그러던 중 마침 출판사 일로 그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30대 초반의 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온유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대의 청년논객에게서 풍길 법한 티 같은 게 전혀 안 보였다.

    그 시절은 출신성분을 보고 곧잘 ‘주의자’로 규정짓는 것이 이른바‘의식분자들의 세계’에서는 무슨 돌림병같이 나돌았다. 그런 눈으로 보자면 그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였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는 출신성분 따위로부터 일찌감치 독립선언을 한 지식인이었다. 유신체제의 엄혹했던 세월 동안 백낙청은 당대 지식인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뭐랄까, 그는 내공이 꽉 찬 사람, 단전에 기가 집중된 인물 같았다.

    신언서판과 180도 다른 삶

    ‘동아일보’ 1960년 11월20일자에는 백낙청의 학창시절 사진과 함께 ‘군문(軍門) 두드린 어학의 천재’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59년 6월12일자를 보면 백낙청이 미국 브라운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졸업식에서 대표연설을 하고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가 있다. ‘한국 학생의 우수성을 과시-미 대학서 우리 백낙청군이 영예의 졸업식 연설’이라는 제목 외에, ‘5개 국어를 통달-하버드대학원에 무시험 합격-여러 부분의 상도 받고’라는 표제가 보인다.

    유학 자체가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진 데다, 특권층 자제들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도미(渡美) 유학생으로서 귀국해 자원입대를 한 사실에 기자라면 의문을 제기해봄직하다. “백군이 나이 어린 13세 때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6·25동란으로 붉은 침략자들에게 강제로 납치당한 비통한 현실이 그에게 그러한 결심을 하게 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추정적으로 쓰긴 했지만 기사의 끝맺음에서는 다분히 반공적인 서사로 굴절된 느낌이 든다. 청년 백낙청이 기자에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는데 무슨 기사가 됩니까?”라고 반문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한국적 근대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백낙청은 근대에 영합, 예정된 엘리트 코스로 순항하기를 거부했다. 백낙청은 1938년 대구의 외가에서 6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대대로 평북 정주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이주했다. 부친 백봉제는 우리나라 민간 종합병원의 효시 격인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의 동생으로, 두 형제는 납북돼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법조인을 지낸 아버지 백봉제의 잦은 전근으로 백낙청은 광주와 전주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 이후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1963년, 25세에 서울대 전임강사가 됐다.

    이때부터가 중요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20대의 젊은 나이에 서울대 교수가 된 백낙청에겐 탄탄대로가 예약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을 택했다. 한국적 현실에 입각해 근대 자체를 천착하되 그 극복 방도를 모색함으로써, 세계적이고 수평적인 인식과 사고를 견지하며 한국 문단과 지식인 사회에 새벽별처럼 떠올랐다. 신언서판(身言書判)에 비춰보면 돌연변이나 다름없었다.

    영문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문학과 사회과학을 접목시킨 백낙청, 그는 당면한 현실에 충실하되 넓은 안목의 시야를 잃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그는 남북한의 상호의존을 주장하면서 ‘분단체제론’을 발표, 사회과학계에 비상한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에 나온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은 제목의 겸손함이 암시하듯, 백낙청이 삶 자체를 공부하고 깨달아가는 학문적 수행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낸다.

    분단시대 극복한 분단체제

    1998년 백낙청은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내놓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분단체제의 역사적 경로에 대한 백낙청의 관심은 한층 구체화되고 명료해진다. 분단체제의 ‘흔들림’은 분단체제 극복으로 다가가는 긍정적 계기이며 한반도의 상대적 안정성이 위협받는 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위기의 시대일수록 한반도 민중의 성숙한 대응이 필요하며 통일 자체에 대해서도 발상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함을 백낙청은 이 책에서 주장했다.

    역사학자 강만길은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대해 이런 찬사를 했다. “남북한을 각기 독자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보면서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시야에 아우르려고 노력한 이론은 내가 알기로는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밖에 없다.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하면서 분단시대 한반도의 현실을 탐구하는 이들이, 이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에서는 민족문학론의 대표 이론가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8·15 이후를 분단시대로만 보지 않고 분단체제로 이론화하는 작업이 일대 진전을 이루게 되리라.”

    김동춘은 ‘창비’ 1996년 봄호에서 분단체제론을 이렇게 해석했다. “분단현실을 분단시대라는 역사인식이나 민족모순의 틀로 해소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한국사회는 분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기보다 세계체제의 일부로서 분단체제와 그것에 의해 조성된 다양한 세력관계와 매개변수들에 의해 이중 삼중 복합적으로 규정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그러한 개념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

    분단체제라는 개념은 분단에 따른 남북한에서의 기득권 형성 및 1970년대 한국의 공업화와 계급분화, 내부에 통일 반대세력이 형성되고 있다는 남북한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분단체제론은 남북한에서 이들 기득권층의 암묵적 결탁과 미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의 현상유지적 이해관계 아래에 놓인 남북한 민중의 고통이라는 모순관계로 설명된다. 아울러 분단현상을 거시적 역사적으로 보면서, 남북한과 주변국의 정치적 대립구조와 그 타개방안을 장기적이고 단계론적으로, 그리고 현실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2000년 6·15선언 이후 백낙청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나 이와 맞물린 국가연합 등 복합국가체제에 대한 모색을 계속했다. 그는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다양한 개혁·변혁세력의 요구와 실천을 수렴해내는 중도적인 인식과 실천이야말로 한반도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방책이라고 했다. ‘변혁적 중도주의’로 표현되는 이런 노선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이중적 관점, 곧 ‘근대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극복하는’ 과제의 한반도식 실천노선이라고 하겠다.

    ‘교수신문’이 2003년 펴낸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현대 한국의 자생이론 20’에는 분단체제론에 대한 백낙청과의 서면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는 분단체제론을 구상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세 가지로 응답했다.

    “우선 1970년대 이래의 민족문학운동과 민족문학론을 특징짓는 요인은 분단현실에 대한 관심이다. 분단체제론은 이러한 운동과 논의가 진전되는 과정이 낳은 산물이다. 다음으로 1980년대의 진보적 사회과학계와 급진 운동권에서 한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여러 갈래의 노력이 있었으나, 당시 어느 담론도 민족문학 작업의 실감에 딱 들어맞지 못했다. 이것이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좀 더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보되, 어디까지나 실사구시(문학적으로 보면 그의 리얼리즘적 입장-필자 주)의 정신으로 보려는 이론적 모색의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문 사회과학도가 아닌 내가 문제제기를 하면 뜻있는 사회과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다뤄주려니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기존 사회과학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도 겸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차츰 굳어지면서 계속 이 문제에 집착하게 됐다.”

    통일운동에 직접 뛰어들다

    2005년 초 백낙청은 ‘6·15공동선언 실천 민족공동위원회’ 남측 상임대표를 맡아 통일운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 무렵부터 백낙청은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동요기가 아니라 해체기임을 자신 있게 주장하고 나섰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는 것, 앞으로 과거식 분단체제의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렇다고 반드시 바람직한 통일이 된다는 것은 아니고 시민참여형의 통일을 이룰 것인지 아닐 것인지 갈림길에 들어섰다는 것, 앞으로 10년 안에 남북이 느슨한 형태의 국가연합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리라는 것 등 다소 모험적인 주장을 하고 나섰다.

    2006년에 나온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그의 이런 인식은 더욱 진전된 윤곽을 드러낸다. 6·15공동위원회의 활동과 관련해 그는 새롭게 열린 공간에 걸맞은 새로운 통일운동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와 국면에 맞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령 6·15공동선언이 한반도식 통일의 큰 그림을 제시하고 시민 참여형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6·15공동선언 이전의 타성에 젖어 통일운동을 마치 정부를 겨냥한 운동 공간 확보를 위한 투쟁 정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며 운동권의 반성을 촉구했다.

    “어깨 힘 빼고 통일하자”

    한층 더 중요한 것은 다수 민중의 변화이며, 그 점에서 백낙청은 한결같이 낙관적이고 현실적이다. 현실에서 긍정적인 가능성의 싹을 찾아 크게 키우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삶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상주의에 대해서는 경계와 비판을 늦추지 않았다. 민중의 생활적 요구를 존중하고, 거기에 준거한 실천을 수행할 수 있을 때 통일운동도 현실적인 힘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통일은 남북 민중이 실질적으로 ‘어물어물’ 진행시키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백낙청식 ‘통일의 패러독스’다. 정권 상층부의 거창한 합의보다 “어깨에 힘 빼고 통일하자”는 그의 주장은 이상주의를 버리고 민중의 일상적 요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통일의 주춧돌을 놓자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창비’는 2006년 불혹을 맞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창비’는, 넓게는 한국사회의 공론영역 발전에, 좁게는 문학저널리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 그리고 ‘창비’의 민족문학론적 입장을 유지, 발전시킨 주역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백낙청이다. 2006년 봄호에 문학평론가 황종연이 백낙청을 도전적으로 인터뷰한 기사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가 실렸다.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을 표제로 한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4)이 주제였다. 황종연은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을 읽으면서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은 것은, 분단체제 극복을 비롯한 한반도 주민의 과제와 관련해 문학 본연의 임무를 반복해서 강조한 대목이라고 했다. 대담 말미에 황종연은 ‘창비’가 문예지와 인문사회과학계의 수준 높은 평론지를 겸업하는 것은, 문학이 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낡은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게 생동할 수 있는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백낙청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자본주의 세계체제하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생각하는 지혜로운 실천가, 쟁점이 놓여 있는 대화적 맥락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정연하게 주장을 펼쳐가는 노련한 논쟁가, 그리고 작품기법에 자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작품평가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정격(正格) 비평가를 만났다. 40년의 유례없는 역사를 이룩한 ‘창비’의 지면이 앞으로도 다른 문예지의 거울이 되리라 믿는다.”

    한반도의 분단체제 극복이 세계적 지배체제에 대한 일대 타격이라면 그것은 곧 ‘민중적’이고 ‘세계사적’인 작업이라 할 만하다.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확고한 신념의 표현이지만, 개념적으로는 유연하다. 오랜 세월 이어지고 있는 그의 민족문학론은 시대상황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그 외연을 확장, 쇄신해간 점에서 탁월한 것인지 모른다.

    백낙청, 그가 미국에 남아 있었다면 세계적 석학이 되어 천하를 종횡했을 법하다. 그런데 그는 할 일 많은 나라에 돌아와 험난한 굽이굽이를 휘돌아야 했다. 그에게 우리 사회는 나름의 상찬도 보냈다. 1987년 제2회 심산(김창숙)상, 1993년 제1회 대산문학상, 1997년 요산(김정한)문학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1년 제5회 만해(한용운)상 실천상, 2006년 제10회 늦봄(문익환)통일상 등이 수여됐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 자체가 ‘한국 지성사의 축복’이라는 평가 이상의 상이 어디 있겠는가.

    2007년 백낙청은 고희를 맞았다. ‘백낙청 회화록 간행위원회’가 설립돼 10월에 전 5권, 3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전집을 펴냈다. 이 전집은 일반적인 저술과 그 형태를 달리한다. 좌담과 대담, 토론, 인터뷰 기사 등을 모아놓은 ‘말 모음집’이다. 대화란 형식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진술하는 수사법과는 대립되는 방법으로, 예부터 진리 발견에 유용하게 쓰였다. 둘이서 혹은 여럿이 ‘모여 앉아 말하기’는 이런저런 목소리를 한판에서 같이 들을 수 있어 읽는 맛이 색다르고 얻는 효과도 생생하고 다양하게 드러나는 장점이 있다. 진술 주체의 체취와 호흡을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다. 백낙청의 비평적 세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형식상 구별되는 이 전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지적 영토를 일구었다. 백낙청이 선장이 되고 133명에 이르는 당대의 선진 지식인이 그때그때 선원(?)으로 차출되어 적극적으로 협동작업을 한 끝에 성취한 이 도도한 집단적 지식인 전기록은 한국 현대 지성사의 도도한 항해도(航海圖)라고 할 수 있다.

    ‘항상’과 ‘변통’ 속 희망 전령

    간행위원회 일원으로 참여한 임형택은 백낙청을, 문학과 사상은 물론 사회과학이나 현실문제에까지 전문가적 지식과 통찰력을 겸비한 드문 지성, 평생 공부와 실천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라고 했다. “문학을 문학이라는 상아탑 속에 가둬둘 것이 아니라 사상적 문제나 역사현실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초발심이 문학관으로 형성되어 전 생애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학관에 스스로 충실하자면 문학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철학사상에 관한 공부가 깊어야 하며, 사회현실을 논리적으로 읽고 때로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했다. 문학을 통해서 철학, 사회과학으로, 사회적 실천의 길로 진입한 그 방식은 말하자면 ‘인문입도(因文入道)라 할 것이다.”

    이론은 본래 원칙에 확고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실천은 변화하는 현장에 잘 대응해야 한다. ‘항상’과 ‘변통’, 이 상반되는 양자는 하나로 통일돼야 한다. 항상이 없는 변통은 단명하고, 변통이 없는 항상은 퇴화하게 마련이다. ‘창비’가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잡지,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은 잡지’를 기본방침으로 설정한 것은 40여 년 갖은 세상풍파를 겪으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이 땅의 지성사에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이다.

    백낙청
    윤무한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백낙청, 그는 세기 전환기에 ‘희망’을 전언(傳言)했으며, 고희 바로 얼마 전부터는 ‘분단체제론’의 실천현장에 직접 나섰다. 그는 청년시절 ‘창비’ 창간호 권두논문 말미에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고 썼다. 그때 그가 기약한 그 땅은 한반도의 통일이 들머리를 지나 현재진행형의 과정, 그리고 마침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시간표 어디쯤에 펼쳐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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