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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피도 눈물도 없는 맹수제국의 쿠데타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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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수의 권력다툼과 사랑, 질투는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진화의 어느 갈림길에서 엇갈린 사람의 그것과 닮았다. 그들의 투쟁은 힘을 가졌기에 거칠고, 꼭대기에 올라섰기에 매섭다. 마치 권력 가진 사람의 싸움처럼.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햇볕을 받아 바위는 따뜻했다. 오후는 무료했고, 흙은 자글거렸다. 비너스(암사자 ·12세)가 떠난 사파리는 평화롭다. 칸(수호랑이·3세)이 낮잠에서 깨어나 포효한다. 칸은 왕(王)의 자질을 가졌다. 스킨십에 강하다. 아래·위 맹수를 잘 다독거린다. 호랑이왕 시저(수호랑이·15세)도 이 녀석 앞에선 머뭇거린다. 녀석도 아직은 발톱을 숨겼다. 왕에게 덤비지 않는다.

칸은 백호(白虎)다. 흰털 바탕에 갈색털 줄무늬를 가졌다. 민화(民話)는 백호를 상상의 동물로 묘사한다. 백호는 서쪽을 지키는 신령(西白虎). 이 상상의 동물은 1951년 현실로 나타났다. 히말라야에서 백호 수컷을 발견한 것. 지금 살아 숨쉬는 100마리 남짓한 백호는 모두 녀석의 자손이다. 녀석은 벵골호랑이와 짝을 맺어 유전자(DNA)를 퍼뜨렸다.

비너스는 어디로 갔을까?

신록이 우거진 5월의 햇살은 눈부셨다. 수사자 레오(5세)는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 암사자보다 암호랑이를 더 좋아한다. 레오가 점찍은 녀석은 갓 암컷 태를 내기 시작한 흰비(암호랑이·2세). 마주 앉은 두 맹수의 모습이 정겹다. 레오는 7월이면‘아빠’가 된다. 3월 말 암호랑이 들호(5세)의 질에 정자를 뿌렸다. 호랑이 암컷은 110일간 새끼를 밴다.

사자집단의 왕은 여비(수사자·10세)다. 녀석은 2002년 집권했다가 이듬해 실각했다. 6년 만에 왕위를 되찾은 것. 녀석은 ‘여우’다. 실각한 뒤 발랑거리고 살랑대면서 어린 왕들의 비위를 맞췄다. 왕들은 차례로 거세됐으나 그는 지금껏 살아남았다. 바닥으로 추락했다가 되돌아온 녀석은 겸손하다. 먼저 시비 거는 법이 없다.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백호(白虎) 칸이 포효하고 있다. 녀석은 왕에 오를 자질을 갖췄다.

에버랜드 ‘와일드 사파리’엔 호랑이와 사자가 동거한다. 1976년 사자왕국으로 출발한 뒤 87년 호랑이왕국이 꾸려졌고, 92년 사자와 호랑이를 합사했다. 1만6500㎡(5000평)의 작은 초원에서 벌어지는 맹수의 권력다툼과 사랑, 질투는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사람의 그것과 얼마간 비슷하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올랐기에 매섭고, 힘을 가졌기에 거칠다.

3월27일 맹수제국에 큰 변화가 있었다. 백호왕국이 새로 들어선 것. 사람들은 갈색털 호랑이 대신 흰털 호랑이를 사파리에 넣었다. “백호가 나타나면 권력자는 몸을 낮추고 부자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고 전설은 구전한다. 민담은 “산전수전 겪은 호랑이가 세상 이치를 깨달으면 털이 희게 변한다”고 전한다. 백호왕국과 사자왕국은 전면전에 앞서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

틈이 날 때마다 사자, 호랑이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돈과 자리를 둘러싼 사람의 이전투구가 맹수의 권력다툼과 얼마나 닮았을까’라는 막연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관찰이었다. 맹수의 제왕전쟁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녀석들의 쿠데타는 실감나는 약육강식의 현장이었다. 권력 줄을 놓은 왕은 2인자가 아닌 바닥으로 추락했다.

2005년 여름, 암사자 비너스는 무서울 게 없었다. 호랑이를 두들겨 패는 게 비너스의 놀이였다. 녀석은 맹수제국의 여제(女帝)로 10년간 군림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소란스럽게 다퉜다. 비너스는 호랑이들이 버릇없이 설친다는 듯 호랑이 구역으로 향했다. 비너스를 따라 사자들이 떼로 호랑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호랑이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얼어붙은 듯 오금을 펴지 못했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수사자들의 갈기털이 곤두서자 호랑이들은 후미진 곳으로 꽁무니를 뺐다.

비너스는 가장 센 사자 수컷을 다스림으로써 ‘작은 초원’을 지배했다. 비너스의 마음을 얻은 자가 차례로 왕위(王位)에 올랐다. 비너스의 관능에 포박당한 어린 수사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고, 왕좌에 오른 어린 수사자가 늙으면 비너스에 매료된 또 다른 젊은 수사자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사자 왕국’의 왕위는 계승됐다.

2005년 초 여비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아이디(8세·수사자)의 솟구치는 양기도 비너스의 교태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아이디는 하루 종일 여제의 곁을 지켰으며 하위계급의 수사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비너스를 흠모했다.

비너스가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비겁하면서도 영특했다. 비너스는 마음에 안 드는 사자나 호랑이가 있으면 다가가 시비를 건다. 그러면 녀석의 매력에 포박당한 힘 좋은 수사자가 비너스가 눈길을 준 사자나 호랑이를 혼내준다. 폭력은 질투, 욕심에서 나오는 법. 맹수는 먹이·섹스·영역을 놓고 욕심과 질투를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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