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덕통상은 이 공단에서 신발을 만든다. 신발은 ‘1980년대 부산’을 먹여 살렸다. 부산은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세계 유명 브랜드 신발을 만들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으로 거점이 옮겨지면서 부산의 신발산업은 쇠락했다.
“1970~80년대 부산은 신발로 먹고살았죠. 가정의 소일거리도 신발이었어요.”
삼덕통상 문창섭(59) 대표는 30년 넘게 신발 밥을 먹고 있다. 주말이어서인지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은 한가해 보였다.
“부산공장엔 160명이 일합니다. 설비를 개성으로 거의 다 옮겼어요. 개성공단서 2800명이 일하죠.”
그는 5월11일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개성공단기업협의회장직을 김학권 재영솔루텍 대표에게 넘긴 것.
▼ 개성공단기업협의회장 임기가 오늘, 내일 딱 이틀 남았습니다.
“경영자 처지에선 과외일은 그만두는 게 득이죠. 명예회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남북관계가 최악일 때 회장으로 일했어요. 지난해 5월 취임했거든요. 정권이 바뀐 뒤 남북관계가 경색돼 무척 힘들었죠. 수석부회장으로 일할 때도 실무를 도맡아 처리했어요. 개성공단을 현장에서 지켜본 산증인인 셈이죠.”
개성공단은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북한은 임금 인상과 토지이용료 지급을 요구하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했으며, 현대아산 직원 Y씨를 장기간 억류하고 있다. 북한은 5월15일 개성공단 계약 무효를 선포했다. 새 법규를 못 받겠으면 철수하라는 것이다.

삼덕통상 부산공장.
“보상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기업 생명이 끝나는데. 기업인들은 공단이 폐쇄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들 전 재산을 쏟아 부었어요. 문 닫는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아요.”
▼ 애간장이 타겠습니다.
“기업인들의 몸이 말랐습니다.”
▼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악재를 만났지만 현지는 차분합니다. 생산도 원활하고요. 한국 언론 보도와 공장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이 느끼는 분위기는 달라요. 문 닫는 일 없을 거예요.”
▼ 개성공단에 처음 관심 가진 때는 언젠가요?
“2002년 현대아산이 평양을 오갈 때죠. 경제인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만 봅니다. 정부가 개성공단을 활성화한다고 발표했는데 딱 이거다 싶었어요.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로 설비를 옮기지 않으면 기업 운영이 안 되는 상황이었죠. 개성공단에 다 걸면 되겠다 싶었어요. 노동집약 산업을 운영하는데 개성만한 곳이 없거든요.”
존폐의 갈림길
현대아산과 북한이 개성공단 조성에 합의한 것은 2000년 8월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요트에서다.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요트로 부른 김 위원장이 말했다.
“결심했소이다. 개성을 줄 테니 가서 구경해보시오.”
현대아산은 개성이 아닌 해주를 원했다. ‘서해공단’이라는 이름으로 마스터플랜도 짜놨다. 그런데 북한은 신의주를 바랐다. 신의주는 현대아산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해주는 군사적으로 예민한 곳이었다.
“북한은 처음엔 나진, 선봉을 언급하다 신의주 카드를 꺼냈습니다. 윗분이 신의주를 거론했다기에 내가 직접 신의주에 갔죠. 부지는 위화도, 신의주를 아울렀는데 문제가 많았어요. 항구가 몹시 작았고 토사가 흘러 확장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에게 리포트 2개(해주, 개성)가 올라갔는데, 그 뒤 1년간 답이 없었습니다.”(김고중 전 현대아산 고문)
해주와 개성은 모두 군사적 요충. 북한으로선 둘 다 앞마당을 내주는 꼴이었다. 김 위원장은 장고 끝에 개성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현대가 요구한 해주는 북한 해군의 핵심 거점이다. 북한은 개성을 내주면서 주둔하던 군대를 후방으로 뺄 만큼 공단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개성공단을 볼모로 서울을 압박하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