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좋은 수돗물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지요. 상당수 가정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녹물이 나옵니다. 악취가 나고 부유물질이 떠다니기도 합니다. 그런 물을 누가 믿고 마시겠습니까.”
수도관 부식에 따른 오염이 수돗물 불신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이다. ㈜진행은 수(水)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 수도관에 끼어 있는 녹과 물때, 각종 세균 등을 없애는 아연이온수발생기 ‘스케일 부스터’와 물속의 오염물질은 제거하고 인체에 필요한 각종 미네랄은 발생시키는 정수기 ‘그린비’를 생산·판매한다.
그가 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0년대 초반 독일에서다. 유학 도중 우연히 들른 사업박람회장에서 녹물 제거 기술을 봤다. 유럽 각국은 도시 건설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일찍부터 수도관 오염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다각도에서 진행해왔다. 신 대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도관을 교체하거나 물속에 화학물질을 투여하지 않고 수질을 개선하는 이른바 ‘물리적 수처리’ 방식. 독일인·영국인 과학자 2명이 기술을 개발한 뒤 사업화하기 위해 박람회장에 내놓은 상태였다.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잘만 개발하면 세계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 될 것 같았다.
독일에서 만난 ‘물리적 수처리’
심 대표는 그 자리에서 이들과 손잡고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왕이면 오염물질을 제거하면서 몸에 좋은 미네랄은 강화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한·독·영 출신 세 남자는 의기투합해 연구에 몰입했다. 제품 이름은 물속의 각종 오염물질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케일 부스터(scale buster)’로 정했다.
“수도관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녹입니다. 물에 닿으면 부식하는 철의 특성상, 철 수도관은 오래지 않아 녹슬게 마련이죠. 그걸 방치하면 녹이 점점 쌓이면서 수질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관을 막아 통수기능을 떨어뜨립니다.”
녹 문제를 해결하려면 철이 더 이상 산화하지 않도록 하고, 이미 산화된 철은 물 안에 섞여들지 않게 해야 했다. 그때 떠오른 물질이 아연이다. 아연은 철보다 이온화 성향이 높다. 대형 선박의 바닥에도 부식을 막기 위해 아연을 붙인다. 신 대표와 동료들은 이 아연을 수도관에 활용하면 녹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스케일 부스터의 기본 원리는 황동관 안에 아연을 넣는 것. 이렇게 하면 황동과 아연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바닉(GALVANIC·이종금속접촉) 효과로 전기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아연이 이온화하면서 철의 부식을 막는다. 이미 생성된 녹은 아연 이온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자의 작용으로 다시 철로 환원되거나 사라진다. 황동관과 아연 결합체를 파이프 모양으로 만들어 수도관 중간에 삽입하자 6개월이 지나지 않아 녹이 사라졌다. 파이프 한 개를 넣으면 반경 10㎞의 수도관까지 깨끗해졌다.
아연은 물속의 스케일(찌꺼기)을 제거하는 구실도 했다. 일반적으로 지하수에는 칼슘 마그네슘 등이 많이 함유돼 있다. 이런 광물질은 뾰족한 침상구조로 되어있어 관벽에 잘 달라붙는다. 인체에 해를 주지는 않지만, 통수기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온화된 아연은 물속에 용해되면서 음전하 이온을 주위로 끌어당겨 음전하 이온층을 만들고, 칼슘 마그네슘 등의 양이온을 끌어당겨 이를 구형구조로 변화시켰다. 동그랗게 변한 스케일은 더 이상 벽에 붙지 않고 물을 따라 흘러갔다. 스케일이 사라지면서 수도관에 생긴 지저분한 물때와 세균도 함께 제거됐다.
스케일 부스터
“아연이 물에 녹아듦으로써 수질이 원수보다 더 좋아진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아연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주고, 미네랄이 체내에 흡수되도록 돕지요. 아연이 부족하면 머리카락과 손톱이 부서지고, 각질 주부습진 여드름 비듬 당뇨 감기 등이 생겨요.”
이 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는 성인의 경우 매일 아연 15~16mg, 7~9세 어린이는 4.5mg을 섭취하도록 권하고 있다.
스케일 부스터를 사용하면 수도관 안에서 흐르는 물속에 적당량의 아연이 녹아들게 된다.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관 내 녹과 스케일, 세균까지 완벽하게 제거하는 이 제품은 까다로운 독일기술표준협회로부터 품질인증마크(GS)를 받았다. 녹슨 수도관을 전부 교체할 필요 없이 10㎞에 한 개씩 스케일 부스터를 삽입하면 오염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은 독일 현지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신 대표는 1995년 이 장치를 특허 출원한 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97년 독일에 법인을 세웠고, 2000년 한국에 들어왔다. 함께 연구 개발에 참여한 독일·영국 과학자가 유럽을 공략하고 자신은 한국시장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나라의 수도관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시장 개척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알고 보니 198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 수도관 업체들이 난립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녹물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주겠다며 시공을 맡은 뒤 달아난 업체가 많고, 녹물이 계속 나오는데도 ‘원래보다는 나아진 것 아니냐’며 큰소리치는 곳도 있더라는 거지요. 한번은 POSCO에 갔다가 담당자로부터 ‘지금까지 녹물을 없애려고 29개 방식을 테스트했다. 한 번도 효과를 못 봤다. 나보고 당신네 제품을 또 시험해보라는 말이냐’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