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허준의 동의보감.
반면 세의(일반의)는 뛰어난 실질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기술도 비밀로 하여 전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사유재산으로 삼아 대대로 물려주며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론은 적고 실용만이 추구되는 의료행위였다. 진료형식은 주로 비방(?方)에 의지했는데 맞는 증세에 대해서만 효과가 있을 뿐 다른 기술적 변화와 진전은 없었다.
전통의학인 한의학이 소멸되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데는 유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의학상식을 잘 숙지하고 이해했다. 또 자신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건강을 보살피면서 임상과 경험 수집, 이론적 추론을 통해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저서를 집필해 널리 보급했다.
동·서양 의학의 통합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유의를 꼽으라면 많은 이가 조선시대 유성룡 선생이나 정약용 선생을 꼽는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도 참다운 유의라 할 만한 이는 있었다.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조헌영 선생이다. 그가 생전에 가졌던 공식적인 직책만 봐도 그의 존재감, 무게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공동으로 구성한 신간회 도쿄지회장,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을 역임했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제헌국회 의원으로도 참여했으며 평생을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삶에는 유학적 전통이 깊이 배어 있었다. 경북 영양군 출신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퇴계 이황 선생의 가르침을 추존해온 남인계통이었다. 인격수양과 도덕중시의 학풍을 물려받은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학습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을미 항일 의병전쟁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승기 선생이고 아버지는 조인석이다. 조헌영 선생의 아들은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이다.
조헌영 선생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한의학에 입문한 것은 30대 때였다. 자신의 저서인 ‘통속한의학원론’에서 그는 늦깎이 한의학 연구자가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한의학에 관한 저서를 쓴다는 것은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삼십이 되어서 한의학서를 처음 펴보게 된 것은 한의학이 대중의료에 가장 공헌이 많은데도 쇠퇴해가는 것이 애석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밝혔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일본유학 시절에 만난 기생이 폐결핵에 걸려 치료해주고자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조 선생은 1934년 ‘폐병치료법’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가 한의학에 매료되고 심취한 것은 가난하고 병든 민중의 삶을 외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1935년 ‘신동아’에 기고한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양의는 훌륭한 진단기계를 많이 갖추어야 하고 약품도 대규모의 설비로 제제해야 하므로 돈이 많지 않으면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한의는 약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치료도 하등의 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민중의료에 접밀불가분의 관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