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변호사 출신 꼬리표 떼고 남우주연상 한번 받고 싶다”

배우로 불리고 싶은 사나이 홍승기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9-12-07 1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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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호사 출신 꼬리표 떼고 남우주연상 한번 받고 싶다”
    • 고려대 법대 졸업, 제30회 사법시험 합격,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로스쿨 졸업, 뉴욕주 변호사시험 합격, 현재 법무법인 신우 변호사. 홍승기의 이력서 앞면이다.
    • 종이를 뒤집으면 완전히 새로운 이력이 시작된다. 한국배우협회 정회원, 연극 ‘따라지의 향연’ ‘춤추는 벌레’ ‘아트’,영화 ‘아주 특별한 변신’ ‘취화선’ ‘축제’ ‘섹스 볼란티어’ 출연….
    • 냉정한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가슴 뜨거운 배우인 그는 “언젠가 꼭 ‘대부’의 말론 브랜도 같은 역할을 맡고 싶다”고 말하는 괴짜다.
    “변호사 출신 꼬리표 떼고 남우주연상 한번 받고 싶다”
    변호사 겸 배우 홍승기(50)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유명한 변호사이되 보잘것없는 배우로 보였다. 필모그래피를 가득 채운 영화 제목을 보고 기대가 컸지만 알고 보니 그가 맡은 배역은 대부분 대사 한두 마디짜리 단역이었다. “출연작을 다시 봤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에 나왔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자 “어느 장면에서 누구 뒤에 나왔는데…”설명하려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제 딸도 잘 못 찾더라고요. 남들 눈에 보이겠어요?”

    그래도 그는 분명 배우다. 한국배우협회 정회원이고,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는 제법 비중 있는 역할도 맡았다 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구할 수가 없다. 개성 있는 걸인(乞人) 연기를 보여줬다는 ‘비디오를 보는 남자’(2002)는 서울에서 단관 개봉한 뒤 사라졌고, 2007년 생애 첫 단독 주연으로 열연한 영화 ‘섹스 볼란티어(Sex Volunteer)’는 지금껏 개봉관도 못 잡았다. 후자는 자신도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딱 한 번밖에 못 봤다.

    “작품은 아주 좋아요. 그런데 제가 주연이니 극장에 걸릴 리가 있나요.”

    그는 농담처럼 “영화가 인터넷에 무단유출이라도 돼 사람들이 좀 보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 게 무명배우의 슬픔이에요. 생업을 뒤로하고 1년을 공들여 찍었는데….”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대중 영화 감독이라는 자들은 자신을 믿지 않고, 애써 찍은 영화는 개봉이 안 되고, 연기를 향한 꿈은 포기할 수 없는데 좋은 배역은 안 들어오고…. 이날 이야기를 굳이 정리한다면 ‘간절히 배우이고 싶으나 인정받지 못하는 어느 변호사의 씁쓸한 인생’ 정도가 됐을 거다. 그런데 헤어지고 며칠 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송 기자, 지금 인터넷에 뉴스 뜬 거 봤어요?”

    활기 넘치는 목소리를 따라 그가 수화기 너머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섹스 볼란티어’ 있잖아. 그게 오늘 상파울루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어요. 감독이 신나가지고 전화를 했네. 얼른 뉴스 찾아봐요. 이게 웬일이야. 하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변호사 출신 카메오’쯤으로나 여겨지던 그에게, 그래서 못내 상처받던 그에게 이번 수상은 국제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쾌거’였다. “이제 오랜 무명 생활을 끝내고 세계적인 배우가 되시라”고 축하 인사를 건네자 그가 수화기가 깨질 듯 크게 웃었다.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일단 얼른 영화가 개봉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내가 연기한 걸 봐야지. 그래야 ‘진짜 배우’라는 걸 믿고 좋은 배역을 줄 거 아니요.”

    ‘홍변’ 대신 ‘홍배우’로 불리고 싶다는 그다운 바람이었다.

    40년 연기 인생

    ‘진짜 배우’가 되는 건 그에게 필생의 꿈이다. 변호사 겸 배우라고 얼치기 취급을 받을 때마다 논란을 잠재울 ‘한방’을 꿈꿨다. 영화판에서 ‘딴 동네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싫어 1996년 영화 ‘축제’를 촬영한 뒤 영화배우협회에 회원등록을 했고, 이듬해 미국 유학을 떠나 펜실베이니아대 로스쿨에서 문화 예술 관련 법을 공부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딴 뒤엔 귀국하자마자 충무로 배우협회에 찾아가 밀린 회비부터 냈다. 공부 마쳤으니 이제 다시 배우 일을 시작하겠다는 다짐이었다.

    ▼ 취미로 배우생활 한다는 얘기가 정말 듣기 싫은가 봅니다.

    “그럼요. 연기인생 40년인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무대에 섰어요. 변호사가 되기 전부터 이미 배우였죠.”

    ▼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겁니까.

    “대구 계성초등학교 다닐 때 MBC 전신인 영남TV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출연자를 뽑으러 왔어요. 여러 명이 같이 갔는데, 다른 애들은 다 잘리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사투리를 거의 안 썼거든요. 운이 좋았죠. 그때 지역방송 연출하던 분들은 대부분 다 연극 연출가도 같이 해서, 그 양반들이 대학극이나 성인극에서 아역 필요할 때마다 저를 불렀어요. ‘따라지의 향연’ 뻬뻬니에로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섰고, ‘춤추는 벌레’ ‘배비장전’ 같은 작품도 했지요.”

    ▼ TV에 나오고, 연극에도 자주 출연했으니 제법 유명했겠습니다.

    “대구에서 내 연배치고 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에이트픽쳐스 송병준 대표가 동갑인데, 그때부터 나를 알았다고 하대요. 인생의 황금기였어요. 수업 끝나면 늘 방송국에 갔고, 일주일에 하루씩 방송한다고 조퇴하고. 중학교 올라가면서 어린이 방송은 그만뒀지만, 본격적으로 연극 하느라 학교를 며칠씩 빠지기 일쑤였지요.”

    “변호사 출신 꼬리표 떼고 남우주연상 한번 받고 싶다”

    영화 데뷔작 ‘아주 특별한 변신’에서 손창민의 선배 변호사 역을 연기하는 ‘홍 배우’(오른쪽).

    ▼ 연기에 소질은 있었고요?

    “애들 연기라는 게 대사 암기만 잘하면 되잖아요. 제가 대사는 잘 외웠어요. 모든 배역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니까 칭찬을 많이 받았죠. 또 무엇보다 무대가 좋았습니다. 피드백이 바로 오잖아요. 내 동작 하나하나마다 반응이 달라지니까 그 느낌이 참 좋았어요.”

    ▼ 그래서 ‘이게 내 길이다’ 생각한 거군요.

    “하고 싶었죠.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직업으로 삼기엔 문제가 있어 보였어요. 연극하는 인간들이 너무 궁핍하니까. 하나같이 다음날 연탄 걱정하고 쌀값 걱정하고, 지갑엔 전당표만 수북했지요. 나한테 담배 사오라고 심부름 시키면서 담뱃값 다 안 주는 이상한 놈들도 있고.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건 학교 선생님들이었어요. 지방 연극인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대학극 하다가 교사 돼서 동호인처럼 참여하는 사람과 생존이 어려운 전업 연극인이에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뭔가 먹고 살 일은 있어야겠다. 그래, 변호사 좋다. 변호사 하면서 연극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 왜 갑자기 변호사입니까.

    “뭔지 모르지만 폼 나 보이잖아요. ‘변호사 하면서 연극하고 대학 강의도 한 강좌 정도씩 해야지’ 그랬습니다. 열세 살 때 아닙니까.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줄 아는 나이지요.”

    ▼ 부모님이 허황된 꿈 버리고 공부나 하라고 하지는 않던가요.

    “워낙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세 살 터울로 아들만 다섯 형제라 부모가 일일이 관여하기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 덕에 다들 개성대로 컸어요. 큰형은 야구선수를 했는데, 스포츠를 다 좋아해서 올림픽처럼 큰 대회가 있을 때는 라디오로 중계 듣는다고 아예 학교를 안 갔습니다. 둘째형(홍승목 주 네팔대사)은 중학교 때 벌써 음반 700장을 모을 만큼 클래식 마니아였고요. 법대를 나왔는데, 법전은 안 보고 음악대사전만 빨간 줄 쳐가며 읽는 괴짜였지요. 막내(홍승엽 댄스씨어터온 대표)는 공대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보니 무용을 하고 있데요. 대학 3학년 때 동아무용콩쿠르에 나가서 대상을 탔어요. 출전자 48명 가운데 유일한 비전공자여서 화제가 됐지요. 대략 그런 분위기였으니 저야 뭐 특별히 튀지도 않았죠. 크면서 누구한테 공부하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잘못 끼운 단추

    ‘꼬마 스타’의 삶은 그가 중2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오면서 끝났다. ‘불러주는 무대가 없고,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땅에서 그는 명동 국립극장과 엘칸토 예술극장을 드나들며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 두 극장에 걸리는 작품은 모조리 봤다. 아마추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경동고 재학 시절, 경기 서울 경복 숙명 진명고 학생들이 모인 농촌봉사서클 회원들과 ‘철부지들’을 공연한 건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국립극장에서 연극 ‘철부지들’을 보고는 대본을 사왔어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그걸 배역 수만큼 필사해 친구들한테 돌렸지요. 연말에 OB 선배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연출 겸 주연을 맡아 무대에 올렸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너는 이걸로 밥 먹고 살겠다’고 한마디씩 했지요.”

    ▼ 우쭐했겠네요.

    “그 소문이 나서 학교 서클에서도 공연 올릴 때면 저한테 연출을 부탁했습니다. 연극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야전에서 잔뼈가 굵었어요.”

    ▼ 연극영화과에 지원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어릴 때 꿈을 보세요. 제가 좀 약은 구석이 있지요. 집안 환경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 먹고살 궁리로 법대에 갔습니다. 거기서도 연극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환경이 안 됐죠.”

    ▼ 바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한 겁니까.

    “아니 그보다는 시대가 저를…(웃음). 79학번인데, 1학년 가을에 10·26이 났어요. 세상이 뒤흔들렸지요.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인간이다보니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공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고대 법대 학생회장을 하며 몇 달씩 피해 있기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형님은 외무고시에 붙어 막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 무렵 학생처에서 ‘학교 나오지 마라. 학교만 안 나오면 졸업은 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그가 고시공부를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이때의 선택은 지금도 그에게 콤플렉스로 남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거 같다고 한다.

    ▼ 어쨌든 배우의 꿈은 뒤로 밀렸겠군요.

    “마음속에는 늘 연기가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죠.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제3영상그룹’이라는 영화모임에서 신인배우 공모를 한 적이 있습니다. ‘타도 전두환’을 외치며 돌팔매질하다 그 광고 보고는 살짝 빠져나가서 접수처에 갔어요. 심사위원석에 있던 정지우 감독이 ‘배우가 되고 싶냐, 사법시험은 어쩔 거냐’고 물으시는데, 지금 이 시대에 내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싶더군요. 결국 이런저런 대화만 나누다 돌아왔지요.”

    ‘고시공부’를 핑계삼아 운동 그룹에서 빠져나온 뒤로는 연극판에 눈길을 주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빨리 시험에 붙어야 했다. 결국 제대로 된 배우가 되기 전, 변호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취미로 연기하는 얼치기 배우’ 이미지를 만들어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다”고 했다.

    소심한 선택

    ▼ 연기는 어떻게 다시 시작했습니까.

    “계속 방법을 모색했지요. 그러다 사법연수원 수료 무렵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라는 영화의 배우 모집 광고를 봤어요. 아역 시절 경력부터 현재 사법연수원생이라는 사실까지 다 적어서 이력서를 내고 오디션도 봤는데 떨어졌어요. 알고 보니 제작사 쪽에서 그 역할에 신인은 안 된다고 제동을 걸었다더군요. 결국 그 영화에는 못 들어갔는데, 당시 연출을 맡았던 이석기 감독이 다음 영화를 찍으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이혜영, 손창민 주연의 미국 올로케이션 영화 ‘아주 특별한 변신’(1994)이었다. 감독은 단발머리에 한 쪽 귀에만 귀고리를 한 채 건들거리는 날건달 강간범 역을 제안했다.

    ▼ 보수적인 법조계 분위기에서 변호사가 강간범 연기를 하는 건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겠습니다.

    “제가 영화계를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말이 나오던 시절이니까 조심스러웠지요. 그 역을 하면 변협 내부에서 징계 얘기가 나올 것 같았어요. 결국 사흘을 고민하다 감독님께 ‘인생이 너무 소란해질 듯해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신 주인공 손창민의 선배 변호사 역을 맡았지요. 평생 할 연기니까 조심스럽게 출발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잘못이었어요.”

    ▼ 영화 크레디트에 세 번째로 이름이 올라가는, 꽤 비중 있는 역할이던데요.

    “하지만 변호사가 변호사 역을 하니, 연기라기보다 무슨 특별출연같이 된 거예요. 여름, 겨울 내내 미국서 촬영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영화판 얼쩡대는 변호사가 있다는 소문만 나고, 제대로 된 연기력은 인정도 못 받고….”

    그는 이때 밋밋한 배역을 선택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 감독도 지금까지 그를 볼 때마다 “그때 강간범 역을 했어야 영화가 살고 너도 살았다”고 말한다.

    ▼ 그래도 이후 제법 많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감독들이 제 연기를 신뢰하지 않으니까 단역만 줬지요. 이듬해 정지우 감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안기부장 역할을 했고, ‘축제’‘하류인생’ 같은 임권택 감독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대표작이라고 꼽을 만한 것이 없어요. ”

    “변호사 출신 꼬리표 떼고 남우주연상 한번 받고 싶다”

    2003년 공연한 연극 ‘아트’는 홍승기에게 ‘진짜 배우’의 짜릿함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 사실 ‘취화선’에 출연했다는 말씀 듣고 그 영화를 다시 봤는데 어디 나오시는지 못 찾겠더군요.

    “장승업(최민식)한테 연회를 베풀어주는 역관이 저였는데, 이렇게 얘기 듣고 봐도 못 찾을 겁니다. 그 영화하면서 나름대로 연기 실험을 했어요. 우리나라 사극의 전형적인 톤말고 좀 일상적인 톤으로 대사를 치고 싶었죠. 그런데 초짜가 원칙을 깨려니 잘 안 되는 겁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니 제가 대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다른 데로 돌아가고,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더빙했더군요. 저는 그냥 사라진 거죠. ‘하류인생’에도 아주 짧게 나와요. 극장가서 본 친구가 ‘졸다가 네 목소리 나와서 눈떴더니 벌써 없더라’ 합디다.”

    대신 변호사로는 ‘잘나갔다’. 지금 그는 한국엔터테인먼트법학회장이고, 서울문화재단 방송작가협회 등 예술단체와 SBS프러덕션 JYP PMC 등 100여 개 제작사의 법률자문을 담당한다.

    “지금 변호사님 연기하시는 걸 보면, 유명 인사의 카메오 출연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고 하자 그가 정색을 했다.

    “아니요. 완전히 다르죠. 저는 유명세만 믿고 가볍게 출연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배역이 작을 뿐이에요.”

    그는 영화 ‘축제’를 찍을 때 얘기를 꺼냈다. 준섭(안성기)의 친구 네 명 가운데 한 명 역할을 맡아 지방에서 3주간 여관 생활을 하며 촬영했다고 한다. 상갓집에서 고스톱 칠 때 뒤에 걸리는 식으로 단체 장면에 많이 나왔다.

    “그 덕에 원로배우들과 얘기 많이 하고, 조연 단역들과 어울려 다니고…. 진짜 영화인처럼 살았습니다.”

    진짜 배우

    2002년 촬영한 저예산 영화 ‘비디오를 보는 남자’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영화의 주된 공간인 비디오가게 문을 열고 매일 “소주 사먹게 삼백 원만 주세요”라는 대사를 반복하는 거지 역을 맡았다.

    “영화사에서 저를 위해 촬영 스케줄을 주말로 조정해줬어요. 촬영지가 강원도 원주라, 주말만 되면 새벽 2시에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반복했지요. 눈길, 새벽 안개길 가리지 않고 운전하며 찍은 영화라 유난히 기억에 남습니다.”

    ▼ 그렇게 연기가 좋으면, 아예 전업 연기자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여전히 어린 시절처럼 허황돼서 그렇겠죠. 누가 저한테 ‘마음은 영화판에, 변호사는 개점휴업’이라고 그러대요. 연기에 훨씬 마음을 두고 사는 건 사실이지만, 변호사로서의 삶도 소중합니다. 문화예술 분야 전문 변호사로 경력을 쌓고, 그쪽 일을 돕는 것도 보람 있어요. 할 수만 있다면 배우와 변호사의 삶을 균형 있게, 평생토록 유지하고 싶지요. 연극 ‘아트’를 할 때는 이 오랜 꿈을 이룬 것 같아 짜릿했어요.”

    그는 2003년 배우 백종학, 박희순과 함께 연극 ‘아트’의 주연을 맡아 무대에 섰다. 작품의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등장하는, 명실상부한 주인공이었다. 오전 6시에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해 일을 본 뒤 오후엔 연습, 밤에는 공연을 했다. 새벽엔 다시 연습, 그리고 출근이었다. 하루 2~3시간도 못 자는 날이 연거푸 이어졌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연기를 하다 가끔씩 ‘이 대사는 나밖에 이렇게 못 쳐’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정말 황홀하지요.”

    ▼ 그때는 ‘진짜 배우’였군요.

    “그럼요. 제 공연 보고 어떤 베테랑 연극배우가 그러대요. 발성도, 시선도, 스텝도 뭔가 조금씩 어설픈데 그래서 매력있다고, 잘 훈련된 기성 배우의 느낌은 아니지만 그게 제 장점이라고 했어요. 연극판에서 같이 작품하자는 제안도 많이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단역만 전전하며 받은 마음의 상처가 상당부분 치유됐지요.”

    ▼ 그런데 왜 계속 작품을 안 했습니까.

    “당시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였는데, 연극을 연달아 하면 정말 일을 그만둬야할 것 같았어요. 좀 시간이 필요했지요. 그때 멤버 그대로 한 5년쯤 지나 다시 무대에 서자고 약속했는데, 그 사이 (박)희순이가 너무 떠버렸어요. 영화·드라마는 계속했지만 그렇게 폭발적인 배역은 한 번도 못했고요. 1년에 걸쳐 찍은 ‘섹스 볼란티어’는 개봉도 안 되고…. 그래도 마음은 늘 그쪽에 있으니까 문화예술단체 법률 자문 같은 걸 많이 했습니다.”

    한국의 말론 브랜도

    ▼ 우리나라 1세대 엔터테인먼트 변호사라고 불리더군요.

    “20년 가까이 이쪽에서 같이 놀고 있으니까요. 엔터테인먼트 변호사라고 하면 연예인 전속계약을 주로 하는 줄 아는데 전 그쪽 분야는 거의 안 해요. 그보다는 서울시교향악단 백남준미술관 같은 문화예술 분야 일을 주로 맡죠. 공연단체 법률자문 해주고, 해외 미술품 들여오는 일도 많이 했어요. 이쪽은 돈이 안 되니까 사람이 없고, 사람이 없다보니 제가 경쟁력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능력보다는 희소성 문제예요.”

    ▼ 어린 시절 꿈꿨던 건 변호사가 주는 생계의 안정과 배우의 유명세 아니었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둘 다 못 이뤘어요. 하지만 변호사로도 배우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성공한 인생이지요. 또 앞으로도 기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꿈은 절대 놓지 않아요.”

    ▼ 변호사와 배우 어느 쪽의 기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기자로서의 기회죠. 밋밋한 역 말고 야비한 건달 보스 같은, 정말 배우다운 역할을 언젠가는 꼭 연기하고 말겠다는(웃음). 지금도 웬만한 영화는 다 보고, 연극도 꼬박꼬박 봅니다. 기회만 오면 잘할 수 있어요.”

    ▼ 영화 보면서 그런 배역을 보면 ‘아, 저건 내 배역인데’ 하겠습니다.

    “욕심나는 건 있어요.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김영철은 정말 멋졌고, ‘우아한 인생’의 송강호도 죽여줬지요. 하지만 감히 ‘내 배역이다’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작년에 MBC 드라마 ‘궁S’에 궁중아카데미 교장 역으로 출연했는데, 촬영장에서 천호진씨를 보고 내심 놀랐어요. TV 화면에선 참 평범해 보였는데, 연기가 정말 좋더라고요. 이게 배우의 카리스마구나 느꼈습니다. 어디 가서 배우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 과외를 해서라도 대사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의 배우로서의 롤 모델은 ‘대부’의 말론 브랜도. 그런 배역만 오면 당장이라도 변호사 사무실 닫고 연기에만 몰두할 거라고 한다. 그래서 ‘섹스 볼란티어’의 수상은 그를 흥분시켰다. 지금 그는 영화 개봉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이번에 작품상을 타셨으니 다음 영화에선 남우주연상 한번 받으셔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연을 맡아야지요. 제가 법률자문 해주는 강제규필름에서 다음 작품 같이하자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대본 갖고 올 테니 마음껏 고르라는데, 아마 주요 배역은 다 빼놓고 오겠지만 그래도 기대해보려고요.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인터뷰 말미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고 묻자 그는 10분 가까이 ‘장래 희망’을 이야기했다. 언젠가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난민구호활동을 하고 싶어서 바쁜 시간을 쪼개 꾸준히 영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변호사 겸 배우라는 캐릭터를 살려 ‘래리킹라이브’같은 토크쇼도 해보고 싶단다.

    “인생의 가동 연한 마지막 10년은 학교에서 보내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예술과 법에 대해 강의하고 싶어요.”

    배우 겸 변호사 겸 교수를 꿈꾸던 열세 살 때처럼, 여전히 꿈 많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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