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찰나의 세계를 떠난 영속의 시공간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9-12-09 10:4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길이 8m가 넘는 ‘강산무진도’ 앞에 머무는 10여 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걸작 앞에 서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가 비속한 세계를 떠나 영원으로 유체이탈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영속의 시간을 빚어내고 있었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여기, 시간을 품은 거대한 공간이 있다. 공간이 거대한 까닭은 그 공간이 품은 오랜 시간의 유물이 신생의 석조 공간보다 훨씬 더 육중하기 때문이다. 공간 속에 정박한 오랜 역사의 흔적은, 전체는 물론이려니와 낱낱의 일개 원소만으로도 거대한 공간의 질량보다 무겁고 둔중한 것들이다. 저 기원전 5세기 이전의 ‘비파형 동검’, 그 청동기 유물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육중한 공간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유물이 무려 16만점에 달한다. 저 육중한 공간은 바로 이 한반도의 창세 이후 역사를 온전히 담아내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간은 단순히 거대한 것만이 아니라 심각하고 과묵한 인상으로 서 있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5번지. 국립중앙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드넓은 연못을 지나 견고한 성벽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박물관으로 다가가면 서관과 동관 사이, 천장은 있되 기둥과 벽은 없는 시원하게 뚫린 공간을 마주한다. 두 개의 건물을 잇는 지점인 동시에 박물관의 전경과 후경을 구분하는 거대한 석조 프레임 앞에 서면 누구라도 이 거대한 사각의 프레임이 제공하는 남산을 먼저 ‘관람’하게 된다. 그리고 계단을 마저 올라가면 남산과 박물관 사이, 거대한 미군기지를 또한 내려다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전시관을 향하여 몸을 돌리면 이번에는 거대한 프레임 속으로 서빙고동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온다.

    전경의 아파트 단지와 후경의 미군기지. 그 사이에 박물관이 서 있는 셈인데, 이 박물관의 거대한 프레임은 오늘날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어떠한 역사를 거쳐 이 지형 위에 형성됐는지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제 군사 요충지

    근세 이전 용산은, 도성과 한강 사이에 드넓게 펼쳐진 공간이었다. 숭례문 바깥이긴 했지만 한강 이북이므로 도성 안의 살림이나 그 밖의 밀접한 일들, 그러나 도성 안에서 치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거나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안이 숭례문 밖 용산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한강을 바탕으로 한 활발한 상공업과 군사기지의 기능이 그것이다.



    지금은 복개돼 차량이 내달리고 아시아 최대라는 전자상가가 포진한 청파로와 원효로 일대는 조선시대 만천(蔓川) 혹은 만초천(蔓草川)으로 한성부 경제생활의 근거지였다. 도성 안에 청계천이 있었고 도성 밖에 만천이 있었다.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천은 바닥이 깊었다. 저 멀리 강화만에서 비롯한 밀물의 영향까지 받아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작은 배들이 만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와 오늘의 중림동과 서소문 일대까지 농수산물이 집산해 도소매 장터를 이뤘다.

    조선시대 용산은 전국의 조운선(화물선 일종)이 몰려드는 포구였으며 조선 중기 양란 이후 저 멀리 충주 남한강에서 제물포와 강화도까지 이어지는 한강유역권을 확보해 상업을 주도한 경강상인의 본거지가 되었다. 물길을 따라 사람길이 생기는 법. ‘춘향전’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이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목. 판소리가 늘 그렇듯 이 도령은 한달음에 남원까지 직행하는 게 아니라 사설을 늘어놓으며 원행을 떠난다.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그러니까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은 지금의 도성 밖 첫머리에 있는 역원에서 말을 하나 타고 숭례문을 돌아 지금의 염천교를 지나 복개되기 전의 만천을 따라 삼각지를 거쳐 한강변의 모래톱을 지나 동자기 나루터, 곧 동작 나루터로 가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이 청파로와 원효로가 용산의 중심이었다. ‘용산’이라는 지명도 지금의 원효로 4가와 마포로 사이에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뜻한다. 고종 때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는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이 서쪽으로 뻗어나가 추모현(追慕峴·무악재)이 되고, 다시 한 산줄기가 남쪽으로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만리재)이 되어 용산(龍山)에 이른다”고 적는다. 그 고개와 언덕 아래로 물이 흘러 만천이었고 만천의 양옆으로 도성 밖의 첫 번째 경제 생활터전이 형성됐던 것이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네덜란드, 스웨덴, 인도, 페루, 호주 등 50여 명의 주한 외국 대사부부 및 가족들이 10월19일 오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 경천사 10층 석탑 등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시대의 용산은 이 일대를 우선 가리켰다. 1884년 10월(고종 21년)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한 후 용산은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 중국, 일본, 미국 등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가져온 이질적인 경제, 종교, 문화가 수렴하고 확산하는 거점이었다.

    구한말 이후 용산은 대체로 서울역에서 남영역을 거쳐 노량진으로 뻗어가는 철로의 왼쪽 편을 가리키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여단 사령부가 용산 둔지산 일대에 주둔하면서 ‘신용산(新龍山)’이란 이름을 사용했고 식민 통치 때는 아예 조선군사령부까지 설치됐다. 광복 이후에는 미8군 사령부와 우리의 육군본부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인해 유엔군 사령부까지 들어서면서 용산의 절반은 오랜 세월 군사기지의 육중한 무게를 갖게 되었다.

    남산의 동쪽에서 정남향으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하얏트호텔과 아르헨티나 대사관 등이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를 지나 이태원 고개에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오산고등학교 쪽으로 흘러내려가 한강에 이르러 단애를 형성하고 다른 한 갈래는 반포로를 따라 이촌동 쪽으로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 서쪽 갈래가 둔지산이다. 둔지산 아랫자락의 드넓은 평지가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을 시작으로 구한말의 일본군과 청군, 그리고 광복 이후 미군과 국군의 주요 본부가 설치됐던 곳이다. 한때 일본군이 진주했던 곳이라 해서 둔지산을 ‘왜둔산’이라고 불렀으며, 왜군 병영 시설의 잔영으로서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이 지금껏 남아 있다.

    역사(役事)의 중앙

    한 나라의 ‘중앙’ 박물관이라면 도심 한복판의 흔들림 없는 랜드마크인 경우가 많다. 자연스러운 역사의 과정에서 대체로 ‘중앙’ 박물관은 수도 한복판, 곧 지리적으로도 ‘중앙’에 자리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재개관 5주년이 되는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리적으로 수도의 한복판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밀려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이 용산 일대의 복잡한 도로와 시설과 역사로 인해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

    승용차를 이용해 서울역 쪽에서 찾아간다고 해보자. 서울역 앞에서 삼각지를 지나 한강대교 남단에 이르는 일반국도 제1호선 한강로(1914년 3월 경성시가지 원표 위치와 도로등급 제정 때 1등 도로로 지정된 곳)는 항상 오가는 차량이 많은데다 버스중앙차로제까지 실시되고 있다. 그 복잡한 도로의 한 갈래로 요령껏 갈아타고 용산역 방면으로 우회한 다음에야 겨우 박물관으로 이르는 비좁은 도로를 만날 수 있다. 지하철 이촌역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박물관에 다다른다. 물론 박물관에 도착하면, 그곳을 지향해 수고했던 몇십분 동안의 체증이나 답답함을 한순간에 씻어낼 만큼 광활한 공간과 창대한 시설을 마주하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박물관에 이르는 길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자 서울시는 2011년 12월 완공 목표로 지하철 4호선 이촌역과 박물관 사이에 지하보도와 무빙워크를 설치할 계획이다. 현재는 박물관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보도의 폭이 좁고 오가는 통행량이 많아서 폭 8m, 길이 240m 규모의 지하보도와 무빙워크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 계획이 진행되는 2009년의 가을, 용산가족공원과 전쟁기념관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등 세 권역의 압도적 크기, 장려한 시설, 드넓은 녹지로 인해 이제는 용산이 예전의 군사시설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군사시설의 짙은 그림자만큼은 엄연하다. 가족 단위의 나들이 풍경이 완연하게 펼쳐지지만 그 사이로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미군 병사들의 완강한 어깨 또한 여전하다.

    미군기지 이전이 완료되면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문화 시설과 녹지 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총 사업비 28조원의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프로젝트’가 본격화하면 머지않아 이 일대에서 군사기지의 면모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용산역 일대를 공항터미널, 컨벤션센터, 외국인 체류시설, 첨단 국제업무 단지로 개발할 예정이고 여기에 서울시가 추진 중인 ‘한강 르네상스’와 ‘남산 르네상스’, 그리고 중앙 정부가 소매를 걷은 ‘국가 상징거리(광화문에서 한강 노들섬 사이 7㎞ 구간)’ 조성사업이 진행되면 용산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왜군, 청군, 일본군, 미군의 군사 전략기지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최광식 중앙박물관장이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여민해락’ 특별전에서 ‘천마도 적외선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7년 6월, 용산공원 일대의 용도지역 변경조항이 삭제된 ‘용산공원 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용산 미군기지 전체가 공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용산 미군기지가 완전히 이전한 뒤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해 2015년경 1단계로 공원을 개방하고 이후에도 단계별로 공사를 진행해 광복 100주년이 되는 2045년 ‘민족공원’을 ‘완전 개장’하는 계획이 수립돼 있다. 그 한복판에, 그러니까 이 수십 년 역사(役事)의 ‘중앙’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뚝 서는 것이다.

    중세의 궁정이나 개인 호사가가 자연스럽게 과거의 유물을 모아놓는 단계를 지나 체계적으로 유물을 수집, 연구해 이를 일반에게 전시하는 근대적 박물관의 효시는 1683년 개관한 옥스퍼드대의 애슈몰린 박물관이다. 이를 시작으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 근대 유럽의 각 도시에 박물관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런던의 대영박물관(1759)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1793)은 이 시대를 대표한다.

    19세기의 박물관은 일종의 민족주의의 경연장 성격을 지닌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무려 100개가 넘는 박물관이 들어섰고 독일에서도 1876~80년에 50여 개의 박물관이 설립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슬라브주의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각축전이 된 중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의 깃발을 앞세운 민족주의의 박물관이 들어섰고 이는 유럽 이외의 대륙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남미에서는 20세기 초 여러 나라의 수도와 지방 거점 도시에 박물관이 들어섰으며 아시아에서도 1872년 일본에서 현재의 도쿄국립박물관의 시초가 되는 시설이 들어섰으며 1905년 중국 최초의 현대식 박물관인 난퉁박물관이 장쑤(江蘇)성에 개관했다. 각 나라의 박물관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공간이었다.

    우리의 박물관도 이와 같은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민족주의, 근대화, 계몽 교육 등의 여러 요소가 어울려 이제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의 최초 박물관은 1909년(순종 2년) 11월1일 창경궁이 소장하고 있던 고미술품과 고고 유물을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우리의 박물관은 수난과 응전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복제하는 힘겨운 역사를 버텨왔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의 미술관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개칭해 개관했으며 1938년에는 덕수궁 석조전 서남쪽에 이왕가미술관을 건립했다. 창경궁 제실박물관에 있던 미술품이 이곳으로 옮겨져 광복을 맞는다.

    8·15 광복 이후 한국은 1949년 옛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해 국립박물관을 개관했으며 곧 6·25 전쟁을 맞아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숨 막히는 유물 보호전을 치른다. 다급한 전세 때문에 부산대박물관과 경주국립박물관을 전전하던 유물은 정전협정이 이뤄진 다음에야 서울로 돌아온다. 이후 한동안 덕수궁 내의 미술관을 거점으로 삼다가 1972년 7·4 공동성명 직후인 7월19일 박물관의 이름에 ‘중앙’이라는 단어를 넣고 경복궁 안의 새 건물(현 국립민속박물관)로 이전한다.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해방되던 1945년의 겨울에 아직 본격적으로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임에도 급히 ‘국립박물관’이라는 기구를 만든 일이나 1972년 원래 계획했던 국립‘종합’박물관 대신 ‘중앙’이라는 단어를 넣은 일 모두 북한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의식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박물관이 서울이라는 한정된 도시에 있는 시설이 아니라 한반도의 ‘중앙’에 있는 상징적인 것임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박물관이 그저 지나간 시간대의 유물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당대의 민족성이나 정치적 의지가 총합된 공간임을 입증하는 사례다.

    이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힘겨운 여정은 계속됐다. 1986년 8월, 당시 중앙정부청사(옛 조선총독부)로 사용하던 건물을 고쳐 재개관했다가 1995년 8월 이 건물이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철거되자 이를 계기로 현재의 용산 부지에 중앙박물관을 신축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앙청이 철거된 후 경복궁 내 중앙박물관 사회교육원을 전시관으로 사용했으며, 2004년 10월부터 1년 동안은 용산에서의 재개관을 준비하고자 장기 휴관에 들어갔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용산의 새 박물관이 부지 면적 30만7227㎡(9만2936평)에 연건평 13만4270㎡(4만616평), 전시 면적 2만6781㎡(8101평) 규모로 들어선 것이다. 이 규모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이고 아시아에서는 가장 크다. 고고, 역사, 미술, 기증, 아시아 관련 문화재를 전시하는 상설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이 중심이고 그밖에도 어린이박물관과 야외전시장 및 여러 부대시설로 구성됐는데, 대략 훑어보는 데만 11시간이 걸린다. ‘국립’에 ‘중앙’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규모다.

    찰나에서 영속으로

    이 거대한 규모 속에서, 용산이라는 역사성의 지반 위에서, 우후죽순 난립하는 재개발의 마천루와 여전히 완강한 섬으로 존재하는 미군기지 사이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국립에 중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내실을 채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교차한다.

    시설이나 수장 규모에 비해 전시 기능이 취약해 더욱 보강돼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그 전시가 지나치게 대중화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다. 박물관까지 접근하고 또 전시실 안으로 자연스레 유도하는 과정은 매우 친절한 대중성을 갖춰야 하지만 실제 전시의 내용은 품격과 격식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1월3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국제포럼’에서 최광식 박물관장은 2014년까지 미군기지 이전이 예정돼 있는 서울 용산 지역 일대에 ‘용산 뮤지엄 콤플렉스’를 조성하자고 제안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주변에 민속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어린이과학관, 한글문화관을 배치해 미래지향적 문화공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계획과 제안은 그 자체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안과 계획의 공공적 원칙이다. 최근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 경제계 등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단어와 행사가 ‘비전 2020’이다. 부산시의 ‘부산발전 2020비전’, 삼성전자의 ‘비전 2020 선포’, 대한병원협회의 ‘창립 50주년 비전2020’, 한국전력기술(KOPEC)의 ‘2020 뉴비전’, 국방부의 ‘국방개혁 2020’ 등 어느 곳에서나 쉽게 들리는 이 용어 속의 계획들은 화려한 파워포인트 양식에서 막대그래프들이 지시하는 수직적인 수치로만 드러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2007년 ‘국립박물관, 비전 2020’을 발표한 바 있는데 국제경쟁력 확보와 지방박물관 운영 활성화, 아시아 중심박물관으로의 위상 확립, 남북교류 활성화 등이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이러한 목표와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의 공공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수치화한 시설 확충이나 계량화한 관람객 평가라는 일직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압도적인 면적 확장이나 총 관객 수 증가율 같은 그래프로 박물관의 ‘비전’을 정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국제포럼에 참가한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의 미카일 피오트롭스키 박물관장은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박물관의 대중화와 상업화를 경계하면서 “박물관은 디즈니랜드가 돼서는 안 된다. 박물관은 역사를 체험하고 구현하는 공간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말을 각별히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생생한 현장이 10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펼쳐졌다. 일본에서 건너온 조선 초기 유물 덕분에 그야말로 뱀의 꼬리처럼 인파가 몰려드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1909년 11월1일, 대한제국 황실이 창경궁 내의 제실박물관 소장품을 일반에게 공개한 것을 기점으로 삼아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천마총 천마도’ ‘훈민정음해례본’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강산무진도’등 빛나는 문화 유산을 특별 전시했거니와 특히 그 첫머리에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공개됨으로써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1996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조선 전기 국보전’ 이후 13년 만에 국내에서 전시된 ‘몽유도원도’를 향한 열정은 대여섯 시간씩 기나긴 줄을 서 있다가 겨우 10여초 만에 그림 앞을 떠나가야 하는 찰나밖에 허락되지 않았음에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열정에 대해 문학평론가 황현산(고려대 불문과 교수)은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고 썼다.

    그러니까 국립중앙박물관의 진정한 면모는 바로 이처럼 가치 있는 문화유산과의 진정한 접점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몽유도원도’를 향한 기나긴 행렬이 증명해준 것이다. 물론 하나의 공공시설이자 국립 기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양한 변화와 모색을 해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절대불변의 원칙은 사람들이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황현산) 같은 초월의 시간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1월의 어느 하루.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도 서서히 마무리되어가는 평일 오후에 나는 전시실의 돈후한 조명을 받고 있는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앞에 서 있었다.

    오른쪽의 근경에서 시작해 저 멀리 아스라이 번져가는 왼쪽의 후경에 이르는, 길이 8m가 넘는 조선 후기 최대의 걸작 앞에 머무는 10여 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쾌작 앞에 서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 달 전의 ‘몽유도원도’ 때는 밀려드는 인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단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 앞을 떠나가야 했으나 11월의 평일 오후, ‘강산무진도’ 앞의 행렬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장려한 그림 앞에서 머무를 수 있었는데, 그 누구도 이 행운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들 이 비속한 찰나의 세계를 떠나 영원성의 시간으로 유체이탈을 하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거대한 공간은, 바로 그와 같은 영속의 시간을 빚어내는 곳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