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는 왕조시대에 조정의 소식을 손으로 써서 전달했던 필사신문(筆寫新聞)이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정치체제에서 왕과 정부의 정책과 인사이동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식을 손으로 써서 정부의 관리와 지방의 수령들에게 전달했던 매체가 조보였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게 전했다는 점에서는 서한신문(書翰新聞)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보, 또는 ‘기별’로 통칭되었지만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보는 오늘날 민간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정부의 ‘관보(官報)’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굳이 따진다면 관보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집권세력은 정치적인 선전과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수행, 체제를 유지·강화하는 수단으로 조보를 활용했고, 피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조보가 권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지배세력과 기득권층을 비롯하여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집권세력의 생각과 움직임을 파악할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시대의 언론사상과 뉴스 전달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보의 역할을 규명하고 연구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조정의 소식을 주로 담았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조보는 오늘날 정부가 발행하는 관보에 해당한다. 체제유지를 위한 이념 전파의 구실도 수행하였다. 지배층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매체로 조보는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민간신문이 없는 시대였으므로 신문의 정보전달 기능은 지녔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없었다.
근대 신문이 처음 도입되던 무렵부터 조보와 근대 신문의 연관성에 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조보를 근대 신문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유길준은 1895년에 발행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서양의 신문도 조보와 마찬가지로 손으로 써서 돌려보다가 신문으로 발전하였다고 언급하여 조보를 신문의 기능을 가졌던 언론매체로 보았다.(유길준, ‘서유견문’, 일조각 영인 유길준전서 5, 1971, 478쪽)
1910년 1월1일자 한글판 대한매일신보(국한문판은 1월6일자) 칼럼은 선조 때 선비들이 조보를 인쇄 판매하였으나 왕이 이를 금지했던 사실을 소개했다. 조보의 인쇄 판매를 금지하고 관련자들을 잡아 가두는 바람에 조보 발행이 중단되었던 사실을 들어 “오호라, 신문은 문명 사업의 제1기관이 아닌가. 이것이 방해함만 없었으면 300년을 전래하는 큰 신문이 오늘날 대한국에 있었을진저”라면서 인쇄 판매하던 조보를 왕이 중단시켰음을 아쉬워하였다. 안재홍도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에 게재한 ‘조선신문사론’(1927년 1월5~9일, 3회)에서 선조 11년(1578)에 관보(조보)를 인행(印行)하여 팔아서 자생(資生)하다가 금지당한 것이 “우리가 아는바 조선 신문(報紙) 발행의 효시”라고 말했다. 이중화(李重華)는 1918년 1월호 ‘반도시론’에 게재한 글 ‘반도의 신문과 잡지’에서 조보를 언급하였다.
일본인 서지학자 마에마(前間恭作)의 ‘고선책보(古鮮冊譜)’(1937)에는 조보에 관한 설명은 없이 현종 초년부터 숙종 23년까지(1659~77)의 조보 40책과 헌종 기유년(1849)의 조보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1894년에 불어로 출간한 ‘한국서지(書誌·Bbliogra-phie Corenne)’에도 조보가 하나의 항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한경보(漢京報), 조보 또는 기별이라는 항목은 조보가 발행되던 당시에 외국인이 객관적으로 기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모리스 꾸랑, 이희재 역, ‘한국서지(書誌)’, 일조각, 1994).
조보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1969년 ‘조보와 경보(京報)에 관하여’(임종순)가 있었고, 그 후로 언론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도 ‘고문서 12, 관부문서 조보’(1996)를 간행하였는데, 서두에 실린 양진석(梁晉奭)의 ‘해제’도 조보에 관한 연구이다. 조보라는 제도에 관해서는 이처럼 진작부터 연구 논문이 나오고 있었다. 북한의 리철화는 ‘조선출판문화사(고대-중세)’(사회과학출판사, 1995)에 약 6쪽에 걸쳐 조보를 독립항목으로 다루었다.
이름이 지워진 북한의 ‘조보’ 연구자
조보에 관한 연구논문이 북한에서 처음 발표된 연도는 1958년이었다. 북한의 조보 연구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개설된 ‘신문학강좌’와 관련이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 개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58년 이전에 신문학강좌가 있었고, 그 과목 가운데 ‘기별’(조보)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해 10월에 출간된 ‘력사론문집’(제2집, 과학원출판사)에 실린 ‘조선신문의 원형(原型)으로서의 기별지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라는 표시가 붙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김일성종합대학에 1950년대 중반에 교과목으로 신문학강좌가 개설되었고, 조보에 관한 강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에서는 1954년에 홍익대학에 설립된 신문학과가 최초였고 이어서 1958년에는 중앙대학교에 신문학과가 설립되었다. 정식 학과는 아니었지만 신문학강좌는 서울대(1949), 연희대(1953)에도 개설된 적이 있었다. 1947년 4월에 개원한 조선신문학원(이후 서울신문학원으로 명칭 변경)은 언론인 양성을 위한 신문학 교육을 시작하여 많은 언론인을 배출했다. 6·25전쟁 전의 조선신문학원에서는 전쟁 전에 월북한 인물과 전쟁 후에 납북된 사람들도 강의를 맡았었다.
이갑섭의 기별지에 관한 연구논문이 실린 북한의 ‘력사론문집’ 제2집. 1958년에 발행되었다.
남한의 신문학은 신문의 기능을 연구하고 언론인의 소양을 갖추도록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면서 제작 실무에 관한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북한에서는 언론을 당과 정권의 조직자이자 선전선동의 도구로 규정하고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언론학 이론이 바탕을 이뤘다.
북한에서는 자체 언론이론에 따라 조보 연구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강조했다. 첫째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봉건정부는 조보를 ‘이데올로기 계급투쟁의 무기’로 활용하였다는 관점이고, 둘째 ‘근대 신문의 원형은 바로 조보(기별)’이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서 신문이 처음 발행되기 시작했을 때 외국의 신문을 이식(移植), 또는 접목(接木)하였다는 인식은 잘못이며 오래전 왕조시대에 존재했던 조보가 바로 신문의 원형이며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 근대 신문이라는 이론의 정립이 조보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이었다.
1958년 10월에 북한 과학원출판사가 발행한 ‘력사론문집’(제2집)에 실린 ‘조선신문의 원형으로서의 기별지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논문집을 출간할 때에 이미 인쇄가 되어 있던 연구자의 이름을 감추기 위해서 검은 먹으로 지운 후에 배포했다.
논문집의 체제는 페이지 상단에 논문의 제목과 필자 이름을 번갈아 게재하는 방식으로 편집되었다. 왼쪽 짝수 페이지 상단에는 논문 제목, 오른쪽 홀수 페이지 상단에는 필자의 이름을 넣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홀수 페이지 상단에 인쇄된 이름 석자를 까맣게 칠하고 배포한 것이다. 이름 위에 본문 활자 크기로 꼼꼼하게 먹칠을 해서 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도록 한 것이다.
‘기별지’ 논문은 논문집 127쪽에서 시작하여 270쪽에서 끝나므로 본문 51쪽 분량 가운데 25쪽에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조리 지웠다. 무슨 이유일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인쇄된 논문집에서 필자의 이름을 지우고 배포하는 경우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와이대학 소장본 ‘력사론문집’
이름이 지워진 논문은 하와이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력사론문집’ 제2집에서 복사된 것으로 하와이 퍼시픽 유니버시티 언론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김민정 박사가 찾아낸 자료다. 필자의 이름이 지워진 논문을 보면서 나는 필시 어떤 사람이 하와이대학 소장본 논문집에 원래는 있었던 이름을 지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알 길은 없지만, 여하튼 누군지 고의로 이름을 지웠을 것이라는 것이 처음 떠오른 추측이었다.
그래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김 박사에게 주문을 했더니 같은 논문집에 실린 5편의 논문 가운데 ‘기별지’ 논문만이 아니라 3편은 이름이 지워졌고, 2편은 그대로 이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떤 사람이 무슨 이유로 자료를 훼손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선 밝혀내야 할 가장 궁금한 사항은 하와이대학 이외의 기관에 소장된 같은 논문집에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여부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통일부 자료센터에는 1957년도에 발행된 제1집과 1961년 발행된 제5집만이 보관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옌볜대학 도서관과 일본 조총련 대학인 조선대학 도서관에는 이 자료가 있지 않을까?
다행히 중국의 옌볜대학 도서관에도 논문집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하와이대학에서 확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이름은 검은 잉크로 지워져 있었다. 일본의 조선대학에는 아쉽게도 이 논문집이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국사편찬위원회가 최근 일본에서 수집한 ‘금병동문고’에 이 ‘론문집 2집’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2008년말 일부가 정리되어 올해 처음 공개된 자료인데 하와이, 옌볜, 일본을 돌고 돌아 비로소 실물을 만져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와 같이 이 논문집에도 필자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이로써 논문집에서 필자 이름이 지워진 것이 누구 개인의 소행이 아닌 북한 당국에 의한 결정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은 왜 필자의 이름을 지운 채 논문을 발표한 것일까. 몇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 필자 이름을 인쇄했다가 지운 이유는 무엇일까.
2) 이름이 지워진 필자는 누구였을까?
3) 그 필자는 혹시 숙청되었을까?
그런데 하와이대학 소장 논문집을 다시 정밀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연필로 흐릿하게 ‘리갑섭’이라고 써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옌볜대학 소장본을 검토한 결과 거기에도 흐릿하게 리갑섭이라고 쓴 페이지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갑섭은 과연 누굴까.
이갑섭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기에 앞서 같은 논문집에 실린 필자 이름이 지워진 논문 세 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고대 력사 지리학 연구 서설 (력사연구소 고대 및 중세사연구실)
·조선신문 원형으로서의 기별지에 관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신문학강좌)
·로일전쟁 시기 미국의 극동 침략정책 (김일성종합대학 동방사강좌)
이름이 남아 있는 논문은 다음 두 편이었다.
·14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일본 해적(왜구)의 침입을 반대한 조선인민의 투쟁 (김사억)
·리조시기의 시전(市廛) (최병무)
위의 목록을 보면 필자 이름이 지워진 논문은 연구실 또는 ‘강좌’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연구로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국가기관인 연구소 또는 대학 명의로 만든 교재 성격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건 논문의 필자로 인쇄되었다가 지워진 인물 이갑섭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 이갑섭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 쓴 조보. ‘조보체’로 불리던 글씨로 주고받는 사람들끼리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갑섭과 함께 철학과를 졸업한 동기 네 명은 두 갈래로 나뉘는 운명의 길을 걸었다. 박종홍과 고형곤은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어 모교의 교수와 학술원 회원, 한국철학회 회장을 맡았다. 두 사람의 경력은 비슷했다. 이갑섭과 박치우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들은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월북했다는 이력도 동일한데 북한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월북 후의 행적은 다같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한에서 활동한 두 사람은 학계에 이름을 크게 떨친 반면에 북으로 간 두 사람은 종적이 묘연하다는 극단적인 차이점이 있다.
박종홍(1903~76)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가 이화여전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교수(1945), 서울대학 교수(1946~68),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1968), 동 대학원장,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1970)을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출됐고, 한국철학회 회장(1954), 한국사상연구회 회장(1964)을 맡았으며, 1970년 12월에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고형곤(1906~2004)은 졸업 직후 1933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동아’ 기자로 1935년 2월까지 근무했다. 그 후 연희전문 철학과 교수(1938~4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1947~59)를 지냈고, 전북대학교 총장(1959),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학술원 회원(1951~81)에 선출되었으며, 1970년부터 동국대학교 역경원(譯經院) 심사위원을 지내면서 선(禪)에 관한 연구 등 저술에 전념하였다.
박치우는 졸업 후 평양 숭실전문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철학과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1935년 9월부터 매년 3~5회 연재되는 긴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철학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담은 글이었지만 잡지 ‘조광’(1936년 1월)은 “그의 청신(淸新)한 ‘에쎄이’는 문학적인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평했다. 1938년 3월에는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문화부와 사회부에 근무했다. 대학을 떠나 신문사행을 결정한 것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연결하는 영역의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1946년에 펴낸 저서 ‘사상과 현실’ 서문에서 그는 “언제나 이 두 개 영역(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 사이에 놓여있는 소속미상의 진공지대나 혹은 양호(兩弧)접촉의 절선(切線)에서 자료와 대상을 구해 보려고 노력해온 것”이라고 썼다.
광복 후인 1946년 3월 박치우는 이태준, 김기림 등과 ‘현대일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그 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북한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창설하면서 서울의 학자들을 평양으로 비밀리에 입북시켰는데 박치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남한 내 게릴라부대인 빨치산의 정치교육을 담당한 강동정치학원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실제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태(李泰)는 저서 ‘남부군’에서 박치우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여순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180명을 유격대로 편성해서 1948년 11월 오대산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후 6개월 동안 약 600명의 유격대원이 추가로 투입됐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살되거나 도주했다. 박치우는 남과 북을 오르내리며 빨치산 정치교육에 종사하다가 오대산 부근에서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일보가 펴낸 ‘조선일보 사람들’에 실린 내용이다.(‘빨치산이 된 박치우’ ,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편, 조선일보, 2005, 414~418쪽)
이갑섭은 졸업과 동시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서울신문이 발행하던 월간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실린 ‘신문인 100인 촌평’(나절로)은 이갑섭을 “신문의 걸음마부터 조선일보에서 배워 가지고 그 사에서 주필까지 됐으니 일사쇄신(一社碎身)의 표본이 될 만하다”고 썼다.
이갑섭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아끼던 사람이었다. 경성제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32년 여름방학에 전북 선운사에 내려가 있는 이갑섭에게 방응모가 안부 편지와 함께 용돈을 보내줄 정도였다. 이갑섭은 졸업 후 곧바로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사부장, 논설위원, 정치부장을 지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다음에는 잡지 ‘조광’의 편집부장이 되었다. 사원들 대부분이 물러난 때에 그대로 남은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광복 후 조선일보 복간과 함께 주필을 맡았다. 그때까지는 조선일보와 방응모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주필 시절의 이갑섭은 ‘진보적인 정치 평론가’였다. 그리고 당시 조선일보 내의 좌익 수장 격이었다. 1930년대에는 하이네의 시를 번역해서 싣고, 학예면 ‘일일일문(一日一文)’ 란에 “봄은 확실히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박힌 심지에다 불을 질러놓고 가는 악마다”라고 토로할 정도로 문인 취향도 있었다. 이갑섭의 좌익 사상은 행동보다 학구적 수준에 머물렀던 듯하다. “겸허하고 세리(世利)라고는 거의 모르리만큼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게 그에 대한 대체적인 세평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에는 사상을 행동으로 나타내기를 강요받던 시대였고 이갑섭도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그는 홍명희가 결성한 민주독립당의 문화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나절로는 “신문인으로 기대를 갖게 하던 분이 왜 정당에 관계했을까. 송충이가 갈잎을 먹어야 쓰나”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조선신문학원에서 강의를 맡았고, 1948년 4월 신문학원 개원 1주년 기념 공개강연에서는 ‘정치와 신문’이란 제목의 강연도 했다.
이갑섭은 잠시 조선일보를 떠나 합동통신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1949년 3월 다시 조선일보 주필로 복귀했는데 6개월 후에 사상문제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1948년 11월 여순 반란사건 직후 대대적인 좌익 검거선풍이 불 때 잡혀 들어간 후 두 번째였다. 검찰에 구속된 지 두 달 후인 1949년 11월30일 그는 주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듬해에 일어난 6·25전쟁 중에 북으로 갔다. (‘전쟁 중 월북한 좌익의 수장’, 조선일보 사람들, 해방후편, 조선일보, 2005)
앞에서 살펴본 대로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동기였던 이갑섭과 박치우는 일제치하에는 조선일보에 함께 근무한 적도 있었다. 사상적으로도 북한에 동조하였던 두 사람은 월북하였다. 월북 후 이갑섭이 어떻게 되었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정서체 조보. 알아보기 쉽게 쓴 조보. 날짜 순으로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
이갑섭의 별명은 ‘마지메(眞面目)’였다. 항상 진지한 모습이라 해서 생긴 별명인데, 이갑섭은 “그게 내 일생의 표어”라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934년 ‘이심회보’(서중회 동인지)에는 옷차림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진지한 공부벌레나 철학자 비슷한 초년병 기자 이갑섭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밤낮 공부 공부로 신경이 쇠약해져 안경 도수가 깊어졌다고 한다! 씨여! 그 성심은 흠앙(欽仰)하지만 그 효과를 비관하지 않는가? 아마도 철학을 한 탓인가. 아니다. 요사이는 그래도 기자들 틈에 끼어서 외투는 발뒤꿈치까지 치렁치렁…. 제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뾰족한 상투는 없는 모양이다. 그도 사람이니 대세에야 어쩌리. 힘내라! 기대는 크니 참말 힘내시게.(조선일보 사람들, 47쪽)
학구적인 성격의 이갑섭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보에 관한 논문은 200자 원고지로 계산하면 약 300매에 달하는 긴 분량이다. 자료가 극히 한정된 상태에서 집필된 논문이었다. 그는 연구의 애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기별지의 발행 사업이 정식으로 관제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나 기타 ‘법전’들과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조차 그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며 더구나 오늘 미제 침략자들의 남반부 주둔에 의한 사료 제약 등 제 사정은 그의 연구를 더욱 곤난케 한다. 이와 같은 실정은 그의 연구를 위하여 거의 암중모색에 가까운 까닭에 극히 광범한 문헌의 섭렵이 요구되며 동시에 이렇게 수집된 단편적인 자료들을 분석하고 호상 련결시키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력사론문집, 220쪽)
홍기문. 북한에서 이조실록의 번역 총책임을 맡았다.
이갑섭은 논문에서 첫째 기별지는 어떤 계급에 의하여 어떤 사회적 근거로 언제부터 발생하였으며 언제까지 존속하였는가(1절), 둘째 기별지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무슨 목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어떤 계급에 복무하였는가(2절), 셋째 뉴스 수집으로부터 기별지의 발행 및 배포에 이르기까지 기별지의 발행 사업이 어떤 기관에 의하여 어떻게 조직, 진행되었으며 또 어떤 계층을 독자로 했는가(3절), 넷째 맺는말의 순서로 고찰하였다.
그는 조보에 대해 ‘이조 봉건 정부가 창시했거나 또는 유용하게 리용한’ 기별지가 조선 신문의 원형이라고 말하고 “지배 계급이 당시의 착취 제도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한 개 보조적 수단으로서 기별지를 창시 또는 리용함으로써 신문의 기원을 열어 놓았거나 그것을 보다 유용하게 리용하였다”고 주장했다.(론문집, 222~223쪽, 225쪽) 그는 되풀이해서 이렇게 강조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 신문의 원형인 기별지는 봉건 지배층, 더 정확히는 봉건 정부 자신의 손에 의하여 봉건적 중앙 집권제를 일층 강화하던 시기에 그의 보조적 수단으로서 산생되였거나 또는 그의 리용성을 높인 것이였다.(론문집, 226쪽)
기별지를 우리 근대 신문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와 기별이 지녔던 기능에 관해서 이갑섭이 주장하는 내용의 타당성 여부는 논의할 여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갑섭의 논문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 종사했던 그의 경력이 어우러져 작성된 깊이 있는 학문적 성과로 평가함에 부족함이 없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 북한의 학술논문은 김일성 우상화의 포로가 되어 학문적인 순수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실증적인 자료를 토대로 객관적인 관점에서 사실을 규명하는 연구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김일성-김정일을 우상화하는 풍조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갑섭의 기별지 연구는 1960년대 이후 북한에서 발표되는 논문에 비해서 학문적인 독립성이 후퇴하지 않은 논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방대한 실록과 문헌을 섭렵하여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를 다룬 논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돋보인다.
그러면 이갑섭은 북한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기에 이 연구를 수행하였을까. 일단 김일성대학에서 신문학이나 그가 전공했던 철학을 강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일성대학의 신문학 강좌 과목이었던 조보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던 것이 그 근거다. 그의 동기들이 모두 대학교수였으므로 그도 교수의 자격은 충분했다. 남한의 조선신문학원에서 강의했던 경력도 있었다. 그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실록을 상세히 읽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록의 내용을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은 1995년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번역된 실록의 내용을 검색하는 방법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 북한에서 실록의 영인본을 보고 논문을 쓰려면 훨씬 힘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북한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이조실록의 국역에 착수했다. 김일성의 교시를 받들어 번역에 착수하였다는 실록의 번역본 첫 권이 출간된 때는 1975년 10월이었다. 그리고 1991년 10월에 고종과 순종실록까지 완간을 마쳤다. 이갑섭도 혹시 실록의 번역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번역사업이 끝나면서 밝힌 ‘리조실록 번역 편찬성원’ 명단에 이갑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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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은 홍기문(원사, 박사, 교수)이 맡았다. 번역성원(58명), 교열성원(22명), 심사성원(6명), 편집성원(14명), 교정성원(25명), 편성 및 발행성원(10명)으로 구성된 여러 ‘성원’ 가운데는 박사, 준박사, 교수, 부교수 등이 많았다. 그러나 이갑섭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총책임 홍기문(洪起文·1903~?)은 소설가 홍명희의 아들이다. 니혼대학(日本大學) 졸업 후 1935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았다가 1937년 9월 논설위원, 1938년 학예부장 겸 사업부장을 역임했다. 광복 직후 1945년 11월 서울신문 고문, 주필 겸 편집국장, 감사를 거쳤고, 1946년 11월부터 1948년까지 합동통신 전무와 취체역을 맡았다가 1948년 11월 다시 조선일보로 가서 전무이사 재임 후에 월북했다. 국어학자로서 신라 향가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교수, 사회과학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요직을 맡았다. 이갑섭과는 조선일보 재직시에 인연도 있었지만 북한에서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없다. 이갑섭은 애써 집필한 독창적 연구 논문을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지 못한 채 그 후 행적이 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