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고승철의 읽으며 생각하기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2/2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으리라 걱정하면 유난히 밤잠을 설치고, 어느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 예금자들의 인출 러시가 벌어져 실제로 은행이 문을 닫는다. 이런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징크스(Jinx)는 고대 그리스에서 마술에 쓰이던 새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불길한 조짐을 뜻한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유독 징크스가 많다. 심리 요인이 적잖게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골프계의 거목인 잭 니클라우스는 1센트짜리 동전 3개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페어웨이를 걸어갈 때 이 동전을 만지작거리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한다. 박세리 선수는 달걀을 먹지 않는다는데 달걀이 깨지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생들은 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고 학교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의 발을 만지곤 한다. 이런 행동들은 일종의 미신이다. 미신이란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신념 체계다.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신념은 ‘믿음’ 또는 ‘종교’라 불린다. 그러나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어떤 기독교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성경책을 펴고 눈에 들어오는 아무 구절이나 보면서, 마치 계시처럼 신이 그 구절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인도한다고 믿는다”면서 “비신자가 볼 때 이런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떤가. 흔히 내가 믿으면 합리성을 띤 신앙이요, 남이 좇으면 미신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원시인의 주술은 모두 미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저명한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원시인 주술을 분석한 끝에 ‘유사(類似)법칙’과 ‘접촉법칙’을 주장했다. 유사법칙은 누군가를 저주할 때 그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면 실제 사람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것을 일컫는다. 궁중 비화나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에서 이런 사례를 흔히 접한다. 임산부가 닭고기를 먹으면 아기 피부가 닭살처럼 된다고 믿는 것이나 해구신을 먹으면 정력이 세진다고 믿는 것도 같은 원리다. 접촉법칙은 탯줄과 태반은 분리되더라도 여전히 상호작용을 하므로 탯줄과 태반을 훼손하면 재난을 당한다고 믿는 것과 같은 심리상태를 말한다.

대통령과 사주가 같은 노숙자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사주(四柱) 명리학은 수천 년 동안 동양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해왔다. 예를 들어 사주에 화(火) 기운이 많은 사람은 열정적인 성품을 가졌다는 식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목, 화, 토, 금, 수 등 오행의 기운을 받기 때문이란다. 우주가 음양과 오행의 기운으로 구성됐으므로 인간이 이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프레이저의 유사법칙과 접촉법칙이 함께 작용함을 보여준다.

토정 이지함(1517~78)이 쓴 운세 예언서 ‘토정비결’의 첫 문장은 ‘동풍에 얼음이 풀리니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나도다’라고 시작한다. 은유적 표현이 대부분이어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인간사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 중세기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현상도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가 한때 유행했다. 이 때문에 B형 남성은 바람둥이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일본인 호사가가 장삿속으로 유포했다는 게 정설이다.

운명학이 뚜렷한 합리적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언젠가 한국의 어느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대통령과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을 찾아냈는데 그는 노숙자였다. 그 프로그램은 운명론이 허구라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사주가 같은 사람을 찾아 공동 운명을 발견하려는 것은 하늘이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었고 하늘이 있기에 선하게 살려고 했다”면서 “오늘날 TV 프로그램에서 동일 사주를 찾는 이유는 운명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풀이했다. 인간의 성패를 가름하는 대표적인 잣대는 연봉과 같은 자본주의적 요소라는 것. 저자는 운명론의 긍정적 측면은 인간이 천명을 깨달아 도덕적으로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사주명리학에 따르면 태어난 연, 월, 일, 시 등 사주의 4대 구성요소 가운데 날짜가 가장 중시된다. 이를 일간(日干)이라 한다. 목(木) 기운 가운데서도 갑목(甲木)을 띤 날에 태어난 사람은 우뚝 솟은 나무처럼 조직의 리더가 되려는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아기가 출생 직후 처음 숨을 들이쉴 때 받아들인 우주의 기운이 운명을 결정짓는 데 중요하다고 한다. 인간은 우주의 여러 기운이 조합돼 탄생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고급승용차도 비포장도로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소형차도 잘 정비해서 좋은 도로를 달리면 매끄럽게 굴러간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게 우주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신동아 2009년 12월호

2/2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목록 닫기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