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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23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무한 신뢰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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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던 정 회장이 부부동반 만찬을 열었을 때, 만찬장 구석에 수수한 한복 차림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변 여사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 회장이 나타나 아내를 안내할 때에야 비로소 참석자들이 황황히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천만원도 쓸 사람”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고희를 맞은 1985년 부인(변중석)과 함께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

그렇다고 변 여사가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생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가끔 회장님이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었으니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세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대답하죠. ‘걱정 마세요. 당신이 쌀 한 가마니를 누구에게 주라고 시키면 나는 두 가마니를 주는 사람입니다.’”

변 여사는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잘 못 깎는다는 그는 부산 피난 시절, 거리에서 포도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다보니 이익은커녕 밑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부러운 게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러운 거 하나도 없지요. 난 욕심이 없어요. 회장님은 ‘우리 몽구 어멈(정 회장이 변 여사를 부르던 호칭)은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을 줘도 하루에 다 쓸 거다’ 하세요. 사실 내가 그래요. 누가 와서 돈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요. 그래서 (회장님은) 나한테다 돈을 전혀 맡기질 않아요.”

인정이 많았던 변 여사는 1년에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아원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재벌가 아내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돈도 남편 주머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것이었다.

변 여사는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저금통장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액수야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받는 며느리들 마음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재벌가 식구가 되어 사치를 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리라. 변 여사는 또 며느리들에게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해야 하며,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매년 새해 아침에 한복을 한 벌 씩 지어 입히는 자상한 시어머니였다.

변 여사의 마음 씀씀이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남편이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으면서 집도 이곳으로 옮겨가자 밤샘하는 공장직원들의 밤참을 해다 먹였다. 나중에 현대의 규모가 커졌을 때는 직원식당 주방장을 자처하며 구내식당을 책임졌다. 현대사옥이 무교동에 있었던 시절, 변 여사가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있어서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는 직원이 드물었다고 한다. 변 여사는 1991년 병원에 장기입원하기 전까지 매년 메주를 쑤어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아예 경기도 덕소에 메주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했다. 남편의 기업이 커질 때마다 메주 수가 늘어났다.

얼굴 한 번 안 보고 결혼

변 여사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옥마리라는 곳이다. 정 회장 집과 2㎞쯤 떨어져 있는데, 결혼 전에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변 여사는 그 시절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계집애’라는 이유로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과 교회 야학을 통해 한문과 언문을 깨쳤다.

양쪽 집안 간에 다리를 놓은 이는 변 여사 친정과 한동네에 살았던 정 회장의 넷째 숙부다. 성품이 곱고 후덕한 변 여사를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조카 정주영이 결혼적령기에 이르자 맞선을 주선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23일 밤 변 여사 집에서 처음 대면했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총각의 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리는 것 아닌가. 사내는 놀라 얼굴을 감춘 소녀를 힐끗 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지만 그 시절엔 그렇게 이미 양가 친척들이 사돈을 맺자고 약속한 사이라면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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