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예술가의 개성 존중하고 세계적인 안무가 키우겠다”

  • 박은경│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10-09-30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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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월, 우리 무용계의 오랜 소원이 해결됐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설립된 것.
    • 초대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무용가 홍승엽씨는 춤만큼이나 파격적인 삶으로 유명하다.
    • 스물이 넘은 나이에 평범한 공학도에서 무용가로 변신했고, 입문 2년 만에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 1993년 민간 최초의 전문 무용단인 ‘댄스 시어터 온’을 창단해 직업 무용가 단체의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무용 공연 심사를 비디오로 하는 관행을 비난하며 2004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 무용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를 만났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2000년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에서 공연된 홍승엽 감독의 대표작 ‘달 보는 개’.



    8월17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재단법인 국립현대무용단(이사장 김화숙) 설립 기념식이 열렸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육완순, 박명숙 교수 등 원로 현대무용가와 신진 무용가들이 참석해 퍼포먼스 형식으로 진행된 기념식은 시종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국립 무용단체 창단은 현대무용계의 숙원이었던 터라 참석자 중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날 무용단 설립 기념공연으로 자신의 신작 ‘벽오금학’ 하이라이트 부분을 선보인 홍승엽(48) 초대 예술감독은 백지에서 출발해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기초를 튼튼히 세워 올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떠안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의미 있는 자리를 맡았다고 생각하지만 압박감은 크지 않다. 전부터 우리나라의 직업 무용단체가 활성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름대로 구상해왔다. 1993년 ‘댄스 시어터 온’을 창단한 뒤 이에 관한 실험도 오랜 기간 계속해왔다. 자리부터 덜컥 받아놓고 허둥대는 그런 상황은 아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대표가 따로 없다. 홍 감독의 타이틀은 ‘예술감독’이지만 그는 재단 대표이자 단장, 안무자 역할까지 1인3역을 해내야 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우리나라 현대무용계의 중심이 돼 어떤 비전을 갖고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것이 단장의 역할이라면 안무자는 말 그대로 작품 창작 활동에 전념해야 한다. 예술감독은 자기 작품뿐 아니라 무용단 내의 여러 작품에 골고루 관여하며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자리다.



    홍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 운영의 3대 원칙으로 안무가 육성, 지방 공연, 해외시장 진출을 꼽았다. 이를 바탕에 두고 세부 운영은 기존의 무용단체들과 다르게 할 생각이다. 한 번에 한 작품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별로 여러 팀을 운영하면서 여러 작품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공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프로젝트별로 작품 성격에 맞는 안무가를 선정하고 안무가가 필요한 무용수를 직접 뽑도록 할 생각이다. 따라서 국립현대무용단에는 정식 단원이 없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을 만들면서 미리 정해놓은 방침이었고 홍 감독이 예전부터 생각해온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단원 없는 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프로젝트에 따라 내가 직접 안무하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또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안무가들에게 맡기는 작품도 있을 수 있다. 안무가를 선정할 때는 얼마나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색깔의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게다. 현대무용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다양성을 키우기 위해서다. 일단 작품을 맡기고 나면 안무가가 자기 작품 색깔에 맞는 무용수를 선발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간섭을 최대한 줄이고 작가주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정식 단원을 두지 않는 이유에 대해 홍 대표는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춰야 하는 무용수에게서 신선한 창의성이 나와야 하는데 고정된 멤버로 무용단의 틀과 색깔이 잡혀 있으면 다양함과 신선함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연륜 있고 실력이 좋다고 무용수들을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다. 대신 프로젝트별 안무가와 소통이 잘 되고 작품의 의미를 무대에서 잘 표현할 능력이 있는 무용수는 연속 계약에 들어가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현대무용계는 그의 새로운 시도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분위기다. ‘무용수 선발에 객관적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국립 무용단체라면 정단원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홍 감독은 작품의 다양성과 창의성, 풍부한 레퍼토리를 축적하기 위해 프로젝트별 운영에 더 중점을 둔다. 의견이 다른 부분은 상대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면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전에 충분히 의견을 나눠 조율할 생각이다. 내가 독불장군도 아니고 국립현대무용단은 나를 위한 무용단체가 아니지 않으냐. 최대한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미처 놓친 부분을 볼 수도 있으니 여러 사람 얘기를 들어볼 생각이다. 사실 공연의 기본이 소통이다. 내가 가진 생각, 내 마음을 다른 사람도 함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지방 공연 활성화에 대해서도 그는 신념을 갖고 있다. 지방 공연을 많이 다녀 서울과 지방 간 문화 격차를 줄여나가고, 한발 나아가 각 지자체가 자체 무용단을 만들어 문화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게 홍 감독의 목표다. 그에 따르면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규모가 큰 발레단 같은 무용단체를 만드는 건 인력 선발이나 비용 면에서 쉽지 않다. 반면 현대무용단은 발레단 규모의 3분의 1 정도면 충분히 창조적인 단체를 만들 수 있다.

    “이미 지자체마다 좋은 문화공연시설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지자체 무용단 운영에 필요한 인력과 레퍼토리 공급은 우리 무용단에서 얼마든지 지원해줄 수 있다. 만약 지금 지자체가 현대무용단 설립을 선점한다면 홍보효과도 클 것이다.”

    지방 공연, 해외 진출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8월17일 열린 국립현대무용단 설립 기념식. 현대무용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축제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실 문화를 즐기는 국내 관객 사이에 현대무용은 낯설고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퍼져 있다. 그런 까닭에 공연장을 찾는 사람도 많지 않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세 번째 운영 원칙, 해외시장 진출은 우리 현대무용을 세계에 알리면서 동시에 국내 관객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다. 홍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이 해외에서 화제가 되면 국내 관객의 시선이 자연스레 쏠릴 것 아닌가. 국내 관객을 안심시키는 차원에서 해외시장 진출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직 현대무용에 대한 국내 관객의 경험이 많지 않으니까 어떤 작품이 좋은지 잘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작품이라면 궁금증을 가지고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작품에 대한 이해는 잘 안되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다, 뭔가 다른 것 같다며 관객이 현대무용에 대해 오픈마인드가 될 수 있다.”

    그 결과 국내에 현대무용 시장이 만들어지면 대한민국 문화콘텐츠가 풍부해질 것이고, 나아가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현대무용수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무용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될 것이다. 현대무용의 저변을 넓혀 우리나라 문화를 전체적으로 함께 끌어올리는 것이 홍 감독의 목표다. 한 걸음 나아가 국내 예술시장 전반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홍 감독은 경희대 섬유공학과 81학번으로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무용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무용에 대해 아예 몰랐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지금 하는 공부로 평생을 살 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열정을 쏟아 평생 매달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건 음악이나 미술이었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형편 때문에 시도를 못했다. 말을 꺼냈다가 부모에게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핀잔만 들었다. 무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첫마디도 “그게 돈이 얼마나 드는데”였다. 대구 출신으로 보수적인 어른 눈에 아들이 무용을 한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들렸을 게다.

    6개월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수업도 등한시한 채 진로를 고민하느라 살이 쭉 빠진 그는 어쨌든 춤을 추기로 결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춤꾼한테는 주체할 수 없는 몸 안의 진동이 있다. 언제든 신체를 통해 터져 나오려는 폭발적 에너지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걸 풀고 싶은 요즘 아이들은 비보이(B-boy)가 되기도 한다. 홍 감독은 고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단순히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몸으로 음악을 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진동

    “무용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성향에 따라 무용의 색깔이 확연히 달라진다. 특정 음악이 모든 무용가에게 자극을 주는 건 아니다. 각자 성향에 따라 어떤 음악은 듣는 순간 몸에 뭔가 꽉 차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음악이 몸에 가득 차서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미니멀리즘 클래식을 추구하는 마이클 리만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의 음악을 들으면 음악과 내 몸이 하나가 되면서 하모니를 만든다. 그런 감응과 움직임이 자꾸 몸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결국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내 안에 있었던 셈이다. 어떤 선택을 할 때 결과를 상정하고 후회를 할까 안 할까를 기준으로 삼는 편이다. 무용은 후회를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해서 무용을 해도 요즘은 라면이 잘 나오니까 굶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길로 경희대 무용과 학과장을 찾아가 전과(轉科)를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는 졸업정원제가 있어 학과를 옮기는 게 불가능했다. 대학을 마칠 때까지 전공 선택과목 대신 무용이론 같은 과목들을 수강하며 무용을 익히고 졸업 뒤 경희대 대학원 무용학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실기는 무용과 박명숙 교수를 찾아가 배웠다. 당장 연습실에서 연습하라는 말에 가봤더니 남학생은 한 명도 없고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은 여학생들만 다리를 죽죽 뻗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연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학생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 중앙대 전화번호를 알았다. 그곳에서 겨우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4개월 정도 지나 여자무용수들에게 웬만큼 적응할 무렵 다시 경희대 무용과 연습실로 돌아왔다. 아들이 무용수가 되는 걸 극구 반대했던 어머니가 그를 인정한 건 무용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1984년,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고서였다. 그로부터 2년 뒤 대한민국무용제(현 서울무용제)에서 연기상을 받았고 한 달 정도 유럽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낯선 곳에 자신을 내던진다는 심정으로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그곳에서 혹독한 경험을 했다. 독일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린 것. 그가 묵은 유스호스텔은 며칠을 머물든 매일 아침 짐을 챙겨 퇴실했다 저녁이 되면 다시 입실하는 시스템이었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어지러운 상태에서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그대로 고꾸라져 죽어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시체로 누워 있다 해도 그 사람들한테 나는 그냥 동양인 하나가 쓰러져 자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누구든 무슨 일을 하고 살았든 그들 눈에는 아무런 존재도 아닌 것 같은 느낌, 내 존재 가치가 아주 하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공부를 많이 했다.”

    춤꾼, 안무가, 행정가

    무용가이자 안무가로 홍 감독의 삶은 치열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각종 공연으로 무대에 서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시간이 지나가자 어느 순간부터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느껴졌다. 무용수는 물론이고 현대무용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대부분 여자여서 딱히 보고 배울 사람도, 제대로 춤을 가르쳐줄 스승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 무대에 오르다보니 더 이상 실력도 늘지 않고 발전이 없는 것 같았다.

    “여선생님은 남자의 움직임이나 감성을 모르니까 어떤 선생님은 새로 작품을 만들면 내 동작은 이렇게저렇게 알아서 진행해보라는 식이었다. 남자 군무(群舞)가 있으면 그 부분은 안무를 직접 짜서 선생님께 점검을 받았다. 덕분에 일찍부터 안무가의 소질이 개발된 것 같다.”

    무용수로 자신의 몸을 더 정밀하게 알려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하기도 했다. 발레단에 들어간 데는 프로 무용단체들의 시스템을 배우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장차 직업 무용단체를 만들어 국제적인 활동을 하려면 국제 무용계에서 통하는 룰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발레단에서의 생활은 수모에 가까웠다. 현대무용계에서는 찾는 사람도 많고 주역을 도맡아 왕자처럼 지냈지만 발레단에서 주역은 고사하고 군무를 할 때조차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발레 전공자가 아니면서 뮤지컬 출연을 위해 잠깐 발레단을 거쳐 가는 남자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을 자신과의 싸움으로 보냈다.

    발레단을 나와 한 달 정도 스웨덴에 머물며 현지 무대에 서는 경험을 했다. 지금은 작고한 유명 안무가 비르기트 쿨베르의 초청으로 그의 작품에 객원무용수로 참가한 것이다. 공연이 끝나자 쿨베르는 평소 홍 감독이 들어가고 싶어 했던 해외 무용단체 세 곳에 그를 추천해주었다.

    “더 많은 외국단체에서 활동하려고 접촉하던 중 문득 꽝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 빨리 한국에 들어가 무용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뒤로 해외 무용단체는 뒤도 안돌아보고 국내에 들어와 몇몇 사람을 규합해서 1993년 댄스 시어터 온을 창단했다.”

    이듬해 창단공연 작품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렸다. 공연기간은 이틀이었지만 무대 설치와 리허설을 위해 일주일간 극장을 대관했다. 당시 현대무용 단체를 가진 개인이 토월극장 같은 큰 무대를 빌리기 쉽지 않았다. 대관이 어렵기도 했지만 형편에 비춰 대관료가 비쌌기 때문이다. 그 일을 두고 몇몇 무용인이 뒤에서 “돈 많네”라며 비아냥댔다. 하지만 홍 감독에게 6일은 꼭 필요한 기간이었다.

    “연습실에서 몇 개월씩 죽어라 땀 흘려 연습해놓고 정작 공연무대에서 엉성한 작품을 보여주긴 싫었다.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공연무대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을 하고 싶었다. 경력란을 한 칸 더 채우기 위해 공연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그런 무용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댄스 시어터 온 창단공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CF에도 출연했다. 유명 개그맨이 창업해 화제가 됐던 속옷 브랜드의 텔레비전 광고였다. 론칭 광고 때부터 출연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하던 터였다. 또다시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창단공연 비용을 마련하라는 계시인가 보다’하고 응했다. 광고모델료로 받은 돈은 1100여만원. 창단공연에 필요한 비용과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졌다.

    무용계에서 홍 감독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독자행보’‘반골기질’이다. 문예진흥원이 주관하는 ‘2004 올해의 예술상’ 무용분야 수상거부는 무용계가 시끌시끌할 정도로 논란이 됐다. 그가 수상을 거부한 이유는 심사과정에서 절차와 원칙이 무시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용작품은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돼서 그 에너지를 공감하고 느끼는 현장예술이다. 그런데 예심도 아닌 최종심사까지 공연장에서 작품을 직접 보지 않고 비디오 심사로 대체했다. 그건 텔레비전을 통해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과 아프리카 사파리를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또 심사위원 중에는 심사 대상 작품을 이미 공연장에서 본 경우도 있었을 거고 심사 때문에 비디오로만 본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동일한 조건하에서 심사해야 하는 기준이 깨진다. 전체 심사 과정에서 비디오로 최종 심사를 대신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

    정당한 절차와 과정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그럼에도 뭐가 문제냐는 태도에 홍 감독은 더욱 실망했다. 그의 수상 거부 파동으로 몇 년 뒤 그 상이 폐지되자 “쟤 때문에 예술계에 돌아올 많은 예산이 없어져서 그 혜택을 우리도 못 받는다”는 뒷말이 돌았다. 홍 감독은 예술계에 많은 돈을 끌어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어떤 일을 순차적으로 해나가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이라고 여긴다. 이후 무용계에서는 작품을 심사할 때 신중하게 절차를 거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홍 감독은 개인적인 불이익을 겪기도 했지만 잘못된 관행이 바뀐 걸로 만족한다.

    “그 후로도 나는 계속 무용계에 남아 무용을 할 거니까.”

    1990년대 중반 서울무용제에 참가하는 단체에는 700여만원의 지원금이 나왔다. 홍 감독은 자신의 레퍼토리를 확보하기 위해 무용제에 참가했다. 계속 자비(自費)를 들여 무용단을 이끌고 작품을 공연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원금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용수들에게 줄 최소한의 개런티를 따로 빼놓는 것이었다. 나머지 돈으로 음악과 미술, 의상을 전부 해결하려면 최대한 절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의상을 마련하기 위해 의상담당자와 함께 청계천을 누비며 천을 사다 옷을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한 벌 만들 비용으로 11벌의 무대의상을 만들기도 했다. 주위에서 “지원금을 줬더니 쟤는 그것만 다 썼대”라고 수군거렸다. 칭찬이 아니라 욕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지원금은 보조비용으로 쓰라고 준 건데 자기 돈 한 푼 안들이고 어떻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안무가가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 자기 돈도 들이지만 의상비와 티켓 판매를 무용수에게 부담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홍 감독은 그런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전업 무용인이 레퍼토리를 늘리고 축적해나가는 과정에서 집을 팔아야 한다면 그건 아니지 않나.”

    서울무용제를 통해 ‘파란 옷을 입은 원숭이’(1996)와 ‘달 보는 개’(1999)가 탄생했고 홍 감독은 두 작품에 애착을 갖고 있다.

    “정해진 돈으로 작품을 만들려면 주어진 여건에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창작적인 고뇌를 많이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훨씬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고, 관객도 몰입시킬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예산이 더 필요하다면 그건 엄청난 세트와 화려한 의상이 아닌, 가능한 여러 개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운용해나가는 데 쓰일 것이다. 작품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 예산을 집중할 생각이다.”

    ‘달 보는 개’는 2000년 9월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에에 초청받았다. 그전에 페스티벌 예술감독이 댄스 시어터 온 무용단을 찾아와 단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초청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리옹 비엔날레에서 초연할 작품의 안무를 홍 감독에게 맡기고 비용까지 전액 부담했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데자뷔’로 이른바 ‘대박’이 터졌다. 원래 3회 공연으로 예정됐지만 매회 공연이 매진되면서 5회로 늘었다. 일찌감치 스케줄이 짜인 세계적인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연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난 18년간 이끌어온 댄스 시어터 온은 8월31일로 해단됐다. 그동안 연습실로 썼던 스튜디오와 사무실도 이날로 짐을 빼고 정리를 끝냈다. 그동안 열악한 현대무용계에서 단체로 살아남기 위해 홍 감독을 비롯한 단원들은 밤이면 생업(生業)에 종사하고 낮에 모여 작품연습을 했다. 땀과 열정을 쏟으며 어렵게 꾸려온 단체를 접는 아쉬움이 남을 법했지만 홍 감독은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바쁜데 자꾸 뒤돌아봐서 뭐 하냐”며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무용단을 정리하자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냈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게 대단한 게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 350만원이 넘는 월세를 지급하며 개인 무용단을 이끌어온 게 기적이라는 소리다. 18년 동안 무용단을 깨지 않고 유지시켰다는 것, 그게 지금 내가 가진 원동력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창단공연은 내년 1월로 잡혔다. 작품은 그동안 홍 감독이 발표한 레퍼토리 중 ‘벽오금학’(2010년 작), ‘아Q’(2006년 작), ‘뿔’(2008년 작), ‘빨간 부처’(2001년 작),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2003년 작), ‘말들의 눈에는 피가’(1999년 작)를 비롯한 10개 작품 가운데 하이라이트를 뽑아 새롭게 재구성해 선보일 예정이다. 이에 앞서 9월 중으로 무용수를 선발할 계획이다.

    “그동안 여러 단체의 정관을 살펴봤는데 무용수 오디션을 마치 입시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인 실력 평가 여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방식인데, 우리는 객관적 실력보다 작품 특성과 색깔에 따라 그때그때 필요한 무용수를 선발하려고 한다. 춤 잘 추는 무용수라고 해서 모든 작품에 어울리는 건 아니다.”

    세계적인 안무가

    무용수가 좋은 춤을 추려면 우선 몸이 기능적으로 많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무용수에게 신체를 이용한 동작은 어휘력이다.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몸을 써서 자기 얘기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항상 훈련해야 하는 게 무용수의 기본이다. 어휘력과 더불어 홍 감독이 작품에 필요한 무용수를 선발할 때 기준으로 삼는 건 무용기능인인지, 무용예술가인지다. 무용예술가는 고뇌하면서 자신의 철학 속으로 들어갈 줄 아는 무용수다. 고뇌와 철학을 통해 나오지 않은 동작에는 마음이 실리지 않는다.

    “생각도 없는 동작에 무슨 마음이 실리겠나. 그런 상태에서 춤을 추면 동작만 떠다닌다.”

    우리나라는 능력을 갖춘 무용수의 저변이 넓은 반면 안무가 층은 얇은 편이다. 자질이 엿보이는 잠재력 있는 안무가는 많지만 그들이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 마련돼 있지 않다. 제대로 된 과정을 밟아 벽을 깨고 나가려면 상당한 시간과 경험이 축적돼야 하는데, 열악한 현대무용계 상황에서 이를 위해 버티기란 쉽지 않다. 그동안 잠재력 있는 안무가들이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용계를 떠나는 모습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지켜봐온 홍 감독은 신진 안무가를 육성하면서 충분한 지원을 할 생각이다.

    “9월이나 10월 중으로 신청을 받아 안무가를 선정할 예정이다. 그렇게 뽑힌 안무가는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연습실을 마련해주고 최저 비용도 우리가 부담하려 한다. 물론 시연을 통한 중간점검도 필요하다.”

    홍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 창단공연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조만간 자신의 솔로 공연 프로젝트인 ‘풍류예가(風流藝歌)’를 선보일 예정이다. 정식 공연장이 아닌 사찰이나 한옥 앞마당, 미술관 같은 야외에서 거문고와 수묵화, 춤이 함께하는 퍼포먼스를 공연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관객을 선착순으로 모집할 생각이다. 공간이 협소한 만큼 지금 신청하지 않으면 공연을 놓칠 수도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을 위해서라면 내 몸을 팔아서 홍보할 것”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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