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떼인 사람은 버스 타고 다니는데 돈 떼먹은 사람은 외제차 타고 다닌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외제차를 굴리고 다니면서도 ‘갚을 돈 없다’고 버티는 채무자를 보면 채권자로선 피가 거꾸로 솟고 화병이 도질 만도 하다. 그래서 “빌려준 돈은 못 받아도 좋으니 저런 악질 채무자를 감방으로만 보내달라”며 치를 떨기도 한다. 꿔준 돈을 회수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한 마당에 자기 주머니에서 변호사 수임료 수백만원을 또 꺼내 들고 채무자에 대한 형사절차를 처리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채권자들을 대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추가로 돈을 들여 사건을 의뢰했어도 바라던 대로 채무자를 형사처벌해 감방에 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결과가 나오면 채권자는 크게 실망하게 마련이고 ‘도대체 무슨 법이 이런가’ 하며 우리 사법제도를 불신할 것이다. 이번 호에는 돈 거래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사기죄에 대해 알아본다.
못 갚으면 무조건 사기?
2009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의 고소사건은 47만2177건인데, 이 가운데 사기죄 고소사건이 35만6559건으로 75%를 차지했다. 그런데 사기죄로 고소한 사건 중 80% 이상이 무혐의 등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단 20%만이 기소되어 형사재판으로 넘어갔다. 형사재판으로 갔다고 해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사기죄 고소사건 중 유죄판결을 받는 비율은 10건 중 2건 미만인 셈이다.
사기죄 고소사건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민사소송을 통해 돈을 돌려받으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과 비용면에서 민사소송보다 훨씬 유리한 형사절차를 진행, 잘만 되면 채무자가 형사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갚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소사건을 소위 민사분쟁형 고소사건이라고 한다. 또한 돈을 꿔간 사람이 돈을 안 갚으면 당연히 사기죄로 처벌받을 것으로 여기고 고소를 제기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기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다.
돈을 떼일 위험에 처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경찰이나 검찰이 막강한 공권력을 동원해 자기 대신 돈을 받아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에 그렇게 친철한 서비스를 바랄 수 없도록 돼 있는 것이 법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사기죄는 어떤 때 성립하는 범죄일까. ‘사기(詐欺)’라 함은 다른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 또는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기망’이란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착오에 빠뜨리는 것을 뜻한다. 애시당초 갚을 능력도 없고 갚을 생각도 없으면서 일주일이나 한 달 안에 갚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빌려간 경우가 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돈을 꿔갈 때는 갚을 생각을 하고 꿔갔는데 어쩌다 보니 사업이 어려워져 돈을 못 갚을 상황이 된 경우에는 사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돈을 꿔갈 때 그것을 갚을 능력이나 의사가 있고 없고는 채무자의 속사정인데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법원은 돈을 꿔갈 당시 채무자의 재산 상태를 기준으로 사기죄 여부를 판단한다. 법원이 사기로 판단한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아래와 같은 경우에는 채무자가 돈을 갚을 의사나 능력이 없는데도 돈을 빌린 것으로 간주했다.
■ 채무자가 돈을 빌릴 당시 이미 빚이 재산보다 많은 채무초과 상태(채무자가 신용불량자 상태인 경우도 당연히 포함된다)였는데도 이러한 사정을 숨긴 채 돈을 빌린 경우
■ 채무자가 발행한 어음의 부도가 임박했는데도 새로 돈을 빌린 경우
■ 채무자가 채무자의 다른 채권자로부터 압류 등 강제집행을 당할 즈음에 돈을 빌린 경우
사기를 어떻게 입증할까?
얘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채권자는 채무자가 돈을 빌려 갈 당시의 재산 상태를 파악할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채무초과 사실 등을 입증할 수 있을까. 원칙대로 한다면 피해자는 범죄 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만 하면 충분하고 수사기관이 수사를 통해 범죄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므로 피해자가 직접 입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건을 일일이 자기 가족 일처럼 챙겨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수사기관 담당자로서는 많은 사건 중에 기왕이면 자기 실적을 올리기 좋은 사건에 먼저 눈이 가지 않겠는가. 피해액이 수백만, 수천 만원 정도인 사건에 관심을 쏟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채권자가 사기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을 정도의 기초 자료는 피해자가 준비해야 한다. 이는 늘상 관련 실무를 다루는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러 심부름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는데,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어떻게 정보를 찾아내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100% 합법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지는 않기에 추천하기가 망설여진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입증 방법은 채권자가 돈을 빌릴 무렵 세금을 체납한 흔적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이나 자동차가 있다면 그 부동산등기부나 자동차등록부에 국세청이나 시군구청이 설정한 압류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법원에 국내 신용정보회사에 대한 사실조회신청을 해 돈을 빌릴 때를 전후한 시기의 채무자 신용상태를 조회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채무자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단점이다.
‘소극적 기망’도 사기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해서 기망한 경우는 ‘적극적 기망’이다. 흔히 사기죄라고 하면 이렇게 적극적인 기망을 수단으로 사용한 경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기망의 방법에는 소극적인 기망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김악덕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강제경매가 신청돼 경매가 개시됐는데도 물정을 잘 모르는 최순진에게 이를 숨긴 채 제값을 다 받고 팔았다고 하자. 최순진은 집값을 치르더라도 소유권이전 등기를 할 수도 없고, 요행으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해봤자 그 집은 경매에서 낙찰된 사람의 소유가 되고 최순진은 소유권을 잃게 된다.
집을 사면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지급한 최순진에게 문제가 있으니 최순진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부동산 매매계약에서 그 부동산에 대한 경매가 개시됐다는 사정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집주인은 매수자에게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집주인이 그러한 고지를 하지 않았다면 매수인을 속인 것과 다름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소극적 기망 또는 부작위에 의한 기망이라고 한다.
위의 예에서 김악덕은 최순진을 속인 것이므로 최순진은 김악덕을 사기죄로 고소할 수 있고, 김악덕과 체결한 매매계약은 사기로 인한 것임을 이유로 취소하고 이미 지급한 매매대금뿐 아니라 그 이자까지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법원이 부작위에 의한 기망으로 본 사례를 두 가지 더 살펴보자.
■ 부동산 매도시 그 부동산에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다는 사실을 매수인에게 고지하지 않은 경우
■ 부동산 매도시 그 부동산에 대해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매수인에게 고지하지 않은 경우
그런데 여기에서 ‘고지하지 않으면 사기가 되는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법원은 그 기준을 ‘만일 상대방이 그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거래에 임하지 않았을 것이 경험칙상 명백한 경우’로 정하고 있다.
일생을 살면서 누구나 사기 한 번쯤 당할 가능성이 높은 게 우리 실정이라면 사기죄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대처방법을 아는 것은 큰 힘이 될 수 있다. 부디 ‘일단 빌려줬다가 나중에 안 갚으면 사기죄로 걸면 되겠지’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