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외국인 전문가가 본 통일비용과 통일세 논란

‘바겐세일 환상’ 버리고 ‘덜 비싼 대안’ 도모해야

  •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andreilankov@gmail.com│

    입력2010-10-01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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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계기로 빚어진 통일비용 논란이 한동안 사회적 논쟁 주제로 떠올랐다. 엇갈리는 찬반양론은 통일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특히 정치적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 그렇다면 제3자의 시선은 어떨까. 남북한에서 장기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외국인 전문가가 이를 진단한 글을 소개한다. 구 소련에서 태어나 한국사와 한국어를 전공한 뒤 현재 한반도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는 필자는 남북한 통일 문제에 대해 오랜 기간 천착해왔다.
    외국인 전문가가 본 통일비용과 통일세 논란

    1989년 10월17일 옛 동독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인근에서 벌어진 월요 시위. 9월 시작된 이 시위는 동독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며 결국 11월9일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정치에서 ‘통일’만큼 긍정적인 의미가 강한 이슈는 별로 없었다. 서로 대립하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은 모두 통일을 민족의 최고 과제로 여겼다. 물론 현재도 이러한 주장은 반복되고 있지만,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완연히 다른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통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경우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가깝다. 모두가 통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통일이 늦게 이루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적어도 외국인인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점차 커져가는 이른바 ‘통일공포증’ 현상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실제로 통일이 됐을 때 들어가야 할 비용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통일 한국이 지금의 남한보다 경제력으로나 국제적 지위로나 훨씬 우월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신화는 1990년대 초 독일 통일 이후의 쓰라린 경험을 지켜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에 대한 인식도 기름을 부었다. 통일이 국가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는 초석이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경제의 급격한 쇠락을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이 미뤄지기를 바라는 속내의 뿌리일 것이다.

    일부 보수진영 인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통일비용 추정이 일부 좌파진영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오히려 좋든 싫든 통일비용이 엄청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면으로 주시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게 옳다.

    통일비용의 규모에 대해서는 상이한 여러 가지 추산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의 민간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는 남북한의 통일비용이 최소 500억달러에서 최대 670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지난 8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개한 연구에 의하면, 통일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경우에는 100억달러, 북한의 급격한 붕괴에 따라 갑자기 이뤄질 경우에는 720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됐다. 기타 다른 추정을 살펴봐도 통일비용은 대체로 수십조원에서 수백조원 사이 규모로 수렴된다.

    ‘통일 공포증’의 뿌리



    물론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이러한 추정 역시 100%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북한의 엄청난 경제 격차를 고려하면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분단 독일의 경우 동독이 서독보다 15~20년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남북한은 북한이 50년가량 뒤떨어진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 격차는 15~40배로 알려져 있는바, 전세계 어디에도 이렇듯 소득 격차가 심한 나라가 이웃하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격차를 하루아침에 극복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 통일 이후 북한의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가 불가피하다.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현대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공업과 농업, 교육 시스템을 기초부터 다시 건설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결코 적은 비용일 수 없다. 물론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 재원은 분명 어디서든 마련돼야 한다. 일정부분을 외채와 국제사회의 원조로 충당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남한의 납세자들이 부담해야 할 몫이다.

    물질적인 자본투자는 인적자원의 개발에 비하면 오히려 부차적이다.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북한 사회의 특성상 주민들은 현대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 일한 경험이 거의 없다. 글로벌화한 현대사회와 경제의 다양한 요구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권력 세습 과정에서 일부 특권층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 경제 전체의 경쟁력을 낙후하게 만드는 패착을 거듭해왔고, 이 때문에 주민들의 신체적 건강과 복지수준은 극도로 열악해졌다. 특히 어린 나이에 1990년대의 극심한 기근을 겪어야 했던 이들 가운데는 영구적인 손상이나 장애를 입어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한 이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통일 이후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가져올 경제적 충격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기대는 근거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장 남북한이 통일국가가 된다면 북한 출신 노동자들이 언제까지나 값싼 노동력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200㎞도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250만원일 경우, 같은 국가 국민인 북한 출신 노동자의 임금이 25만원에 머무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100만원 수준이라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2~3년이 지나면 같은 국가 국민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집단적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독일 통일 이후 우리가 익히 지켜본 일이기도 하다.

    국가의 통합이라는 민감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평등한 대우에 대한 북한 출신 노동자의 요구는 결국 수용될 수밖에 없겠지만, 거꾸로 북한 주민의 평균적인 기술수준이나 능력, 노동생산성은 분명 그만큼 빨리 상승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값싼 노동력에 대한 기대가 착각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다.

    통일을 통제할 수 있나

    외국인 전문가가 본 통일비용과 통일세 논란

    개성공단에 입주한 한국 신발제조업체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통일을 인위적으로 미루고 두 개의 코리아가 장기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일 역시 간단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을 들여다보면 통일이 질서정연하게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돌발적이고 갑작스러운 사건이 될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이는 것이다.

    세계사는 두 개의 체제가 엘리트 사이의 협상과 타협을 통해 통합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대부분 한쪽에서 벌어진 인민봉기가 혁명으로 이어져 진행된 통합이나, 일방의 다른 일방에 대한 무력침공에 따른 통합이다. 어떤 경우든 사실상 흡수통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베트남도 독일도 모두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한반도라고 해서 예외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북한의 무력통일 가능성은 이전에 비해 크게 낮아졌지만 독일식 혁명통일의 가능성은 오히려 크게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과 사회적 혼란이 불가피한 흡수통일 대신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희망 섞인 견해를 피력한다. 북한도 중국처럼 개혁과 개방을 시작한다면, 그래서 이를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개발을 달성하게 된다면 남북의 격차는 점차 줄어들 테고 통일 역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지다. 굳이 이름 짓자면 ‘바겐세일 통일’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듯 단계적인 통일 추진 시나리오는 일견 매우 바람직하지만 또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북한이 중국식 경제개혁이나 대외개방을 선뜻 선택할 수 없는 이유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가장 큰 이유는 남한에 있고, 엄밀히 말해 같은 민족인 남한의 국민이 이미 향유하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에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북한이 중국과 유사한 개혁·개방의 길을 간다면 주민들에 대한 감시체제는 필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폐쇄적인 정치체제도 점차 도전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경제적 변화가 국내 정치의 안정이나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중국은 분단국가가 아니라는 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북한 체제가 자유화의 바람에 노출되고 국가체제에 대한 공포가 줄어든다면, 이에 덧붙여 남한 국민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면, 북한 주민 역시 동독의 민중처럼 통일을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뒤집어 말해 분단국가인 북한이 개방과 개혁을 시도한다면 이는 중국식 고도 경제성장보다는 동독식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을 초래하기 쉬울 것이다. 북한의 정치 엘리트들은 이러한 시나리오가 자신들의 특혜와 권력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북한이 거듭되는 국제사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일반 국민의 삶의 질을 중요한 변수로 보지 않는 이들의 시각에서는 개혁·개방의 회피야말로 체제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피는 경제성장을 가로막고, 체제의 치명적인 위기 또한 연기되는 것일 뿐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 권력 엘리트들의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 국내에서 자발적인 변화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 체제의 주민들에 대한 감시는 일정부분 완화되어 왔고, 주민들은 경제생활에서도 점차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장마당을 통한 개인 경제활동으로 생계를 꾸리게 됐다. 중국을 통해 남한을 비롯한 나라 밖의 상황과 생활에 대한 지식도 상당부분 유입됐다. 변화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는 북한의 권력 엘리트들은 이를 저지하거나 되돌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해 보인다. 북한 체제가 날이 갈수록 동독이나 동유럽 국가들에서 벌어졌던 민중저항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전문가가 본 통일비용과 통일세 논란

    8월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65주년 광복절 경축행사.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고 있다.

    북한의 위기는 루마니아나 동독처럼 민중혁명의 성격을 띨 수도 있을 것이고, 북한 군부세력 간의 분쟁이나 무력충돌로 나타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북한에서 이렇듯 혁명적인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 중국은 1968년 체코민주화 운동이나 1956년 헝가리 민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소련처럼 간섭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을 보면 중국에는 엄청난 지정학적·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북한 상황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많지 않고, 어쩌면 일정한 조건하에서 남북한의 통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징후마저 감지된다.

    일단 북한에서 위기가 발생할 경우 한국 정부와 사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일단 위기가 발생하면 북한 민중은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남한과의 통일을 요구하고 나설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북한 주민들이 통일을 요구하고 국제사회 역시 한반도 북부 지역을 대한민국이 안정시켜야 할 공간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남한 측은 통일이 야기할 재정비용과 사회적 갈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통일비용과 분단비용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는 결코 나쁜 상황전개가 아니다. 단순히 통일이라는 명분 측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통일비용도 천문학적이지만 현재의 분단상황도 적지 않은 비용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비용이 만약의 경우를 가정한 추정치라면 분단비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누적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통일 직후 10~20년 동안 소요되는 통일비용이 천문학적이라 해도 반대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이어질 분단비용보다는 적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분단비용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은 엄청난 군사비 지출이다.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볼 때 동북아시아는 주먹이 가장 큰 사내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해당한다. 이렇듯 묘한 위치 때문에 한국은 통일 이후에도 강력한 군대를 필요로 하겠지만, 분단 한국이 유지하고 있는 군사력 규모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경제규모나 인구가 비슷한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한국과 인구가 비슷한 스페인의 병력규모는 12만명으로 한국의 5분의1에 불과하다. 한국보다 인구가 1.3배 많은 태국의 병력은 30만명으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현재의 한국 군대가 다른 주변국의 위협보다는 북한의 존재 때문에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통일 후에는 병력 규모와 국방예산이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는 대략 현재 남한이 지출하는 군사비의 절반정도가 보이지 않는 분단비용임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북한 인민군의 예산까지 고려하면 군사비 항목의 분단비용은 더욱 클 것이다.

    다른 안보분야 비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국가정보원 등 한국의 주요 정보기관들의 공작이나 정보수집 사업 가운데 상당 부분은 북한의 존재 때문에 발생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국정원의 예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분단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는 이유다. 외교통상부 역시 마찬가지다. 근래 들어서는 남북 간의 외교적 경쟁이 크게 약화됐지만, 적지 않은 경우 한국의 외교는 한민족 전체의 집단이익을 보호하는 작업보다는 북한의 외교행보를 저지하거나 상쇄하는 데 상당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물론 북한 외무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여가는 분단비용은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도 쉽지 않다.

    분단의 영구화가 남북한 국민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지나간 150년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 주민이 가장 큰 고초를 겪은 것은 이 지역을 무대로 강대국들이 다툼을 벌였을 때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일제의 침략, 분단에 이르기까지 주요 참화는 모두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강대국 사이의 대립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다툼과 분쟁으로 점철된 국제관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반도에서 남북의 대립이 지속될 경우 주변국가와 강대국이 이러한 분단상황을 자국의 이익에 적합하게 조종, 이용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전 시기의 역사에서 겪었던 고초를 피하기 어렵다.

    물론 객관적인 잣대로 보자면 통일 이후의 한국이 초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냉정한 국제정치의 현실 역시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외부세력의 간섭을 보다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지정학적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는 잠재력은 분명 증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한민족이 자신의 땅에서 자신들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면 통일은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구체적인 전략의 모색

    이렇듯 통일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볼 때 이익이 더 큰 사안이다. 이들 두 가지 이유로 인해 필자는 한국이 통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하고자 한다. 언제 이뤄질지, 어떤 형식으로 이뤄질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통일을 준비하자면 무엇보다 유연성이 필요하다. 바꿔 말해 통일이 5년 후에 이뤄지는 경우에나 25년 후에 벌어지는 경우에나 모두 쓸모가 있을 만한 정책을 개발해 실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크게 구분해 통일을 준비하는 정책에는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우선 현존하는 북한 정권과의 협력을 통해 통일경제의 물질적인 기반을 만들고 북한의 인적자원과 사회자본 개발을 격려하기 위한 노력이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 정권의 거부감을 무릅쓰고라도 북한의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천안함 사건 이후 악화된 최근의 남북관계 속에서 북한과의 협력은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불과 수년 후면 다시 활발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 해당 시점에서 남한 정부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관계없이,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이러한 협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남북 교류 과정에서 북한 정권의 본질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북한 체제는 어떠한 외부 침략자보다도 더 많은 한민족의 목숨을 앗아간 봉건주의적 세습독재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북한 정권과 협력과 교류를 도모하는 것은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하고 통일을 추진해 장차 하나가 된 한국의 경제구조를 만들어가기 위해 불가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협력이 다시 활발해진다면 이러한 기회는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북한의 인프라 개발과 비군사 분야의 공업 개발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도로와 철도, 전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작업은 오히려 분단상황이 지속되는 조건하에서 더 저렴하게 이뤄질 수 있다. 이렇게 건설된 철도와 도로는 통일 이후 북한의 경제 복구와 성장을 뒷받침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개성공단처럼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일정 수준 인간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 프로젝트도 긴요하다. 남한의 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남한의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며 익히는 업무자세와 노하우는 통일 이후 분명 중요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조성된 생산단지들이 통일 이후 북한 공업의 재생기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점은 불문가지다.

    북한의 사회적 자본 개발

    그간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대북지원과 교류가 북한의 독재정권을 강화할 뿐 아니라 북한이 군사적 위협을 증강할 수 있도록 돕는 토대가 된다고 우려해왔다. 이러한 우려는 분명 근거가 있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북한 정권이 개성공단과 같은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이익을 체제 유지에 사용해온 것은 맞지만, 개성공단 덕분에 4만명의 북한 노동자가 남한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이 배운 기술과 능력은 장차 통일 한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들이 한켠에서 키워나가고 있을 북한 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통일을 앞당기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개성공단은 사실상 북한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약화시키는 프로젝트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언뜻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유사해 보이는 이와 같은 협력정책이 변별성을 가지려면 몇 가지 원칙을 세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정권에 직접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일을 하거나 북한 주민들이 새로운 지식과 능력을 얻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원칙이다. 북한의 사회적 자본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북지원의 초점을 교육지원에 맞출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김일성종합대학 등 북한의 유명 대학교에 과학도서나 잡지를 보내고 그들의 교육프로그램을 도와주는 사업을 들 수 있다. 북한의 학자들이나 학생들이 제3국에 유학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2010년 가을 현재의 남북관계 현실에서 이러한 작업이 쉽지 않다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도 있다. 바로 탈북자 교육이다. 이미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의 수는 2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이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압도적인 숫자가 저임금 비숙련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어린 탈북자들은 남한의 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 출신 대학생은 상당수가 기본지식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조기교육으로 단련된 남한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영어 등의 분야에서 경쟁력이 낮다. 더욱이 일단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졸업률이 높지 않은 편이다. 이들을 위한 장학금 프로그램이 절실한 이유이고, 한걸음 나아가 대학원 등 더 높은 수준의 교육기회 제공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는 이유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목적은 명확하다. 이들을 장차 통일 이후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기반으로 보고 대안 엘리트 세력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탈북자 출신 배달원이나 청소부뿐 아니라 탈북자 출신 의사, 기술자, 대기업 회사원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통일 국가가 직면하게 될 도전 가운데 현대사회와 기술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를 갖춘 인재의 부족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는 없을 것이다. 남한에서 충분히 교육받은 탈북자들이 통일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며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게 된다면, 북한의 사회적 자본을 조기에 육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굳이 통일이 이뤄지지 않아도 이들 대안 엘리트가 탈북자 사회에서 역할모델로 자리매김하는 것, 이를 통해 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서 ‘영원한 2등 국민’으로 남을 운명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정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 함께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교육 프로그램, 즉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을 북한 내부에 전파하는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물론 북한 당국자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거세게 반발할 것이므로, 이를 우회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모색해야 한다. 북한 당국이 막기 어려운 대북방송이나 북한 주민을 위한 출판물, 디지털 자료의 제작 등이 대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대북 사회교육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심리전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이러한 활동이 북한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 핵심목적은 북한의 체제붕괴를 부추기기보다는 북한 주민의 의식을 바꾸어 조만간 가시화할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요구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 당국자들에게 압력을 가한다기보다는 북한의 사회적 자본을 개발하는 대책으로 보면 더 정확할 것이다.

    현실적 낙관주의의 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정책이 지향하는 기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통일의 재정적 비용과 사회적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통일 쇼크’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것이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엄청난 수준의 통일비용이나 급격한 통일 쇼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이를 가능한 한 줄이는 것뿐이다. 한국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목적이 ‘값싼 통일’이 아니라 ‘덜 비싼 통일’인 이유다.

    외국인 전문가가 본 통일비용과 통일세 논란
    Andrei Lankov

    1963년 구 소련 레닌그라드 출생

    레닌그라드국립대 동방학부 졸업, 동 대학원 박사(한국사)

    북한 김일성대 조선어문학과 유학

    호주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역임

    現 국민대 교수

    저서 : ‘North of the DMZ: Essays on Daily Life in North Korea’ ‘Crisis in North Korea: The Failure of De-Stalinization’


    굳이 평가하자면 이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통일관이 아닐까 한다. 외국인인 필자의 눈에는 여전히 한국사회가 이러한 통일관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간의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한민족은 오랜 세월 매우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왔지만 항상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왔다. 통일은 분명 또 하나의 어려운 도전이 될 테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낙관적인 인식이다. 그 낙관주의의 가장 큰 전제조건은 남북한이 처해 있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현실적으로 계획해나가는 자세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 낙관주의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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