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얼굴의 이면, 익명의 양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0-11-03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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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의 이면, 익명의 양면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br>조엘 에글로프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216쪽, 1만1000원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에펠탑과 함께 파리를 상징하는 백색 돔의 사크레쾨르(聖心)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길이 거미줄 형상으로 얼기설기 나 있다. 파리의 길은 규모에 따라 아브뉴(avenue·大路), 또는 불바르(boulvard·大路)로 표기하고 보통의 길 또는 거리를 뤼(rue)로 표기한다. 언덕 아래 콩코르드 광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샹젤리제 대로나 센 강 좌안 지역을 관통하는 생제르맹 대로와는 달리 몽마르트르에는 언덕 아래 피갈 대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뤼보다도 작은 통로(passage)급의 좁은 골목이 산재해 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몽마르트르의 ‘풍차 방앗간(물랭루주)’을 아름답게 그린 르누아르를 비롯해 반 고흐, 피카소, 툴루즈 로트레크, 모딜리아니, 달리 등 예술의 수도 파리에 모여든 수많은 화가가 이 길들을 화폭에 담았다면, 마르셀 에메(1902~67)는 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몇몇 거리를 생생하게 호명해낸다. 20세기 초 전쟁 상황에서 사르트르와 카뮈가 실존의 문제를 소설 속에서 심각하게 문제 삼고 있을 때, 마르셀 에메는 초월 또는 환상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건드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되퇴유욀. 그는 등기청 하급 직원으로 삶에 어떤 변화나 모험을 원하지 않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어느 날 그는 병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자신에게 벽으로 드나드는 초능력이 있음을 전해 듣는다.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는 그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기는커녕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상사 골탕 먹이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겠는가? 골탕 먹이기에 맛 들인 그는 마침내 파리의 대도(大盜)가 되어 은행을 터는가 하면, 감옥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세인의 관심을 한몸에 얻는다. 그러나 원래 아무 변화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을 원했던 그인지라 그 대단한 놀이도 심드렁해져서 몽마르트르 언덕의 이 길 저 길을 배회한다. 그때 언덕을 힘없이 걸어가던 한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그 신묘한 능력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과도하게 드나든 나머지 결국 그는 벽을 통과하는 중에 그만 기운이 떨어져 벽과 한몸이 되어버린다.

    파리의 소음이 잦아드는 야심한 시각에 노르뱅 거리를 내려가는 사람들은 무덤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들은 그것을 몽마르트르 언덕의 사거리를 스치는 바람의 탄식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늑대인간’ 되퇴유욀이 찬란한 행로의 종말과 너무도 짧게 끝나버린 사랑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 마르셀 에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몽마르트르 노르뱅 거리에 가면, 벽과 한몸이 되어버린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재현되어 있다. 이 벽이 위치한 광장은 아예 마르셀 에메 광장으로 명명되어 있다. 언덕에 무슨 광장인가 의아할 수도 있지만, 파리나 로마, 프라하 등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에서는 길과 길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은 모두 광장(place)이 된다. 카프카 생가 거리에는 카프카 광장이, 발자크가 태어났거나 살았던 거리에는 발자크 광장이, 루소가 산책했던 거리에는 루소 광장이 있는 셈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아이러니

    2년 전 겨울, 몽마르트르에 살고 있는 문우를 만나 노르뱅 거리의 마르셀 에메 광장을 찾아갔다. 이 친구는 신장 190㎝가 넘는 거구에 되퇴유욀처럼 어수룩한 표정으로 몽마르트르의 비탈진 골목길들을 느릿느릿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40대 초반의 남자다. 최근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라는 평범한 듯 흥미로운 소설을 한국어 번역으로 선보인 프랑스의 주목받는 작가 조엘 에글로프가 바로 그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제1회 서울 젊은 작가 축제에서였다. 프랑스 남성의 평균 키를 훌쩍 넘긴 큰 키에 건장한 풍채,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였으나 그는 내면의 심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매우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전세계에서 모인 20여 명의 젊은 남녀 작가 중에 가장 푸근하고 선량한 작가로 각인되었다. 그때 이미 그는 한국 독자에게 ‘장의사 강그리옹’과 ‘해를 본 사람들’이라는 두 권의 소설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축제 중에 열린 심포지엄과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의 이력이 세인의 눈길을 끌었다.

    소설을 쓰기 전에 그는 스트라스부르대학 역사학과를 나와 파리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시나리오 작가로 조감독 생활도 했다. 영화 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가 정작 인정을 받은 것은 소설 장르에서다. 그의 첫 소설 ‘장의사 강그리옹’은 현대에서 사라져가는 직종 중의 하나인 장의업(葬儀業)을 가업(家業)이자 생업(生業), 나아가 누군가 죽기를 바라야 하는 사업(死業)으로 삼은 ‘장의사 에드몽 강그리옹과 그의 아들’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아이러니를 경쾌하면서도 능청스러운 문체로 펼쳐 보인다.

    그는 시체를 덮고 있던 나뭇조각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다가 마주 보기가 두렵던 얼굴이 나타나는 순간, 그만 나뭇조각이 손에서 미끄러져 시체의 얼굴 위로 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빌어먹을! 시체의 코를 깬 것 같아요.”

    몰로가 소리쳤다.

    “사고도 골고루 치는구만. 서둘러.”

    몰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나무판을 들어 옆으로 밀었다.

    남자는 노랗지도 푸르지도 험상궂지도 않았다. 안색은 순수한 백색이었고 놀라우리만큼 평온한 표정이었다. 한쪽 콧구멍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몰로는 조르주를 쳐다보았다.

    “이게 정상인가요?” - 조엘 에글로프, ‘장의사 강그리옹’

    소설적 희비극

    조엘 에글로프는 첫 소설 ‘장의사 강그리옹’으로 알랭 푸르니에 상과 ‘영화로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소설에 주는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그것은 결국 영화로 대중과 소통하고자 했던 그의 이미지 위주의 서사가 문자 위주의 문학 서사로 전환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이 작품 이후 ‘해를 본 사람들’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했던 짓’ ‘도살장 사람들’, 그리고 최근 번역 출간된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까지 2, 3년 간격으로 한 편씩 발표하면서 몽마르트르 언덕의 비탈진 골목길을 걷는 매우 느린 발걸음에 소설의 보폭을 맞추고 있다.

    그는 현대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거스를 줄 아는 여유와 균형감을 갖춘 작가로 그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들 또한 한 템포 늦은 속도로 삶을 관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조는 때로 블랙 유머를 자아내기도 하고, 어수룩하면서 우스꽝스러운 현대인의 내면을 들추어내 보여주기도 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그의 소설의 존재 이유이자 가치인 ‘소설적 희비극’이 창출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의 대략의 줄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외모가 너무 평범해서 다른 사람으로 자주 오해를 받는다. 어느 날 같은 에피소드가 반복되자 그는 아예 오해받은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 행세를 해버리고, 결국은 집과 이름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거느린 모든 것을 상실한다. 이 소설 또한 이전의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평범한 주인공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작품에서 눈여겨볼 점은 현대인의 삶의 본질을 투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얼굴의 이면, 곧 익명의 양면성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나를 어떻게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 나를 둘러싼 타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이 소설은 무덤덤한 듯 불쑥 정곡을 찌르는 페이소스(pathos)를 던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은 예전에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계기로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나를 어디에서인가 예전에 보았다는 느낌에 빠진다. 얼굴도 도무지 모르고 이름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예의상 아는 척하며 기꺼이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고 우리는 함께 인연을 맺었을 법한 장소와 상황을 이것저것 떠올려본다. 한참 후에야 우리 사이에 공통된 어떤 기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이르면 서너 번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몇 차례 머쓱한 미소를 나누고, 나는 그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비굴한 사과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인사하고 각자의 길로 걸음을 계속한다. (중략) 가끔 나를 오인한 사람이 범상치 않고 오히려 평범함과는 정반대로 보이는 인물인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은 기꺼이 사귀고 싶다. 나 자신이 아니라 차라리 오인된 사람이었다면 비록 잠깐일망정 무엇인가 덕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토록 다정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실망시킬 만큼 나는 매정하지도 않고 이런 드물고 드문 재회의 기쁨을 그에게서 앗아갈 권리가 내게 없다고 느낀 나머지 근처 술집으로 가서 카운터에 팔을 괴고 이를테면 소식이 끊겼던 그 세월 동안 서로 어떻게 변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조엘 에글로프,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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