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임권택 감독, 1971)를 보자. 장동휘가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박노식과 문희, 그녀의 아버지가 일어나 인사를 한다. 결혼 전 양가의 상견례 자리다. 아름다운 여인 문희와 그녀를 사랑하는 청년 박노식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신사 장동휘. 그 옛날, 전쟁통에 고아가 된 박노식이 깡통 하나 달랑 들고 명동 거리를 배회하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를 거둬주고 친자식처럼 아끼고 돌봐준 이가 바로 장동휘다. 그는 박노식에게 친아버지 이상의 존재다. 그런 박노식이 아름다운 문희를 아내로 맞이하는 자리에서 장동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다. 사랑하는 딸 최지희가 박노식을 짝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날, 최지희는 꿈에 부풀어 박노식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고, 장동휘는 자기 딸과 믿음직한 박노식이 가정을 꾸미기를 바랐다. 그런데 박노식에게 최지희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었고, 그에게는 문희가 있었다. 실연한 딸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박노식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문희를 바라보는 아비 장동휘. 그가 감정에 휩싸여 있을 새도 없이 위기가 닥친다. 장동휘와 박노식은 암흑가의 깡패들이다. 양가 상견례 자리는 공교롭게도 라이벌 조직의 구역이다. 라이벌 조직은 장동휘와 박노식이 자신들의 구역에 온 것을 도발이라 보고 그들을 치려고 한다. 이때 장동휘가 나서서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눈감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승냥이 같은 라이벌 조직의 깡패들은 대가를 요구하며, 장동휘의 배에 칼날을 깊이 박아 넣는다. 칼에 찔린 몸으로 문희와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둘의 사랑을 축복하는 장동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는 1970년대 초 수없이 만들어진 깡패 영화들 중 주인공들의 증오와 사랑의 감정이 가장 첨예하게 스파크를 일으켰던 흔치 않은 영화였고, 장동휘는 양아들 박노식과 김희라, 그리고 딸 최지희가 사랑과 증오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아버지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배우 장동휘가 매우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표정을 과장되게 만들거나,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배우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고, 그의 감정 표현은 눈썹이 조금 움직이거나 눈매가 비틀어지는 것 정도다. 그래서 당시 평론가들은 그에게 ‘눈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찬사를 바쳤다.
매력적인 니힐리스트

한국 액션 영화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후 장동휘는 ‘만무방’(사진, 1994) 등 멜로 영화에서 노년 연기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
편의상 장동휘의 영화를 네 시기로 구분해보면, 데뷔작부터 이만희 감독과 만나기 전, 즉 1957년부터 1962년까지가 첫 번째 시기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하며 악역 조연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시기가 두 번째 시기. 그리고 그의 연기가 무르익고,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 제작을 하는 말 그대로 전성기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를 세 번째 시기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액션 영화가 시대의 조류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후, 멜로 영화에서 노년 연기를 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시기를 네 번째로 보자. 그러면 ‘암살자’와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는 그의 연기가 무르익었던 세 번째 시기에 속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