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환상
이번에 새롭게 번역 출간된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보르헤스의 특별한 안내에 따른 것이다. 도서관 서기에서 출발해 국립도서관장 자리에 오른, 환상 소설의 대가를 흠모한 이탈리아의 한 편집자가 아르헨티나로 보르헤스를 찾아가 그가 평생 읽어온 소설 중에서 그를 행복하게 해준 작품들을 엄선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총서를 내놓았다. 바벨은 성서의 바벨탑 신화를 근거로 해,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의미하며,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세계 또는 우주와 동의어다. 곧 바벨의 도서관이란 ‘혼돈으로서의 세계’라는 뜻으로 보르헤스의 소설적 주제인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총 29권의 소설책으로 총서를 구성했으며, 이들을 통해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보르헤스는 이 총서의 첫 번째 자리에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올려놓았는데, 표제작인 ‘도둑맞은 편지’를 비롯해 ‘병 속의 수기’ ‘밸더머 사례의 진상’ ‘군중 속의 사람’ 그리고 ‘함정과 진자’다. 보르헤스가 이들 작품을 선별한 기준은 ‘신비’와 ‘공포’, 그러니까 이 둘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내는 ‘환상’이다. 이 작품들 중 보르헤스가 백미로 꼽는 작품은 마지막, 종교 재판에서 사형에 처한 한 사내가 겪는 환각적 공포를 한 단계 한 단계 최고조로 끌어올린 ‘함정과 진자’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길고 끈질긴 고통 탓에 나는 초주검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내 포박을 풀고 앉도록 허락했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선고, 그 소름끼치는 사형선고는 내 귀에 뚜렷하게 들려온 마지막 목소리였다. … 마치 물방아 바퀴가 웅웅 회전하는 소리를 연상시킨 탓인지 내 마음속 혁명이라는 개념이 전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이 소리는 그쳤다. 그러나 잠시 동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끔찍할 정도로 과장된 광경을.
-에드거 앨런 포 ‘함정과 진자’ 중에서
21세기 소설, 나아가 문학, 나아가 문화를 읽는 방법은 환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상(幻想·fantasy)이란, 사전적으로는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을 의미한다. 영국의 작가이자 소설이론가인 E.M.포스터는 환상이란 초현실적인, 마술적인 현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원전(原典)을 엄청난 압축술로 재구성하거나 번안(패러디)한 상태, 그리고 인물의 극심한 성격 파탄이라고 봤다. 또한 보르헤스와 더불어 20세기 환상 문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이탈로 칼비노는 환상을 두 가지 범주, 심리적인 것(보이지 않는 것, 마음의 공포)과 표면적인 것(보이는 것, 괴기스러운 것)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보르헤스는 환상을 ‘관념적 세계의 구상화’로 간주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그는 미로와 추리적인 구조, 압축과 반전, 가상 텍스트(가짜작품)와 그것에 대한 가상 각주(가짜각주), 가상 참고문헌 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문학(소설)론’을 펼치는가 하면, 자아·죽음·시간·영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바벨의 도서관’의 제1권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 되는 이유를 이로써 짐작할 수 있다.
현실이 아니라고! - 숨을 들이쉰 순간 불에 달군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 막힐 듯한 악취가 감방을 가득 채웠다! … 공포로 전율하는 이성 위에 불타는 소인(燒印)을 남겼다. 아아! 뭐라고 해야 할까! 아아! 이렇게 참혹할데가! … 낮게 우르릉거리는, 마치 신음 같은 소음이 들리며 무시무시하게 변하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방 모양은 순식간에 마름모꼴이 되었다. 그러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시뻘겋게 달아오른 벽을 영원한 안식의 옷삼아 껴안을 수도 있었다. “죽는 건 상관없어.” 나는 말했다. “저 함정에만 떨어지지 않으면 죽어도 좋아!”
-에드거 앨런 포 ‘함정과 진자’ 중에서
보들레르와 보르헤스를 통한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산책은 두 갈래다. 군중 속의 남자를 관찰하는 보들레르적인 시선을 따를 것인가, 무한 공포를 향해 가는 고도의 보르헤스적인 환각을 체험할 것인가. 한여름 밤, 어느 길을 선택하든 후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필자의 취향을 사족처럼 붙이자면, 보르헤스가 ‘함정과 진자’를 몇 번이고 읽은 것처럼, ‘군중 속의 사람’을 읽고 또 읽는다.
“저 노인은,”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심원한 죄악의 전형이자 본질이었어. 혼자 있기를 거부해. 그는 군중 속 인간이니까 말이야. 더 이상 쫓아가 봐도 소용없어. 그래 보았자 그나 그의 행동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음은 ‘영혼의 동산’ 이상으로 속악한 책이고, 이것을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의 가장 큰 은총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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