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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의‘그 영화’ ②

감독도 모르게 사라진 8분

  • 전윤수│영화감독·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dkall@ajou.ac.kr

감독도 모르게 사라진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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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도 모르게 사라진 8분

영화 ‘파랑주의보’.

그런데 위축된 감정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이 작품 일본 상영판 한 장면이 송두리째 삭제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삭제된 장면은 다음과 같다. 배경은 바닷가 어느 고등학교. 전학생 송혜교가 차태현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사귀자고 한다. 송혜교를 짝사랑했던 주변 남학생들은 차태현을 시기해 이렇게 외친다.

“넌 장난감이야! 다 조립하면 지루해서 버릴 거라고!”

그날 밤 차태현은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곰곰이 생각한다. ‘천사같이 예쁜 그 애가 왜 나랑 사귀자는 거지?’ 그 순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조립식 장난감이 산산 조각난다. 시기에 찬 남학생들의 말처럼 실제 조립식 장난감이 분해되자 차태현은 왠지 불안해진다. ‘애들 말처럼 그 애는 날 장난감으로 생각하나? 갖고 놀다가 버리면 어떡하지?’

감독으로서 나는 이 장면에 쓸 소품용 장난감이 필요했다. 소품팀에게 ‘툭 건드리면 분해 되는 검지손가락 크기의 조립식 장난감’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소품팀은 후보 몇 개를 가져왔고 나는 비교적 분해가 용이한 장난감 하나를 골랐다.

그것은 아톰 인형이었다. 꽤 귀여운 모양이라 영화 속 차태현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아 주저 없이 그 인형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수출 과정에서 이 장면이 문제가 됐다. 이유는 아톰, 즉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에 흠집을 냈다는 것이다. 아톰은 일본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있는 일본에서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 문화의 상징적 존재를 산산조각 낸 한국 감독이 됐다. 결국 일본 수출을 위해 내 영화는 가위질당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다. 일본 영화 속 주인공이 로보트 태권V 피겨를 만지작거리다가 실수로 부러뜨린다. 한국의 수입업자는 일본 영화 제작자에게 해당 장면의 편집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한다면?

“한국 만화영화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님의 태권V에 흠집을 냈군요. 태권V는 희망 한국의 상징입니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합니다. 태권V 인형이 분해되는 장면을 반드시 삭제해주세요.”

우리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까? 글쎄. 영화는 영화다. ‘파랑주의보’는 그저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일 뿐이고, 감독으로서 ‘식민지로 핍박받았던 우리의 울분을 은밀하게 복수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맹세한다. 단지 분해 잘되는 소품 하나 잘못 골랐을 뿐이다.

결국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문제의 아톰 장면은 삭제된 채 일본에서 상영됐고 DVD로도 출시됐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국내 출시된 DVD에도 아톰 장면은 발견할 수 없었다.

창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아톰 장면이 삭제됐다고 해서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불필요한 장면의 삭제로 영화의 리듬이 더 경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작품 연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모든 저작권이 투자사에 귀속되는 것은 대중 상업 영화감독의 숙명이다. 그래도 산고 끝에 만들어낸 창작물이 수정되고 변형될 때는 그것을 만들어낸 창작자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이 불필요하다면, 세상에 던져진 그 창작물은 창작자의 영혼이 담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창작자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창작물이 수용자에게 제공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감독도 모르게 사라진 8분
田允秀

1971년 서울생

중앙대 영화학과 졸, 동 대학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 석사

2001년 영화 ‘베사메무쵸’ 각본·감독으로 데뷔

영화 ‘파랑주의보’(2005), ‘식객’(2007), ‘미인도’(2008) 각본·감독


10년 전 데뷔작을 찍을 때 상영시간의 압박 때문에 스스로 삭제한 몇 개의 장면은 늘 미련으로 남는다. 그런데 한국의 대중 영화감독으로 또다시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지면을 빌려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뤽 베송 감독에게 꼭 사과하고 싶다.

신동아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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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영화감독·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dkall@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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