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신동아 창간 80주년 특집 ‘국민이 원하는 국회의원’ 여론조사의 함의

기성 질서 비판하고 색깔 분명한 인물 원해

  • 고성국|정치평론가·정치학 박사 bdm65@daum.net

    입력2011-08-23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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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은 신선한 이미지로 국민에 먹혀
    • 내년 총선 여권은 세대교체 어려움 겪을 수도
    신동아 창간 80주년 특집 ‘국민이 원하는 국회의원’ 여론조사의 함의


    내년은 선거의 해다.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 이어 12월 대통령선거가 있다. 12월 대선이 먼저 있고 4월 총선이 있었던 2007~2008년과는 순서가 반대다. 다시 말해 12월 대선의 향배가 4월 총선 결과에 영향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총선 결과가 곧 대선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총선은 총선이고, 대선은 대선이다.

    총선이 대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총선 결과 만들어질 새로운 정치 질서가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 새로운 정치 질서가 차기 정부와 국회 간의 권력구도를 미리 확정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차기 정권을 여대야소(與大野小)로 할지 여소야대(與小野大)로 할지를 생각하면서 대선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여야 대선 주자들이 4월 총선에 승부를 걸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4월 총선은 두 가지 이유에서 현역의원 교체율이 높은 선거가 될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정초선거(Foundation Elec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정치구도와 이후의 정치구도가 구조적으로 달라지는 분기점이 되는 정초선거는 정치구도의 변화와 동시에 정치세력의 교체, 인물의 교체를 수반한다. 당연히 현역교체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새 인물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수도권 승부가 예측불허이고 여야 모두 공천 물갈이를 승부수로 준비하고 있다. 문제는 수도권 물갈이만으로는 유권자에게 충격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각기 자신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에서 먼저 대대적인 물갈이를 하는 ‘자기희생’을 보여주지 않으면 물갈이의 진정성을 인정받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모든 호언장담과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현역의원이 대폭 교체되고 새 인물이 대거 등장하지 않으면 개혁과 쇄신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기는 어렵다. 국민은 조직 개편이나 정책 전환보다는 인물의 교체에 더 민감하고 열광한다. 조직개편도 정책전환도 인물교체로 표현돼야만 의미 있게 체감되는 것이다.



    추종자와 팬의 힘도 작용

    ‘신동아’-‘리서치앤리서치’의 기획특집 조사 결과는 새로운 인물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보여준다. 상위에 거명된 인사들의 정치인과 비(非)정치인 비중에선 비정치인이 약간 많다. 특히 문재인, 안철수, 손석희, 김제동, 박경철, 김여진 등 비정치인 6명의 인지도는 어떤 정치인보다 높다. 문재인을 뺀 이들은 기업, 언론, 연예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거리를 두어왔다. 1위를 기록한 문재인 역시 지금까지는 기존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비정치적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워왔다.

    이들은 때로 정치적 발언도 과감하게 하고 개입도 하지만 기존 정치판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신선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것이다. 이들이 기성의 질서와 권위에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온 것도 국민의 눈에 나쁘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이들의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는 거부감을 갖는 안티를 일부 만들었을지 모르나 더 많은 열혈 지지층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이 상위에 랭크된 데에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추종자, 팬들의 힘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좌우 이념프레임을 떠나 이들은 하나 같이 우리 사회에서 쓴 소리, 곧은 소리를 해왔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고건, 이건희, 정운찬, 조갑제, 서정갑 등이 비교적 상위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인지도는 대개 언론 노출도와 비례하므로 언론인이나 언론에 노출빈도가 높은 저명인사가 상위에 오른 것은 불가피하나 그런 중에도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사람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10위권 밖이긴 하지만 조국, 김동길, 이외수, 박원순, 김장훈, 김홍신, 문성근, 김미화, 박세일, 진중권, 강금실, 이문열, 김주하, 김진숙 등도 취향이 분명한 것이다.

    같은 인물에 대해 동시에 영입작업을 벌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이유는 정치권이 찾는 새 인물의 요소를 제대로 갖춘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갈이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과연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신동아 창간 80주년 특집 ‘국민이 원하는 국회의원’ 여론조사의 함의

    1996년 4월 총선 서울 선거에서 신한국당이 선전한 뒤 자축하고 있다.

    정치권 물갈이의 모범적 사례로 간주되는 1996년 15대 총선을 보자. 15대 총선 물갈이의 출발점은 그 한 해 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의 여당 참패였다. 15개 광역시도에서 5개밖에 건지지 못하고 충격적 패배를 당한 여당은 곧이어 다가올 총선의 참패를 예감하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선거준비에 나섰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항명했던 이회창 전 총리를 영입하는 극약처방도 모자라 당명(黨名)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등 민중당 지도부를 받아들였으며 홍준표, 맹형규, 정의화 등 각계의 스타급 인사를 영입했다.

    이들 외에도 참신한 신인을 대거 내세워 무려 42%의 현역교체율을 기록할 만큼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이렇게 영입된 정치신인에 대해 중앙당 차원에서 조직적인 지원이 이루어졌고 청와대 또한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금 한나라당 주요 정치인 대다수가 이때 영입돼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홍준표의 말대로 ‘YS 키즈’인 셈이다.

    1996년 vs 2012년

    15대 총선 물갈이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중요했다. 첫째, 물갈이를 기획하고, 새 인물을 발굴하고, 후보를 지원해 총선 승리를 이끌어낸 강력한 기획집단이 존재한 점이다. YS의 차남 김현철씨와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으로 이루어진 당시 여권의 3각 축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기획-발굴-지원까지 이른바 ‘물갈이의 일괄공정’을 혼란 없이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였다.

    둘째는 범(汎)여권의 절박한 위기의식이었다. 1995년 지방선거의 참패로 공황상태에 빠진 민자당은 당명을 바꿀 만큼 성역 없이 변화와 쇄신으로 돌진했다. 교체대상이 된 현역의원들 또한 거의 예외 없이 시대적 대세와 흐름에 순응했다. 교체에 반발해 탈당하거나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변화와 쇄신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인물교체와 물갈이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결과였다.

    셋째는 김영삼 대통령이 물갈이와 세대교체를 강하게 밀어붙인 점이다. 그는 이전부터 “깜짝 놀랄 만한 젊은 대선후보”라는 발언을 통해 세대교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최연소 국회의원이자 40대 기수론의 주창자답게 물갈이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YS 키즈’의 탄생은 김 대통령의 적극적 의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6년과 2012년의 상황은 몇 가지 점에서 유사하나 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여론이 매우 좋지 않고 그로 인해 여권 현역의원들이 선거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점만 빼면 사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르다. 우선 현 여권에선 세대교체에 확고한 의지를 가진 김영삼과 같은 존재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의지가 없을 뿐 아니라 설혹 있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의 크기에서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에 비견될 수 없다.

    박근혜와 한나라당, 고단한 상황

    1996년의 김 대통령에게 가까운 존재는 오히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세대교체 의지를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박근혜의 대선 전략이 범여권의 단합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이 분열되는 순간 대세론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범여권을 하나로 묶어 관리하는 것은 박근혜에게 필수불가결한 전략적 요처다. 어떻게 설명되고 포장되건 세대교체는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박근혜가 세대교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못하는 이유다.

    또한 지금의 한나라당은 박 전 대표가 세대교체를 선언하는 순간 2008년의 ‘공천학살’ 악몽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 박근혜도, 한나라당도 2008년의 공천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7·4 전당대회를 보면 이점이 분명해진다. 박 전 대표는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원희룡 의원을 대표로 선택하지 못했다. 친이계의 대표성을 담보한 원희룡이 대표가 되었다면 “책임은 친이계가, 성과는 박근혜가”라는 ‘아름다운 구도’가 가능했을 것이다. 원희룡이 ‘6·3 청와대 회동 정신 실천’을 구호로 내세우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화해를 주창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친이계의 전환에 따른 구체적인 시그널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끝내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불안한’ 친이계에 의존하기보다는 힘이 들더라도 자력으로 당을 관리하고 선거를 관리하겠다면서 홍준표를 선택했다. “부담도 성과도 모두 박근혜에게로”라는 선택을 설명하는 데에는 2008년 공천학살의 트라우마 말고 달리 다른 길이 없다. 이 문제는 박근혜와 친박계가 총선과 대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심리적 임계점이다. 2012 대장정의 본격적 출발점이 ‘총선 공천’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2년이 1996년과 다른 또 다른 요소는 물갈이를 일괄공정 식으로 기획, 집행, 지원할 강력한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천심사위원회가 됐건 당대표, 사무총장, 여의도연구소장이 됐건 지금의 한나라당에서 그런 능력을 발휘할 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강력한 추진 주체도 없고 대통령이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확고하고도 강력한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위기의식만 높다고 물갈이가 될 것인가? 혼란스러운 교체는 있을지 몰라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물갈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야 모두 1996년 사례에 주목하는 이유는 물갈이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은 강력한 기획집단이 목적의식적으로 주도한 1996년 사례보다는 27명의 현역 의원이 이심전심으로 불출마선언을 함으로써 거스를 수 없는 물갈이 흐름을 만들어낸 2004년의 한나라당 사례에 더 가깝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박 전 대표는 “공천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납득할 만한 공천기준과 시스템을 만드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인위적 물갈이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천명했다. 1996년 모델의 적용을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2004년 사례뿐이다.

    2004년 불출마 도미노의 배경에는 한나라당이 느낀 심각한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세게 분 탄핵역풍 앞에 풍전등화의 꼴이 된 한나라당을 살리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지도자들부터 몸을 던져야 한다는 절박하고도 처절한 결단과 헌신이 불출마 도미노의 힘이었다. 2012년의 민심은 2004년의 민심 못지않게 사나울 것이다.

    한나라당 처지 또한 2004년 못지않게 고단하다. 이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때의 불출마 도미노가 더 큰 규모와 속도로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도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성냥불인가 촛불인가

    원희룡 의원은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나서면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누군가를 태우는 성냥불이 아니라 스스로 타는 촛불로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불출마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만 그런 원 의원도 자신의 불출마가 반향을 일으켜 자발적인 불출마 선언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공명과 공감 속에서 순리에 따르는 불출마 도미노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 불출마는 불출마를 부를 것이고 명분을 세운 불출마는 그 명분에 합당한 더 좋은 새로운 인물의 부상을 불러올 것이다. 죽고 죽이는 공천학살이 아니라 서로 살려주는 상생의 공천혁명이 불출마 도미노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박근혜도, 박근혜에 대항하는 여야의 차기 도전자들도 물갈이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물갈이의 본질인 권력투쟁의 최종 귀착점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물갈이를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대세로 만들어갈 것인가. 바로 여기에 대선주자들의 1차 승부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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