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무림을 평정한 전설의 태권 스타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1-11-23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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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권격 영화 전성시대, 수많은 액션배우 중 왕호는 단연 돋보였다. 맨손으로 무쇠를 격파하는 무술 실력에 큰 키, 매서운 눈매까지 갖춘 그에게선 이소룡을 이어 아시아 영화계를 평정할 자질이 엿보였다. 홍콩에서 러브콜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독이었다.
    • “현지 배우들이 못하는 것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참고 일했다”고 고백하던 왕호는 때 이른 나이에 한국·홍콩 모두에서 소모되고 만다. 한때 ‘이소룡을 뛰어넘을 단 한 명의 태권 천재’로 불렸던 액션 배우, 왕호를 추억한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중원호객’에서 시원한 발차기 실력을 선보인 왕호.

    1970년대 중반. 한국 극장가는 맨손으로 격투를 벌이는 권격 영화의 세상이었다. 홍콩에서는 쿵푸 영화가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는 태권도 영화, 일본에서는 가라테 영화가 만들어졌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새로운 유형의 권격 액션 영화들이 저마다 대문짝만하게 내거는 홍보문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소룡을 뛰어넘는 권격 스타의 등장’이었다.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등장한 홍콩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신무협 영화들은 단숨에 홍콩과 대만, 동남아시아의 화교 시장을 점령하고 이웃 한국에 상륙, 흥행에 성공했다. 1970년대 초, 동남아 화교 시장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이소룡의 ‘당산대형’은 홍콩과 대만을 넘어 한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었고 당시 아시아 영화의 대표 선수였던 일본 극장가까지 점령해버린다. 아직 할리우드를 넘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이소룡 영화는 아시아 전역을 점령한 최초의 흥행작이었다.

    갑자기 나타났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린 이소룡은 아시아 영화인들과 배우 지망생에게 성공 신화가 됐다. 이소룡 사후 모두 이소룡의 성공 신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성공 신화를 이루기 위해 꼭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소룡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소룡과의 친분이나 그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을 지닌 배우를 내세운 홍콩 영화가 등장한다. 이소룡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소기린도 그와의 친분을 내세워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이소룡 친구인 것은 개인 사정일 뿐, 이소룡의 친구였다고 이소룡 영화를 뛰어넘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시킨 처참한 사례였다.

    포스트 이소룡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이소룡의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사나이가 주연을 한 영화가 등장했다. 신문 광고 상단에는 이소룡과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사나이의 사진이 월계수 이파리로 테두리가 장식된 채 대문짝만하게 놓이고, 그 밑에는 ‘친우 이소룡과 다정했던 한때’라고 적혀 있다.

    광고 문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소룡 너의 뒤를 이어 나 바비킴이 왔다!” “동양의 찰스 브론슨. 찰스 브론슨과 닮았다! 그렇다! 아니다! 그러나 바비킴은 태권과 남성미를 갖춘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새로운 액션 황제의 등극” “미 공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 미국의 무술 잡지 블랙벨트에서 선정한 발재간의 사나이” “이소룡에서 점보 사나이 바비킴의 새 시대가 왔다.”



    광고 문구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하여튼 영화 제목은 ‘죽엄의 승부’. 신문 광고를 본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전 이소룡의 뒤를 이어 액션 영화계를 평정했다는 양소룡이 출연한 ‘홍콩에서 온 불사신’이라는, 이소룡의 ‘맹룡과강’ ‘짝퉁’영화를 보고 매우 실망한 터라 이제야말로 진짜 이소룡의 후계자가 한국에서 등장했다 생각하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다. 이소룡과 찰스 브론슨까지 동원해 영화를 홍보하는 것이 혹시 과대선전은 아닐까 하는. 과연 그랬다.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바비킴이 이소룡의 카리스마와 연기를 따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 프로그램 묘기 대행진을 보고 있던 나는 태권도 묘기를 선보이는 사나이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이름은 김용호. 당시 진행자였던 변웅전 아저씨가 화려한 경력을 소개했는데, 이건 뭐, 이소룡을 뛰어넘을 단 한 명의 태권 천재가 나타난 대사건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로 전국태권도 대회에 전북 남원 대표로 출전해 준우승을 하고, 중3 때는 태권도 대회 단체전 우승. 1970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태권도 체육관을 개설해 사범을 지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해병대 태권도 선수단에 입단, 제대 후에는 세계태권도 선수대회 시범단으로 활약. 그리고 1976년 태권도 영화 ‘흑룡강’으로 데뷔했고, 현재 홍콩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홍콩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화려한 경력의 사나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였던 변웅전 아저씨보다 키도 더 크고, 눈매가 아주 매섭고, 약간의 촌티가 흘렀지만, 그래도 남자 액션 배우로 보자면 그럴듯한 얼굴과 몸이었다. 사나이는 먼저 자신의 주특기인 발차기를 보여주었다.

    핵폭탄 같은 발차기

    돌이켜보면 그보다 2년 전 혜성과 같이 등장한 태권 스타 챠리셸이 있었다. 나팔바지를 입은 늘씬하고 긴 다리로 돌려차기를 하며 한국 태권도 영화의 탄생을 알린 첫 스타였다. 이소룡 닮은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의 성공은 뭐니 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무술 실력보다 멋진 외모와 늘씬하고 긴 다리를 가진 배우를 찾아내려 했다. 신체조건이 좋은 배우라면 태권도 실력이 보잘것없어도 멋진 액션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믿었고 영화는 그 믿음을 증명했다. 챠리셸이 발차기로 상대방의 뺨따귀를 스무 번 이상 연타로 날리는 통쾌함은 그의 무술 실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챠리셸이 발을 들어 올리면 바로 클로즈업해 쾌감을 극대화한 감독의 연출력이 만든 것이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왕호는 2005년 한국과 중국 무술을 결합한 새 무술 ‘대한천지무예도’를 창립하는 등 무술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묘기 대행진에 출연한 이 사나이의 발차기는 이전의 권격 액션 스타들, 챠리셸, 황인식, 황정리, 이소룡과 달랐다. 그의 발차기는 탱크를 움직이는 강력한 피스톤 엔진이었다. 이소룡의 발차기가 강하고 빠르지만 이 사나이의 발차기는 이소룡의 그것을 서너 배는 능가하는 파워와 빠르기를 지녔고, 무엇보다도 핵폭탄 같은 강함이 느껴졌다.

    파워풀한 발차기로 나의 얼을 반쯤 빼놓은 사나이는 이제 격파에 들어갔다. 그의 해머 같은 주먹에 벽돌이 산산조각 났다. 뭐 벽돌쯤이야. 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사나이는 무쇠로 만든 솥뚜껑을 격파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격파했다. 그다음은 물 펌프의 무쇠 손잡이였다. 시장통의 웬만한 약장수 뒤를 따라다니며 온갖 격파를 실제로 봐온 나였지만 무쇠로 된 두께 3㎝가 넘는 물펌프의 손잡이를 격파했거나 격파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저것을 격파한다면 저 사나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 어마어마한 피스톤 발차기 능력을 지닌 진정한 이소룡의 후계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드럼이 연주되고, 사나이의 굳은살 박인 칼보다 더 날카로운 수도(手刀)가 천천히 올라간다. 첫 번째 시도. 무쇠 펌프 손잡이는 부러지지 않고 사나이의 손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사회자 변웅전 아저씨가 당황했지만, 사나이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격파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두 번째 가격. 무쇠는 부러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세 번, 네 번째의 가격. 그의 손은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낭자했다. 다섯 번째 가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쇠 펌프 손잡이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보라! 태권왕 왕호를”

    우와! 나는 사나이 김용호의 팬이 되었고, 그가 이소룡을 능가할 최고의 권격스타가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홍콩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니! 김용호는 한국에서 ‘흑룡강’(김선경 감독, 1976)과 ‘밀명객’(김선경 감독, 1976)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두 편은 그저 그랬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저 사나이는 분명 홍콩에서 뭔가 일을 저지를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김용호는 이름을 왕호로 고치고 홍콩으로 날아갔다.

    얼마 후,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화로 돌아왔다. 왕호 홍콩 진출 제1작 ‘사대문파’(김정용·황풍 감독, 1976). 당시 신문광고 문구 “보라! 태권왕 왕호의 3단 옆차기 도약격파를!”을 보고 나는 외쳤다. “꼭 보겠다, 그의 3단 옆차기를!” 광고 속에서 그의 이름은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아시아 무협 스타 진성의 바로 윗자리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신인이라도 이소룡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이니 홍콩에서도 당당하게 첫 영화에서 주연 자리를 꿰찼을 것이라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동네 친구들에게 왕호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를 열심히 떠들어서 혹하게 만들어 모두 몰고 서대문 로터리의 화양극장으로 갔던 날이. 영화가 시작됐다. 청 왕조의 무술가 진성이 구사하는 최강의 무술 나한진을 격파하기 위해 강호의 사대문파들이 도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초반부터 악역인 홍콩배우 진성이 나와 중원의 사대문파들을 격파한다. 나는 시계를 봤다. 영화 시작 후 30분이 지났다. 진성은 악역이니까 조연이고, 나의 왕호는 분명 주인공. 그런데 왜 주인공이 안 나오지? 아! 악당 진성이 종횡무진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그의 악행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할 때 왕호가 나올 것이다. 조금만 참자. 왕호가 멋지게 나올 것이다.

    30분이 40분이 되고, 나는 왕호가 나오기를 기다리느라 영화 내용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왕호는 안 나온다. 이제 영화의 라스트. 악당 진성과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이제 왕호는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다. 아! 이게 뭔가? 또 속은 건가? 당시 한국 액션 영화 중 사기 치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나는 속았다고 생각하고 체념했다.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 사대문파의 고수들도 진성의 무술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쩔쩔맨다. 사대문파 최고의 위기. 그때 갑자기 사대문파 중 하나인 소림파에서 구원병이 도착한다. 50여 명의 소림 무술승이 우르르 떼거리로 몰려온다. 그리고 그 맨 앞에 머리를 빡빡 깎은 왕호가 달려오고 있었다. 앗! 왕호다. 진성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소림 무술승 중 왕호는 단연 시선을 끄는 탱크 엔진의 피스톤 같은 킥으로 진성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초에 20회 이상의 번개 같은 발차기가 진성을 똥오줌 못 가리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날아차기, 뒤차기 등 온갖 발차기를 선보이는 왕호 앞에 무너지는 진성. 그러나 곧 수많은 승려 속에 왕호는 묻혀버린다. 기운을 차린 이 영화의 주인공들, 곧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나서서 진성을 공격해 그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다. 멋진 발차기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왕호는 주연이 아니고, 단역이었다. 아주 좋게 말하자면 3분 정도 출연한 ‘특별출연’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동네 친구들에게 액션 영화에 관한 모든 신용을 잃어버렸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왕호가 홍콩 진출 전 촬영한 영화 ‘밀명객’의 포스터.



    혹시나, 역시나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홍콩 영화계에서 조역으로 활동한 왕호가 멋진, 그러나 조금은 지쳐 보이는 발차기를 선보인 영화 ‘생사결’.

    낚시를 하다보면 방금 전 미끼를 물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달아난 붕어가 다시 미끼를 물어 잡히는 경우를 본다. 한국 액션 영화에 관한 한 나는 붕어였다. 사기성 광고에 속으면서도 늘 ‘이번에는 혹시나 멋진 영화를 볼까’ 하는 심정으로 극장에 가서 또 속는 신세였다. 1977년, 홍콩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른바 소림사 영화. 1975년 한홍 합작 진성 주연 ‘소림사의 결투’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홍콩 영화계는 소림사 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소림사 18동인’ ‘소림사 십대제자’ ‘소림천하’ ‘소림 목인방’ ‘소림 통천문’ ‘소림 백호문’ ‘소림36방’ 등 소림 무술의 비기를 멋지게 영화화한 홍콩 영화와, 그와 비슷한 ‘짝퉁’ 소림사 영화까지 합해 ‘소림’ 딱지를 붙인 영화가 줄줄이 극장에서 개봉됐다.

    그 다음은 이소룡 영화의 속편 행진. 저마다 ‘이소룡의 후계자’임을 내세운 이소룡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의 배우들이 이소룡의 괴조음과 연기를 흉내 내는 작품들이었다. ‘속 정무문’ ‘신 용쟁호투’ ‘신 당산대형’ ‘신 정무문’에 이어 급기야 ‘불타는 정무문’과 ‘최후의 정무문’까지 나왔는데 대부분 이소룡 영화의 속편이라기보다는 전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내용에 이소룡 닮은 배우가 출연해 이소룡 흉내를 내는 영화였다. 나는 ‘누가 더 이소룡을 닮았나’ 심사하는 심사관이 돼 극장에 드나들었는데, 이여룡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가 나중에는 아주 대놓고 여소룡으로 이름을 바꾼 대만 출신의 배우가 기억난다. 그는 울상을 지을 때만 이소룡과 닮은 깡마른 몸매에 좀 빈티 나는 얼굴의 소유자여서 영화 보는 내내 애쓴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종도란 배우도 있었다. ‘쌍룡비객’이란 영화에서 이소룡 흉내를 냈는데, 라면만 먹고 몸을 만든 사람처럼 없어 보이는 여소룡에 비해 영화 주인공 같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짝퉁’이었다. 이 시기 이소룡 속편 행진 해프닝의 완성은 ‘사망유희’였다.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라스트 몇 장면을 홍콩의 세트장에서 먼저 촬영한 뒤 한국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하려 했지만, 한국의 겨울 추위가 너무 두려워 촬영을 봄으로 연기했다가, ‘용쟁호투’를 계약하는 바람에 이를 먼저 촬영하고 편집하던 중 급사해 미완성으로 남은 영화다. 홍콩 골든하베스트와 미국 워너브러더스는 이소룡의 미완성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정하고 이소룡 역을 대신할 배우를 뽑기로 했다.

    ‘사망유희’의 비극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소룡의 후계자를 뽑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체의 5분의 1 정도만 촬영된 영화의 이소룡 등장 장면 외에 다른 부분은 이소룡 역으로 뽑힌 자가 이소룡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이소룡이 입던 깃 넓은 셔츠에 굽 높은 구두, 나팔바지를 입고 이소룡처럼 머리를 자른 젊은이들이 당구장에 넘쳐났다. 나 역시 쌍절곤을 휘두르고, 괴조음을 흉내 냈지만, 나는 이소룡보다는 홍금보를 더 닮아 결국 포기하고 누가 이소룡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드디어 이소룡 역이 결정됐다. 그 행운아는 다름 아닌 한국 사람이었고, 영화에 출연한 적 한 번 없는 신인 김태정이었다. 은근히 시기와 질투가 났다. 차라리 홍콩이나 대만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인데 한국 사람이라니. ‘어디 두고 보겠어. 이소룡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가는 험한 꼴을 볼 것이다!’

    ‘사망유희’가 완성되고 개봉됐다. 아, 한두 번 속나 했지만 또 속았다. 배우 김태정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나름 열심히 연기했다. 사기극의 주인공은 재능 없고 무능하며 나태하기 짝이 없고 색만 밝히는 감독 로버트 클로즈와 영화사 사장 놈들이었다.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소룡의 클로즈업은 모두 이전에 개봉한 영화에서 짜깁기한 것이었고,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김태정이란 배우의 얼굴을 영화 속에서 한 번도 확인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그는 얼굴의 반을 덮는 잠자리 선글라스를 쓰고 있거나 뒤돌아 있거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최악이었던 것은 이소룡의 사진을 가면으로 쓰고 나온 장면이었는데, 이런 사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길고 지루한 로버트 클로즈의 촬영분이 지나가고 진짜 이소룡이 등장하는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관객석에서 울려 퍼지던 탄성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소룡이 찍은 그 라스트의 10분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길고 긴 줄을 서서 영화관에 들어가 1시간20여 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왕호는 이 영화에 핀치히터로 급파된다. 이소룡 등장 장면 이전까지 영화의 액션 장면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간파한 제작진이 액션 장면 하나를 급히 재촬영한 것이다. 식물원에서 이소룡 역의 김태정과 왕호가 대결한다. 매우 훌륭한 액션 장면이었지만 제작자들의 그 어떤 재능도 발견할 수 없다. 그냥 배우들의 피와 땀만 착취한 것이다.

    특별출연 배우

    ‘사망유희’의 사기극을 잊으려 나는 다시 극장을 찾았다. 홍콩에서 활약하는 왕호의 출연작 ‘중원호객’. 이 영화 포스터에는 홍금보와 왕호 두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왕호의 주연작이구나 했지만, 역시 왕호는 멋진 발차기를 선보인, 좋게 말하자면 특별출연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나의 왕호는 분명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자질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악역으로 출연했던 성형수술 전의 성룡보다는 왕호가 더 카리스마 있고 무술 재능이 넘치는 배우였다. 성룡표 코미디 쿵푸 영화의 첫 시도였던 ‘오룡대협’으로 그의 재능이 발견되기 전까지, 성룡은 그렇고 그런 배우였다. 그런데 왜 왕호는 멋진 발차기를 선보이고는 사라지는, 좋게 말하면 특별출연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나는 스무 살 성인이 됐다. 그리고 또다시 왕호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영화의 제목은 ‘생사결’. 홍콩 영화였다. 극장 간판에는 또 왕호 주연작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흥, 하고 비웃었다. 이제는 성인이 됐으니 더 이상 속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시작됐다. 혹시 왕호가 이제는 홍콩 영화계에서 성공해 주연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하더니, 나는 또다시 왕호의 첫 홍콩 진출작 ‘사대문파’를 보던 초등학생이 돼 이제나 저제나 왕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왕호는 중간쯤 잠깐 출연해 멋진, 그러나 이제는 좀 지쳐 보이는 발차기를 선보이고는 죽어버렸다. 내가 분통이 터지는데 왕호 본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사라진 전설

    태국에서 만든 무에타이 영화 ‘옹박’이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주인공이 두 다리에 불을 붙이고 3~4m를 날아올라 상대방을 날려버리는 멋진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하. 그까짓 것. 이미 30여 년 전 왕호는 두 다리에 불을 붙이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식탁 서너 개를 뛰어넘어 상대방의 몸통을 날려버리는 명연기를 선보였었다. 홍콩으로 건너간 왕호는 정말 열심히 영화 일을 했다. 온몸을 불사르고 영화 출연자 중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멋진 액션 연기를 한 전설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홍콩에서 돌아온 왕호는 야심만만하게 자신이 주연을 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첫 번째가 1977년의 ‘사대철인’이다. 무술이 월등하게 뛰어난 적을 물리치기 위해 주인공 왕호는 일부러 적의 창이 자신의 배를 관통하게 해 적의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고는 적과 포옹해 자기 배에 꽂힌 적의 창으로 자신과 적이 함께 죽는 장렬한 라스트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몇 해 전 상영돼 관객을 감동시켰던 ‘소림사 18동인’과 ‘소림사 십대제자’의 라스트에서 다 보았던, 주인공이 희생해 적과 함께 자폭하는 장렬한 라스트였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한국의 관객 수준을 너무 생각했는지, 주인공 왕호는 적의 창을 배에 꽂고는 껄껄 웃으며 “크하하하. 넌 속은 거야. 넌 이제 무기가 없어. 내 뱃속에 들어와 있잖아. 넌 이제 너의 창에 찔려 죽을 거야”라고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준다. 형편없는 시나리오와 연출. 그가 잠깐 틈을 내 한국에서 만든 영화는 모두 급조된 형편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그의 멋진 발차기를 멋있게 찍어내는 연출조차 한국에는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왕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자신이 직접 감독을 하고 주연을 하며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홍콩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게다가 돈도 모았다. 이제 내가 멋진 영화를 찍겠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홍콩에서 마왕으로 대우를 받았던 황정리가 생각난다. 1980년대 초.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한국 액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수없이 시행착오를 한 왕호가 영화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방법을 알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엿보이는 영화다. ‘흑표비객’(1981). 물론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많고, 당시 극장가를 휩쓴 홍콩의 코미디 쿵푸 영화를 닮으려는 기색이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왕호는 자신만 돋보여서는 영화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무술 액션배우가 아닌, 영화배우가 돼간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오승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조소학 학사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 및 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 수상


    1970년대.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사막의 땅, 사우디로 갔었다. 청소년 시절 왕호의 꿈은 미국에 가서 태권도 사범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내들은 몸뚱이 하나를 밑천으로 멀리 타국으로 날아가 성공하고 싶어했다. 왕호의 인터뷰를 보면 홍콩 액션 배우들이 못하는 것을 자신은 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생각하며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참아내며 일을 했다고 한다. 피와 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육체노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한국 영화계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서로의 재능과 열정을 탕진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제2의 이소룡이 될 수도 있었던 재능 있는 사나이는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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