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 트윈스에서 물러난 김 감독은 일본으로 갔다. 이후 2006년까지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당시 일본으로 막 건너온 이승엽을 지도했다. 2005년 이승엽이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한 후 첫 30홈런을 터뜨린 데는 김 감독의 공도 적지 않다. 이승엽 역시 이에 관해 여러 차례 김 감독의 공이 컸다고 고마움을 표한 바 있다.
SK 와이번스 ‘왕조’를 이룩하다
2006년 SK 와이번스의 러브콜을 받고 국내 무대로 복귀한 김 감독은 2006년 10월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공식 취임했다. 2000년 3월 창단된 SK 와이번스는 김 감독이 취임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한 약체 팀이었다. 신생 구단이라 변변한 스타 선수 하나 제대로 없었고 선수들도 풀이 죽어 있었다. 2006년 성적 역시 6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런 팀을 맡아 첫해인 2007년 곧바로 팀을 우승시켰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 내리 2패를 한 후 4연승하며 우승해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야구 역사상 한국시리즈에서 2연패 후 우승한 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8년에도 SK는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83승43패로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두산 베어스를 맞아 역시 1패 뒤 4연승하며 2연패에 성공했다.
2009년 SK는 정규시즌에서 불과 1경기 차이로 KIA 타이거즈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그러나 부상 선수들이 줄줄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시즌 막판 19연승을 내달리며 KIA 타이거즈를 위협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한국시리즈에서는 KIA와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친 끝에 아쉽게 고개를 숙였다. 특히 7차전에서는 초반 5대 1로 이기다가 투수진의 부족으로 연장전까지 몰렸고 결국 접전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에 무너졌다. 당시 SK 와이번스에도 ‘화려한 조연’‘승자 못지않은 패자’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2010년 SK 와이번스는 한 해 전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84승 47패 2무를 기록하며 가볍게 정규시즌 정상을 탈환했다. 삼성 라이온스와 맞붙은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는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4연승을 내달려 3번째 패권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 삼성 라이온스는 한국시리즈 직후 계약 기간이 4년이나 남은 선동열 당시 삼성 라이온스 감독을 경질했다. 그만큼 패배의 충격이 컸다는 뜻이다.
김 감독은 확고한 ‘일구이무(一球二無)’의 철학을 가지고 약팀 SK 와이번스를 2000년대 후반 한국 프로야구 최강팀으로 변모시켰다. 일구이무는 일시이무(一矢二無)란 고사성어를 변형시킨 것이다. 중국 한나라 때 한 장군이 해 질 무렵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는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활시위를 당겨 호랑이를 명중시켰다. 그런데 살펴보니 화살이 꿰뚫은 것은 호랑이가 아닌 바위였다. 정신을 집중하면 화살로 호랑이는 물론 바위까지 뚫을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말이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현역 선수로 뛰던 20대 시절 이 고사성어에서 ‘화살 시(矢)’ 자를 야구공을 의미하는 ‘공 구(球)’ 자로 바꿔 ‘일구이무(一球二無)’라는 좌우명을 직접 만들었다. 공 하나에 온 정신을 다 쏟아 바위를 뚫고야 말겠다는, 야구에 대한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좌우명이다.
SK 와이번스가 최강 팀이 되기까지 김 전 감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김 감독은 혹독한 훈련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키워나갔다. 그가 오기 전 김광현, 정근우, 최정, 박정권, 박재상, 조동화 등 현재 SK 와이번스의 핵심 선수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무명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지도해 이들을 SK 와이번스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만들었다.
신장암 수술을 받은 노령 감독인데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허리디스크를 앓고, 어깨 인대를 다치는 상황이 생겨도 그는 언제나 마운드에서 선수들과 함께했다. 타자들에게 직접 야구공을 던져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투수들의 투구 자세를 봐줬다. 끊임없는 특강 및 정신 교육을 통해 선수들의 안일한 마음가짐과 태도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