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높은벼루마을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2-01-20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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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마니아들 사이에서 오지 기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 김동률 서강대 교수와 권태균 사진작가가 ‘신동아’ 독자들에게 전국의 오지 마을을 소개한다.
    • 첫 장소로 충북 옥천군 청성면 고당리 고현마을, 일명 ‘높은벼루마을’을 찾았다. <편집자 주>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높은벼루마을에서 가장 젊은, 올해 일흔둘의 박아소 할머니. 멀리 산중턱에 묶어놓고 키우는 개에게 밥을 주러 산길을 나섰다.

    “대처 여자를 안방에 들여오면 옥천 읍내로 아이들 자취방으로 나가서 살았으유,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한다는 핑계로 맘을 달랬고, 줄잡아 다섯 명도 더 데려와 살았지유. 워낙 산골이라 대개 1년을 못 살고 도망갔지만. 몸이 아픈 여자를 데려오면 제가 보약을 달여 먹이기도 했으유….”

    박아소(72) 할머니의 말이다. 요즈음 세태에 누가 믿기나 하겠는가. 박 할머니는 그래서 요즈음은 할아버지 진대석(81) 씨가 떼라도 쓰면 곧바로 옻나무 작대기로 등짝을 후려쳐 항복을 받아낸다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쓴웃음을 짓는다. 어떡하겠는가. 할아버지는 천식이 심해 바짝 야윈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때리는 대로 맞을 도리밖에 없다고 객(客)에게 억울해한다.

    높은벼루마을은 충북 옥천군 청성면 고당리 고현마을의 토종이름이다. 벼랑, 또는 높은 고개를 의미하는 벼루(峴)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 집들이 하늘과 맞닿은 산허리에 촘촘히 박혀 있다.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면 금강유원지를 지나자마자 건너는 콘크리트 다리에서 보면, 멀리 금강 상류 산비탈 벼랑 위에 자리한 마을이 보인다. 이른바 하늘 아래 첫 동네 격이다.

    세간의 관심을 얻지 못하던 마을이 최근 조금씩 알려진 것은 순전히 경부고속도로 신설 구간 덕분이다. 금강유원지를 중심으로 예전의 고속도로를 옆에 두고 부분적으로 8차선 새 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은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차창에서 보는 마을은 신비스러운 공중 정원 같은 느낌. 금강휴게소에서는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근래 들어서는 오지 기행을 즐기는 일부 마니아층 사이에 반드시 들러야 할 성지처럼 알려지고 있다.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충북의 산티아고라 하겠다.

    한때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던 금강 상류 지역, 그래서 그런지 멀리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강가에는 엘도라도 등등 다소 이국적인 이름의, 멋을 한껏 부린 지중해풍 펜션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웅크리고 있다. 정월의 매서운 칼바람 소리를 들으며 북적대던 화려한 지난 여름을 추억하는지도 모르겠다.



    텅 빈 펜션 마당 잔디밭에 차를 두고 가파른 비탈길을 반 시간 남짓 올라가면 직사각형 벼루 같은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초라한, 쇠락해가는 벽지 산촌이다. 시골집이라고 해도 마당이 도회 서민 주택보다도 외려 작다. 손바닥만하다. 딱 여섯 가구인데 노부부가 사는 집이 셋이고, 나머지 세 가구는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 혼자서 산다. 70대가 드물고 대부분 80대의 나이다. 구름 사이에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의 마을에서 논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경사가 조금이나마 완만한 곳에서 과거 밭벼를 심기도 했다지만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옻나무, 호두나무다. 과거 마을 사람들은 마을 동쪽에 있는 날산과 소태배기산을 넘어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에 있는 청성초교 묘금분교나 영동군 심천면 심천초교 길현분교를 다녔다고 하나 오래전에 모두 폐교됐다. 30리를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할머니 말씀에 별달리 맞장구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마을

    물도 귀해 지하수를 뽑아 올려 산꼭대기에 설치한 대형 플라스틱 물통에 저장한 뒤 자연압을 이용해 집집으로 내려 보낸다. 물이 귀하다 보니 작황이라고는 호두와 잡곡이 전부. 특히 이 마을에서 나는 잡곡류는 영동군 심천면 장터에서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박 할머니는 당시 높은벼루마을 사람이 장에 나가지 않으면 그날 장은 잘 안 됐다고 할 정도로 콩과 보리 등은 꽤 알아주었다고 어깨를 들썩인다. 자동차가 필요 없던 옛날에는 살기 좋은 명당임에 틀림없을 마을이지만 지금은 TV에 가끔 등장하는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오지마을보다 더 몰락해 있다.

    마을의 기원은 아무도 모른다. 임진왜란을 피해 왔다는 설도 있고 당파 싸움을 피해 왔다는 소문도 있다. 외지인이 오기 전에는 진(陳)씨 성이 대부분이었다지만 그 연원 또한 알 수 없다고 한다.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옻나무 껍질을 말리는 박아소 할머니. 옻 껍질은 노인들에게 짭짤한 용돈이 된다.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높은벼루마을에서 내다본 북쪽 방향. 금강은 여기서 북쪽으로 치올라 흘러 대청댐을 거쳐 다시 남으로 방향을 바꿔 강경 포구를 통해 서해로 흐른다.

    여느 한국의 산간 마을이 그렇듯 마을에는 버려진 집이 대부분이다. 도회인이 먼 훗날을 꿈꾸며 구입해놓고 집을 돌보지 않아 폐가를 한참 지나 흉가 수준이다. 고작 여섯 가구의 주된 수입은 노령연금과 잡곡류, 호두와 옻 껍질을 내다 판 수입, 노령연금 타는 날은 읍내로 총출동해 짜장면도 사 먹고 시장도 본다고 마을 양지 녘에 모인 어르신들이 좋아한다.

    비탈길은 눈이 내리면 빙판으로 변해 대처로 나가는 길이 완전히 막힌다. 경사가 급해 노인들이 나들이하기는 불가능하다. 눈 덮인 진입로에는 산짐승 발자국이 두드러진다. 마을은 그래도 지금은 돈이 오간다. 가을 내내 벗겨 말려놓은 옻 껍질이 톡톡한 용돈이 된다. 한 꾸러미 3500원하는 옻 꾸러미가 집집마다 늘어져 있다. 도회 시장에 직접 가져다 팔면 5000원이지만 마을에서는 3500원이라고 설명하는 진(陳) 할아버지의 입술이 실룩거린다.

    공덕비 세운 까닭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임도 한 기슭에 있는 마을에 공을 끼친 사람을 기리는 공덕비.

    그래도 아직은 시골인심, 비록 인스턴트 믹스 커피이지만 근사하게 모닝커피를 대접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박아소 할머니는 늦은 아침을 차려 틈입자들에게 대접한다. 청국장에 김치가 전부. 둘러보는 실내에는 화려했던 젊은 날들이 흑백사진으로 스스로를 보여주고 있다. 작은아들이 해병대 갔다 왔고 농업고 나온 큰아들은 면사무소 공무원이라며 설명하는 할머니의 어깨가 우쭐하다.

    느긋하게 아침을 끝낸 할머니는 커다란 쇠죽 솥에 끓인 개밥을 커다란 들통에 담아 플라스틱 물통과 함께 들고 나들이 가자고 한다. 고개 너머 산중턱에 기다리고 있는 개들에게 주는 일일 공양식이다. 임도 한편에는 공덕비 둘이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박 할머니의 남편인 진대석 할아버지의 공덕비, 다른 하나는 외지인 공덕비다. 진 할아버지가 많은 공을 들인 덕분에 마을 진입로가 생겨서 그 덕을 기려 마을 주민들이 조와 수수 콩 팥을 팔아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득한 시절, 텔레비전 수상기를 한 대 선물한 외지인을 기린 비석이다. 당시 텔레비전은 일주일 단위로 마을 주민들이 가져가 돌려가며 시청했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과거지사다.

    개들은 마을을 훨씬 벗어난 건너편 산마루 턱에 묶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산비탈 임도를 반 시간쯤 걸어가자 주인 오는 소리에 반가워하는 개들의 합창이 요란하다. 산등성이 기슭에서 추위에 떨던 집채만한 검은 개가 주인이 다가오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충성을 표한다. 찢기고 어설픈 비닐하우스에는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 여덟 마리의 강아지가 할머니의 발을 핥으며 반가운 신음을 낸다. 박 할머니의 가장 큰 일은 하루 한 번 개밥과 물을 챙겨주는 일, 그나마 눈이 내리면 개들은 언제 올지 모를 주인을 기다리며 길게는 일주일 이상 눈바람 속에 주린 배를 참는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네

    벼루마을의 겨울, 하루해는 너무 짧다. 산은 바람에 못 이겨 스스로 휘파람 소리를 내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강은 깊은 골을 휘돌아 흐른다. 강은 이곳을 거쳐 북쪽으로 대청댐으로 치올라가서 공주 녘을 지나 백마강으로 잠시 이름 바꿔 흐르다가 강경을 거쳐 서해로 이어진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는가. 슬픔도 흐르고 그 짧았던 젊음도 흐른다. 깊은 산간에 생을 맡긴 한 촌로의 인생도 저물었다. 높은벼루마을을 뒤로하고 떠나는 겨울, 배웅하는 할머니의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귓전에 왔다가 바람 속으로 멀어져간다. 또다시 만나 뵙겠다는 나의 약속은 잦아드는 할머니의 야윈 기침소리에 기약조차 멀어져간다. 그 기침소리에는 열여덟 딸기 같은 곱디고운 꿈들이 녹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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