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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 김동률 · 권태균의 오지 기행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높은벼루마을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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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높은벼루마을에서 내다본 북쪽 방향. 금강은 여기서 북쪽으로 치올라 흘러 대청댐을 거쳐 다시 남으로 방향을 바꿔 강경 포구를 통해 서해로 흐른다.

여느 한국의 산간 마을이 그렇듯 마을에는 버려진 집이 대부분이다. 도회인이 먼 훗날을 꿈꾸며 구입해놓고 집을 돌보지 않아 폐가를 한참 지나 흉가 수준이다. 고작 여섯 가구의 주된 수입은 노령연금과 잡곡류, 호두와 옻 껍질을 내다 판 수입, 노령연금 타는 날은 읍내로 총출동해 짜장면도 사 먹고 시장도 본다고 마을 양지 녘에 모인 어르신들이 좋아한다.

비탈길은 눈이 내리면 빙판으로 변해 대처로 나가는 길이 완전히 막힌다. 경사가 급해 노인들이 나들이하기는 불가능하다. 눈 덮인 진입로에는 산짐승 발자국이 두드러진다. 마을은 그래도 지금은 돈이 오간다. 가을 내내 벗겨 말려놓은 옻 껍질이 톡톡한 용돈이 된다. 한 꾸러미 3500원하는 옻 꾸러미가 집집마다 늘어져 있다. 도회 시장에 직접 가져다 팔면 5000원이지만 마을에서는 3500원이라고 설명하는 진(陳) 할아버지의 입술이 실룩거린다.

공덕비 세운 까닭

산은 높고 강은 아득히 흘러 깊은 산간에 웅크린 채 젊음이 갔네

임도 한 기슭에 있는 마을에 공을 끼친 사람을 기리는 공덕비.

그래도 아직은 시골인심, 비록 인스턴트 믹스 커피이지만 근사하게 모닝커피를 대접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박아소 할머니는 늦은 아침을 차려 틈입자들에게 대접한다. 청국장에 김치가 전부. 둘러보는 실내에는 화려했던 젊은 날들이 흑백사진으로 스스로를 보여주고 있다. 작은아들이 해병대 갔다 왔고 농업고 나온 큰아들은 면사무소 공무원이라며 설명하는 할머니의 어깨가 우쭐하다.

느긋하게 아침을 끝낸 할머니는 커다란 쇠죽 솥에 끓인 개밥을 커다란 들통에 담아 플라스틱 물통과 함께 들고 나들이 가자고 한다. 고개 너머 산중턱에 기다리고 있는 개들에게 주는 일일 공양식이다. 임도 한편에는 공덕비 둘이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박 할머니의 남편인 진대석 할아버지의 공덕비, 다른 하나는 외지인 공덕비다. 진 할아버지가 많은 공을 들인 덕분에 마을 진입로가 생겨서 그 덕을 기려 마을 주민들이 조와 수수 콩 팥을 팔아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득한 시절, 텔레비전 수상기를 한 대 선물한 외지인을 기린 비석이다. 당시 텔레비전은 일주일 단위로 마을 주민들이 가져가 돌려가며 시청했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과거지사다.



개들은 마을을 훨씬 벗어난 건너편 산마루 턱에 묶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산비탈 임도를 반 시간쯤 걸어가자 주인 오는 소리에 반가워하는 개들의 합창이 요란하다. 산등성이 기슭에서 추위에 떨던 집채만한 검은 개가 주인이 다가오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충성을 표한다. 찢기고 어설픈 비닐하우스에는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 여덟 마리의 강아지가 할머니의 발을 핥으며 반가운 신음을 낸다. 박 할머니의 가장 큰 일은 하루 한 번 개밥과 물을 챙겨주는 일, 그나마 눈이 내리면 개들은 언제 올지 모를 주인을 기다리며 길게는 일주일 이상 눈바람 속에 주린 배를 참는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네

벼루마을의 겨울, 하루해는 너무 짧다. 산은 바람에 못 이겨 스스로 휘파람 소리를 내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강은 깊은 골을 휘돌아 흐른다. 강은 이곳을 거쳐 북쪽으로 대청댐으로 치올라가서 공주 녘을 지나 백마강으로 잠시 이름 바꿔 흐르다가 강경을 거쳐 서해로 이어진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는가. 슬픔도 흐르고 그 짧았던 젊음도 흐른다. 깊은 산간에 생을 맡긴 한 촌로의 인생도 저물었다. 높은벼루마을을 뒤로하고 떠나는 겨울, 배웅하는 할머니의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귓전에 왔다가 바람 속으로 멀어져간다. 또다시 만나 뵙겠다는 나의 약속은 잦아드는 할머니의 야윈 기침소리에 기약조차 멀어져간다. 그 기침소리에는 열여덟 딸기 같은 곱디고운 꿈들이 녹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동아 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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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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