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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21 <마지막회>

전통 고집, 경쟁자 제거하고 독일 상징도 만들다

바이에른公國의 빌헬름 4세와 맥주순수령

  • 김원곤 |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전통 고집, 경쟁자 제거하고 독일 상징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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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 보헤미아 왕을 겸하던 헝가리의 왕 로요슈 2세(1506~1526)가 술레이만 1세(1494~1566)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사망했다. 그러자 동생 루트비히 10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하려 했는데 빌헬름 4세는 이에 동조했다. 그 바람에 강력한 가톨릭 세력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이 갈등은 1534년 빌헬름 4세와 루트비히 10세가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나중에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됨)와 린츠에서 협정을 맺으면서 종결된다. 이러한 관계 회복 덕분에 1546년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과 전쟁을 치를 때, 빌헬름 4세는 카를 5세 황제의 강력한 지원자가 된다. 1560년 이러한 빌헬름 4세가 사망해 뮌헨의 프라우엔 교회에 안치되었다.

빌헬름 4세는 예술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어 수많은 미술품을 수집했다. 1523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한 가장 큰 업적은 맥주순수령 반포였다. 맥주순수령은 훨씬 이전인 1487년부터 꾸준히 제안됐기에 일부 사람들은 1487년을 맥주순수령의 원년으로 보기도 한다.

맥주순수령 반포는 맥주의 기본 품질 확보와 함께 제빵산업에 필요한 곡물을 원활하게 유통되게 한 측면이 있다. 맥주 원료 곡물을 보리로 엄격히 제한한 맥주순수령 덕분에 제빵업계는 밀이나 호밀과 같은 곡물을 확보해 충분한 양의 빵을 시중에 공급할 수 있었다. 맥주순수령에는 효모가 빠져 있는데, 이는 맥주 발효에는 효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양조업자들은 경험을 통해 앞서 술을 만들었던 통에 남아 있는 침전물을 그 다음 술 만드는 통에 넣으면 술이 쉽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전에 만든 술 찌꺼기를 구할 수 없으면 재료를 담은 술통을 적절한 장소에서 열어둠으로써, 자연 효모가 술에 증식하게 했다. 효모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술이 잘되는 장소가 있다는 경험에 따라 술을 만들어온 것이다.



맥주순수령이 홉의 사용을 강조한 것은 홉이 맥주 특유의 쌉쌀한 맛을 내게 한다는 미각적 이유와 함께 맥주 보존법의 관행도 작용했다. 홉 사용이 본격화하기 전 양조업자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 맥주를 상하지 않게 보존했다. 여기에는 쐐기풀, 사리풀(유럽산 독풀), 숯 검댕과 광대버섯(파리잡이 종이에 칠하는 독을 뽑았던 버섯)도 포함돼 있었다. 독초는 소비자를 빨리 취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때문에 맥주 품질 보장을 위해서라도 홉만 사용하도록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통일 전제조건이 맥주순수령 유지

이런 배경에서 빌헬름 4세는 1516년 4월 23일 지배계층(Gentry)과 기사들을 바이에른 공국 내의 잉골슈타트 시(市)에 소집해 맥주 제조에 물, 홉, 보리 이외의 어떤 재료도 첨가하지 못하게 하는 맥주순수령을 공식 반포했다. 법령을 어기면 언제든지 생산된 맥주를, 아무런 보상 없이 압류 조처할 수 있다는 처벌 조항도 명기했다. 맥주순수령은 공국 국민의 호응을 받으며 확고하게 정착됐다. 그리고 전 독일에 퍼져 맥주 제조 관행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1871년 프러시아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바이에른을 포함한 남부 독일국가들과 협상해 마침내 독일 통일을 이루어냈다. 1월 18일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며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독일 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독일 제2제국은 4개 왕국, 18개 공국, 3개 자유시 등 25개 국가와 제국령(알자스-로렌 지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통일 협상을 할 때 바이에른 공국은 자랑스럽게 지켜온 맥주순수령을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지켜줄 것을 중요 조건 중의 하나로 내걸었다. 그렇게 해야 다른 재료로 맥주를 만들고 있던 다른 지역의 양조업자들은 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했으나 프러시아는 바이에른의 명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맥주순수령은 바이에른을 떠나 통일 독일의 중요한 맥주 제조 원칙이 되었다. 이 조처로 북부 독일에서 유행하던 체리 맥주나 향신료 맥주 등은 완전히 갈 길을 잃었다.

세월이 흘러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다. 동독은 맥주순수령을 적당히 적용했으나 서독은 맥주순수령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서독은 1952년 맥주순수령을 맥주과세법(Biersteuergesetz)에 편입시켜 취지를 이어갔다. 서독은 서독산 맥주는 물론이고 수입 맥주도 이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벨기에와 영국에서는 맥주순수령은 서독 맥주를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영국과 벨기에 등은 옥수수나 쌀을 원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설탕 같은 기타 첨가물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불만이 누적돼 1988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가 맥주순수령에 의한 맥주 원료 제한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판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판결은 서독으로 수입되는 외국산 제품에만 적용되었다. 서독은 자국산 맥주에는 맥주순수령을 계속 적용하고, 맥주순수령을 서독 맥주의 자랑으로 적극 홍보했다.

1990년 재통일을 이룬 독일이 1993년 맥주순수령을 둘러싸고 ‘브란덴부르크 맥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베를린 동쪽 100km 정도에 있는 브란덴부르크주 노이젤이라는 마을에서 헬무트 프릿슈가 옛 수도원 양조장에서 지역 명산인 흑맥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통일 후 유예 기간이 지나자 맥주순수령이 구 동독 지역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주정부는 헬무트 프릿슈가 만든 흑맥주는 맥주순수령을 어기고 설탕을 첨가했으니 맥주라는 용어를 쓸 수 없다는 제재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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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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