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11-20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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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는 ‘빅3 테너’로 불린다. 1990년 로마월드컵 결승전 전야제 때 이 3명의 테너가 고대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에서 벌인 역사적인 ‘3테너’ 공연은 지금도 많은 음악 애호가의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 있다.
    • 특히 육중한 몸매에서 뿜어 나오는 천상의 목소리에 덥수룩한 구레나룻이 제법 잘 어울렸던 파바로티는 성악의 대중화를 이끈 ‘빅 테너’로 평가받는다. 2007년 영면에 들 때까지 세계 최정상의 테너로서 활동하며 성악을 대중화한 불세출의 스타는 이제 ‘20세기의 전설’로 남았다.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1935~2007)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모데나에서 빵가게를 하는 아버지 페르난도와 담배공장에 다니는 어머니 아델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파바로티도 어린 시절을 파시스트와 레지스탕스의 대결 속에 어수선하게 보냈다.

    파바로티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 숙원이던 합창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먼 곳에 있는 극장에 아들을 데리고 가는 열성팬이자 아마추어 테너였다. 빵가게와 가정에는 항상 음악이 넘쳐났고, 그도 아들과 함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파바로티 음악세계의 자양분이었다. 파바로티는 누가 보아도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넘쳤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일까. 파바로티는 어릴 적부터 성악에 두각을 나타내 아버지와 함께 아마추어합창단과 교회성가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리 직업 성악가의 길을 가려는 아들을 말렸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의 책임감 때문에 그 길의 선택하지 못한 아버지는 성악가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체육교사가 되려던 아들의 마음을 잡아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보험설계사 파바로티

    당시 이탈리아 국민은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였다. 마음의 치료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오페라극장으로 몰려갔고, 자연히 오페라가수는 최고 인기를 누렸다. 파바로티는 어머니의 든든한 지원사격 덕에 아리고 폴라, 에토레 캄포갈리아니 교수를 사사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보조교사와 보험설계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특유의 친화력을 앞세운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많은 여성 고객을 유치해 보험업계에서 ‘정규직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단역이지만 꾸준하게 일이 맡겨지자 그는 미련 없이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성악에만 전념했다. 동갑내기 ‘절친’인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는 일찌감치 데뷔해 세계 유수의 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파바로티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극장의 조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를 회상할 때 파바로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에는 깜깜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조마조마했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긍정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음식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를 이끈 원동력은 꾸준한 노력이었겠지만 이 말은 밝고 낙천적인 성격과 음식을 사랑하는 그의 절대미각을 보여준다. 1961년 모데나 극장에서 오페라 ‘라보엠’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그는 승승장구해 단숨에 세계를 아우르는 테너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무대 위의 암투가 데뷔 전의 불안감보다 그를 더욱 초조하게 했는지 그는 맛있는 음식에 더욱 의지했다. 나날이 살이 쪘다. 몸무게가 180kg이라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왔지만, 초창기의 파바로티는 무대를 꽉 채워주는 건실하고 듬직한 테너임은 분명해보였다.

    리처드 보닝과의 만남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3년 12월 13일 35세 연하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린 직후 파바로티가 아내와 11개월 된 딸 알리체와 함께 찍은 사진.

    파바로티의 경력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리처드 보닝이라는 지휘자였다. 비범하고 특출한 테너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갈 길이 멀었던 파바로티에게 보닝은 1963년 호주 투어를 제안했다. 보닝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무시하지 못할 제작자이기도 했다. 보닝은 부인인 소프라노 준 서덜랜드의 파트너를 할 만한 테너를 찾고 있었다. 신장이 180cm 정도 되는 그의 부인은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음악계의 주목받는 소프라노였다. 소프라노 중에서도 높은 음색을 가진 레제로 파트였다. 그런데 비슷한 음색의 상대역 테너들은 키가 작았다. 아무리 키높이 구두를 신겨도 사랑의 이중창을 할 때면 소프라노의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보면 세기의 연인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로 보여 극적 현실감이 떨어졌다. 마침 혜성같이 등장한 ‘하이 C의 제왕’ 파바로티는 다른 테너가 어려워하며 부르길 꺼리는 하이 C음, 즉 ‘C4(가온 도)’에서 두 옥타브 위의 C6(높은C, 도)음을 자유자재로 내는 음역을 가지고 있었다. 테너가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을 ‘하이 C’라고 한다. 안정적으로 내는 하이 C는 좋은 테너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다. 파바로티는 ‘하이 C의 제왕’이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파바로티의 음색, 레퍼토리, 180cm의 신장까지 모든 면에서 서덜랜드의 상대역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후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둘은 세계를 누비며 30년 가까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파바로티는 더 이상 프리마돈나의 비호를 받는 초보 테너가 아니었다. 상황이 역전되어도 보닝 부부는 파바로티를 30년 전 파바로티로 대우해 그들의 관계는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왕래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이미 거동이 불편하고 생명이 4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서 파바로티는 거주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볼로냐에 공로상을 받으러 온 서덜랜드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는 영상을 보냈다. 세 사람은 다시 45년 전 처음 만난 날처럼 신뢰와 존중의 관계로 해후했다.

    파바로티는 일생 동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379회,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140회, 런던의 코벤트가든에서 96회 등 세계 최고의 극장을 두루 섭렵했고, 수많은 진기록을 낳았다. 1988년 독일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렀을 때는 무려 1시간 7분 동안 박수가 이어져 무대 인사를 165번이나 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100여 장의 앨범을 취입했으며,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에서는 비를 맞으면서도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부부를 비롯한 15만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지켰고, 2년 후 뉴욕의 센트럴파크 공연에서는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50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불후의 명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블레이크 에즈워드 감독은 “꾀꼬리와 쥐들도 파바로티의 노래를 감상하기 위해 센트럴파크로 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후 30만 명의 파리 시민 앞에서 성공적인 야외공연을 이끌며 가장 대중적인 성악가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1983년 스칼라극장에서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 중에는 심오하고 애달픈 아리아 대목에서 음이 틀려 관객들의 야유를 받았고, 1992년에는 스칼라극장의 개막 오페라인 ‘돈 카를로스’를 공연하면서 악보를 외우지 못해 ‘버벅대던’ 사건도 있다. 그러나 일생 동안 그의 과오에 대한 비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세금 때문에 주소지를 몬테카를로로 옮겨 영주권을 획득했을 때에도, 1992년 모데나에서 자신이 주최해 연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에서 사상 초유의 립싱크를 했을 때도, 심한 여성 편력이 기사에 오를 때에도, 탈세로 기소당해 벌금형을 선고받았을 때에도 비난 여론은 들끓었지만 모두들 그에게 ‘마에스트로’라는 존칭은 잊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공인의 탈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처벌한다. 최고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도 1980년대에 탈세 혐의로 17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2000년 250억 리라(한화 약 150억 원)의 벌금을 납부하면서도 파바로티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탈세자는 국내에서 돈을 벌어 외국으로 빼돌리는 파렴치한들에게나 하는 말이고, 나는 1년에 300일을 외국에 머물며 성실히 돈을 벌어 국내에 가지고 왔다. 내가 왜 탈세자인가?” 그는 너무나 명료하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내가 왜 탈세자인가?”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슈퍼스타 테너 3인방’으로 꼽혀온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파바로티(왼쪽부터)가 1996년 일본 도쿄에서 함께 공연하고 있다.

    대중의 평가는 항상 그에게 너그럽고 후했지만, 음악평론계는 그에게 인색했고 각박했다. 그의 연기는 리얼리티가 결여되고 음악은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판받았다.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악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해 본인만의 표기로 기보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에 평단의 비웃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판 수위가 정점에 오른 때는 그 유명한 ‘3 테너’ 공연 당시였다. 공연 목적이 아무리 자선기금 모금이었다고 해도 1990년의 첫 번째 공연이 1000만 장의 음반과 700만 개의 영상물로 판매되며 대성공을 거두자 그들도 주머니가 두둑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 전야제에서 다시 ‘3테너’ 콘서트를 열었다. 사실 3명의 테너가 공연을 한다는 것은 레퍼토리 선정에서 그리 녹록지 않다. 각각 독창으로 본인들의 애창곡을 고르고 서로 함께 부르는 곡들은 민요에서 찾다보니 작품의 일관성이 없었다. ‘상업적인 악취가 진동하는 끔찍한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탄탄한 비즈니스로 자신들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리기를 원했고 결국 세계 투어를 단행한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필자의 유학생활 당시 이탈리아 성악교수들은 “지구상에는 3가지의 성(性)이 있다. 여자, 남자 그리고 테너(남성 고음파트)”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본인의 소리중력과는 반대로 고음을 내는 테너는 항상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하기 때문에 가늠이 불가능한 질투와 괴팍스러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감시와 견제를 하는 경쟁의 위치에 있는 테너들끼리 서로 우정을 나눈다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비록 소리의 질감과 주요 레퍼토리는 다르지만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매년 서로의 레퍼토리를 비교하며 서로를 민감하게 주시했다. 카레라스는 이 두 대가에 비하면 전성기가 매우 짧았고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했기 때문에 소리가 예전만 못했다. 오히려 혼자 공연을 끌고 가는 것보다는 밀도 있는 집중력으로 몇몇 곡에만 힘을 쏟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다. 새로운 2000년의 시대가 오는 시기에 저물어가는 테너들의 노익장이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사실 아무도 예상 못했다. 런던공연에서는 2시간 30분 공연 동안 각각 13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언론은 ‘한 단어에 70만 원씩 벌었다’며 비아냥거렸다. ‘3테너’의 이름으로 그들은 총 19회 공연을 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수입은 짐작만 할 뿐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 이후에 3명의 남자 성악가가 모여 ‘빅3’, ‘스리 테너’라는 타이틀로 합동공연을 여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생겨났지만 진정한 ‘원조 빅3’는 변하지 않았다.

    성악가가 아니면 체육교사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파바로티는 운동을 아주 즐겼다. 유벤투스의 광팬으로 축구를 즐겼으며, 믿기지 않지만 체중이 130kg 정도 될 때까지는 직접 승마도 했다고 한다. 자동차 운전과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다. 그는 데뷔 당시에 자신의 얼굴에 특징이 없다고 생각해서 수염을 길렀고, 원래 진한 눈썹이지만 항상 아이펜슬로 버릇처럼 수염과 눈썹을 진하게 화장했다. 평상시에는 화려한 스카프와 챙이 달린 흰색 모자를 즐겨 착용했고, 무대에서는 항상 하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비석같이 움직임이 없는 무대 연기력은 항상 지적을 받았지만 움직이지 않고 표정 연기와 바스트 장면이 많은 영화에는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조리기구가 담긴 가방

    해외 연주가 잦은 만큼 그는 항상 이삿짐 같은 짐들을 가지고 다녔다. 가방에는 음식 조리기구와 식재료가 담겼고, 별도의 약 가방도 있었다. 몸이 악기인 만큼 관리를 잘해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으니 당연한 가방이었다. 과체중으로 신경통을 비롯한 많은 합병증이 생겨서 주의를 요했으니 약가방도 필수였다. 그래서 이를 관리하는 비서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고, 여비서들은 파바로티와 은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1961년 결혼한 아내 아두아는 고향에서 조용하게 아이들과 함께 머물며 사업적인 동지로 파바로티의 모든 것을 눈감아주었다. 그러다 파바로티와 35세나 차이 나는 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의 스캔들로 이탈리아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파바로티도, 아두아도, 니콜레타도 모두 불륜을 부정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1996년 어느 연예잡지에 파바로티와 니콜레타가 해변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포착한 파파라치의 사진이 대서특필됐다. 필자도 파바로티의 이름이 실려 그 잡지를 구입했는데, 연인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몹시 ‘친밀한’ 행동들이었다. 혹자는 니콜레타가 계산적으로 언론에 흘렸을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했으나 어쨌든 사진이 공개된 지 한 달 만에 파바로티와 아두아는 합의이혼을 했다.

    2000년 아두아는 법정투쟁 끝에 이미 성인이 된 3명의 딸의 양육비를 포함해 1억2000만 달러(당시 약 1120억 원)의 위자료를 받았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아두아는 여전히 고향 모데나에서 파바로티의 부모님과 3자녀와 함께 살면서 파바로티의 명성으로 하던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2003년 파바로티는 니콜레타와의 사이에서 딸 엘리스를 얻었고 그해 12월 이혼숙려기간이 지나자 니콜레타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았고 오페라 전곡을 소화하기는 무리였지만, 2003년 그는 15년 전에 1시간이 넘는 박수갈채를 받았던 독일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공연했다. 2004년에는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무난히 공연했다. 전성기의 체력도 음성도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혼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주를 선사했다.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로 답했지만 그도, 관객도, 다른 연주자들도 이 무대가 본 극장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파바로티 자취라는 것을 알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파바로티는 12년 동안 10회의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자선 콘서트를 인구 18만 명의 고향인 모데나에서 개최하면서 모데나를 국제적인 음악도시로 알렸다. 다이애나와 달라이라마는 물론 마이클 볼튼, 스파이스 걸스, 셀린 디옹, 본 조비, 스티비 원더, 리키 마틴, 머라이어 캐리 등 팝계의 수많은 별을 출연자로 초청해 크로스오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론 음악적으로 많은 부작용이 있었으나 이를 크로스오버라고 장르를 구분해서인지 음악평론계에서의 반발은 거세지 않았다.

    행사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후원사인 이탈리아 국영방송국 RAI에서 지원금을 축소하자 200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연을 열지 못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칼리프 왕자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들고’를 부르고는 파바로티는 무대에서 영원히 내려왔다. 5개월 뒤 악성췌장암 수술을 받았지만, 이듬해 세계를 호령하던 거장은 이탈리아 페사로에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국립오페라극장은 입구에 검은 천을 내렸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무대 커튼을 검은 천으로 바꾸어 달았다. 고향 모데나의 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는 29년 전 파바로티가 같은 장소에서 아버지 페르난도와 듀엣으로 부른 ‘생명의 양식’ 영상을 보여주며 거장의 퇴장을 추억했다. 네 살짜리 막내딸 알리체가 “계속 나를 지켜달라”는 조사를 낭독할 때는 장내가 숙연해졌다. 포도주는 항상 고향 모데나산을 고집할 정도로 고향에 애착을 가졌던 그는 고향의 가족묘지에서 평온한 휴식을 하고 있지만 그가 한 획을 그은 성악의 대중화라는 혁신적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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