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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16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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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로티는 일생 동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379회,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140회, 런던의 코벤트가든에서 96회 등 세계 최고의 극장을 두루 섭렵했고, 수많은 진기록을 낳았다. 1988년 독일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렀을 때는 무려 1시간 7분 동안 박수가 이어져 무대 인사를 165번이나 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100여 장의 앨범을 취입했으며,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에서는 비를 맞으면서도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부부를 비롯한 15만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지켰고, 2년 후 뉴욕의 센트럴파크 공연에서는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50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불후의 명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블레이크 에즈워드 감독은 “꾀꼬리와 쥐들도 파바로티의 노래를 감상하기 위해 센트럴파크로 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후 30만 명의 파리 시민 앞에서 성공적인 야외공연을 이끌며 가장 대중적인 성악가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1983년 스칼라극장에서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 중에는 심오하고 애달픈 아리아 대목에서 음이 틀려 관객들의 야유를 받았고, 1992년에는 스칼라극장의 개막 오페라인 ‘돈 카를로스’를 공연하면서 악보를 외우지 못해 ‘버벅대던’ 사건도 있다. 그러나 일생 동안 그의 과오에 대한 비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세금 때문에 주소지를 몬테카를로로 옮겨 영주권을 획득했을 때에도, 1992년 모데나에서 자신이 주최해 연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에서 사상 초유의 립싱크를 했을 때도, 심한 여성 편력이 기사에 오를 때에도, 탈세로 기소당해 벌금형을 선고받았을 때에도 비난 여론은 들끓었지만 모두들 그에게 ‘마에스트로’라는 존칭은 잊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공인의 탈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처벌한다. 최고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도 1980년대에 탈세 혐의로 17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2000년 250억 리라(한화 약 150억 원)의 벌금을 납부하면서도 파바로티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탈세자는 국내에서 돈을 벌어 외국으로 빼돌리는 파렴치한들에게나 하는 말이고, 나는 1년에 300일을 외국에 머물며 성실히 돈을 벌어 국내에 가지고 왔다. 내가 왜 탈세자인가?” 그는 너무나 명료하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내가 왜 탈세자인가?”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

‘슈퍼스타 테너 3인방’으로 꼽혀온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파바로티(왼쪽부터)가 1996년 일본 도쿄에서 함께 공연하고 있다.

대중의 평가는 항상 그에게 너그럽고 후했지만, 음악평론계는 그에게 인색했고 각박했다. 그의 연기는 리얼리티가 결여되고 음악은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판받았다.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악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해 본인만의 표기로 기보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에 평단의 비웃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판 수위가 정점에 오른 때는 그 유명한 ‘3 테너’ 공연 당시였다. 공연 목적이 아무리 자선기금 모금이었다고 해도 1990년의 첫 번째 공연이 1000만 장의 음반과 700만 개의 영상물로 판매되며 대성공을 거두자 그들도 주머니가 두둑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 전야제에서 다시 ‘3테너’ 콘서트를 열었다. 사실 3명의 테너가 공연을 한다는 것은 레퍼토리 선정에서 그리 녹록지 않다. 각각 독창으로 본인들의 애창곡을 고르고 서로 함께 부르는 곡들은 민요에서 찾다보니 작품의 일관성이 없었다. ‘상업적인 악취가 진동하는 끔찍한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탄탄한 비즈니스로 자신들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리기를 원했고 결국 세계 투어를 단행한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필자의 유학생활 당시 이탈리아 성악교수들은 “지구상에는 3가지의 성(性)이 있다. 여자, 남자 그리고 테너(남성 고음파트)”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본인의 소리중력과는 반대로 고음을 내는 테너는 항상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하기 때문에 가늠이 불가능한 질투와 괴팍스러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감시와 견제를 하는 경쟁의 위치에 있는 테너들끼리 서로 우정을 나눈다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비록 소리의 질감과 주요 레퍼토리는 다르지만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매년 서로의 레퍼토리를 비교하며 서로를 민감하게 주시했다. 카레라스는 이 두 대가에 비하면 전성기가 매우 짧았고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했기 때문에 소리가 예전만 못했다. 오히려 혼자 공연을 끌고 가는 것보다는 밀도 있는 집중력으로 몇몇 곡에만 힘을 쏟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다. 새로운 2000년의 시대가 오는 시기에 저물어가는 테너들의 노익장이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사실 아무도 예상 못했다. 런던공연에서는 2시간 30분 공연 동안 각각 13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언론은 ‘한 단어에 70만 원씩 벌었다’며 비아냥거렸다. ‘3테너’의 이름으로 그들은 총 19회 공연을 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수입은 짐작만 할 뿐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 이후에 3명의 남자 성악가가 모여 ‘빅3’, ‘스리 테너’라는 타이틀로 합동공연을 여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생겨났지만 진정한 ‘원조 빅3’는 변하지 않았다.

성악가가 아니면 체육교사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파바로티는 운동을 아주 즐겼다. 유벤투스의 광팬으로 축구를 즐겼으며, 믿기지 않지만 체중이 130kg 정도 될 때까지는 직접 승마도 했다고 한다. 자동차 운전과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다. 그는 데뷔 당시에 자신의 얼굴에 특징이 없다고 생각해서 수염을 길렀고, 원래 진한 눈썹이지만 항상 아이펜슬로 버릇처럼 수염과 눈썹을 진하게 화장했다. 평상시에는 화려한 스카프와 챙이 달린 흰색 모자를 즐겨 착용했고, 무대에서는 항상 하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비석같이 움직임이 없는 무대 연기력은 항상 지적을 받았지만 움직이지 않고 표정 연기와 바스트 장면이 많은 영화에는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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