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후배들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정치 노조’는 끝내야”

김재철 前 MBC 사장 사퇴 후 첫 인터뷰

  • 김지영 기자 | kjy@donga.com

    입력2013-04-19 09: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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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보수주의자, DJ에게 리더십 배웠다
    • MBC 기여한 ‘선덕여왕’ 이요원에게 120만 원짜리 선물
    • ‘PD수첩’은 없어선 안 될 프로그램…정정당당해야
    • 8시 뉴스 시청률 9%대 회복…후배들이 돌아오고 있다
    • 후배들 미워하지 않는다, 언젠가 내 마음 알아줄 것
    “후배들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정치 노조’는 끝내야”
    사실 좀 뜻밖이었다. 김재철(60) 전 MBC 사장과의 인터뷰가 순조롭게 성사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김 전 사장은 2010년 ‘신동아’가 단독 보도한 김우룡 당시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장의 ‘큰집 조인트’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 일로 사장 재직기간 내내 ‘낙하산 인사’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가 거듭된 인터뷰 제의에 “4월 13일 오후 3시에 보자”고 답을 보내왔다.

    약속한 시각,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음식점. 김 전 사장은 감색 신사복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캡 달린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요즘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도 그럴 것이, 최근 3년여 동안 김 전 사장은 MBC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역대 어느 사장보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콘텐츠 개발, 글로벌 사업 다각화 등을 이룬 것은 공(功)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남긴 상처도 만만찮다. 170일간의 노조 파업과 230명 넘는 노조원 징계, 파업 대체인력으로 뽑은 계약직 기자의 정규직 전환 등은 MBC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다.

    그는 임기가 끝나지 않은 3월 27일 사표를 내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 MBC 사장에 취임한 지 3년 1개월 만이다. 취임 첫날부터 계속된 노조의 사퇴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가 스스로 회사를 나온 데는 MBC 대주주인 방문진의 해임 의결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방문진 이사들은 3월 26일 이사회에서 그가 지역사, 자회사 사장 인사를 멋대로 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사상 처음 ‘MBC 사장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김 전 사장 재임 기간 세 차례나 해임안을 부결시킨 방문진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마주 앉자마자 그 얘기부터 꺼냈다.



    신라 장군 vs 백제 장군

    ▼ 인터뷰를 꺼릴 줄 알았다.

    “MBC 사장으로 있을 때도 정식 인터뷰는 한 번밖에 안 했을 거다. 오늘 인터뷰도 회사 나와 처음 하는 거고. 요즘은 언론이 논조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터뷰를 많이들 꺼리더라. 특히 좌쪽에 있는 언론이. 문화예술인도 문화권력인데 80~90%는 진보 쪽이다. 중도보수 쪽에 있으면 외로운 싸움이 불가피하다. 영화 좀 기획해서 만들려고 하면 막 몰아치니까.”

    ▼ 노선이 중도보수인가.

    “보수개혁주의자다. 한군데 있기를 싫어한다. 스타일 자체도 그렇고.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한다. 그게 재미있으니까.”

    ▼ 노사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는데 책임을 느끼나.

    “노조 후배들이 화가 풀리기를 계속 기다리는 거다. 화 풀린 후배들은 돌아오라. 다들 젊은 기자시절이 있었으니까 화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기사를 거칠게 쓰는 기자들도 이해한다. 다만 사실이 아닌 걸 그냥 둘러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 편집에 관여하지 않았나.

    “전혀 안 했다. FTA(자유무역협정)라든지 지금 이슈인 핵 문제라든지 정부에 중요한 사안은 의견을 제시했다. 취재를 하지 말라든지, 방향을 간섭하는 게 아니라.”

    ▼ 청와대에서 압력 받은 적 있나.

    “MBC 문제로 기분이 상해서 전화하기도 한다. 정무수석이든 홍보수석이든. 그럼 한참 들어주고 나서 말한다. 우리도 국민을 위한 방송인데 우리가 판단해서 한다고. 마음 다치지 않게 일단 설명한 다음 내 뜻대로 한다. 그게 사장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정부에서 신경 써달라고 했다고 얘기하면 데스크는 ‘(기사를) 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나.

    “부장들하고는 내가 통화를 전혀 안 한다. 보도본부장이나 보도국장이 책임자니까 그쪽에 의견을 묻는데, 국장이 ‘지금은 보도를 안 하는 게 나은 거 같다’고 하면 그냥 끝낸다. 임원회의를 할 때도 충분히 토론한다. 임원과 본부장들 10명 정도가 회의를 하니까 3명만 오케이 하고 7~8명은 아닌 거 같다고 얘기하면 굳이 추진 안 한다. 좀 섭섭해도 기다린다.”

    ▼ 해고 등 징계, 인사 문제, 신천동 교육 조치, 노조 탄압…가혹하지 않나.

    “나도 가슴이 아프다. 근데 김유신은 신라 장군, 계백은 백제 장군이다. 두 분이 잘 알더라도 이념 싸움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거다. 왜 후배들을 안 아끼겠나. 난 어떤 후배에게도 한이 전혀 없다. 언젠가 후배들도 선배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젊었을 땐 선배한테 꾸지람 듣고 화가 나서 술 마시고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들이 옳은 얘기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 파업 대체인력 투입도 임원회의에서 결정한 일인가.

    “작년 1월 30일 파업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내가 그랬다. 기자들이 다 나가버렸는데 방송을 펑크 낼 순 없고, 기본적인 건 메워야 하는데 사람은 없고…그러면 부장들이 쓰러진다. 탈진한다. 화가 나면 자기들도 지쳐서 후배들과 마찰이 더 심해지지 않나. 그럴 때는 라디오 뉴스를 줄여라, 텔레비전 뉴스도 줄여라, 화가 나서 너무 지쳐버리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했다. 파업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부터 사람을 좀 뽑자 그랬다. MBC는 50년이 돼서 너무 안정돼 있다. 파도가 없다. 때로는 밖에서 충격이 와야 회사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봤다. 앞으로 회사가 더 잘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꿈은 부국장”

    “후배들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정치 노조’는 끝내야”

    3월 26일 방문진 이사회에서 해임 의결된 김재철 당시 MBC 사장.

    ▼ 그들을 정규직으로 돌려 말이 많은데.

    “파업 후 한 달째부터 사람을 뽑자고 했는데 임원 10명 중 8명이 반대했다. 파업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으니까. 경영본부장은 ‘사람을 지금 채용하면 내보내지도 못하는데 뒷수습을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했다.

    ▼ 맞는 말 아닌가.

    “다행히 본사에 정규직 사원만 지금 1700명쯤 되는데 앞으로 4년 내 정년퇴직하는 인원이 250명 정도다. 방송이 컬러화하면서(인력이 많이 필요해) 그만큼 인력을 뽑을 수 있었다. 다른 데도 마찬가지지만 1~2년에 한 번씩은 후배들을 뽑아야 한다. 10년, 5년씩 갭이 생기면 별로 안 좋더라.”

    ▼ 방문진에서 해임 의결한 뒤 사표 내기 직전에 그 사안에 대해 결재했나.

    “그렇다. 보도국 같은 데서 평가를 다 했다. 새로 밖에서 후배들이 3~4차에 걸쳐 들어왔다. 1차에 들어온 사람 대부분은 보도국에서 써보고 괜찮다고 했고, 2명 은 보도국 간부들이 안되겠다고 해서 글로벌사업본부 사원으로 다 채용했다. 기자 출신이니 적응력이 뛰어나고 경영 쪽에만 있던 사람들과는 다른 시도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 방문진의 해임 결의 후 착잡하지 않았나.

    “그보다는 시원섭섭하다고 할까? MBC 입사했을 때 꿈은 부국장이었는데 그 이상을 누렸고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대학 다닐 때는 언변도 좀 있고 나서기도 좋아하고 서클활동도 하고 해서 꽤 유명했는데 MBC 들어와보니 우수한 놈이 너무 많았다. 그때는 정치부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난 사회부 기자, 보도 제작,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다. 1985년에 처음 남극을 탐험한 일이 생각난다. MBC가 주최한 행사였는데 그때 남극탐험에 성공해서 우리나라가 남극조약에 가입하고 남극에 기지를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

    ▼ 거기서 죽을 뻔했다던데.

    “다큐멘터리 오프닝 커트 찍느라고 배경이 멋진 언덕으로 갔는데, 가도가도 거기가 거기인 것 같더라. 고글을 쓰고 있었는데도 완전히 설산이라 착시현상이 일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헬기 조종사가 위에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고리도 안 맨 상태였고 순간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푹 꺼지면서 늪처럼 가라앉았다. 일종의 크레바스였다. 한쪽으로 쓰러지면서 단단한 곳을 잡고 내 발자국 따라 기어나오는데 ‘이제 죽는구나’ 싶더라. 알고 보니 조종사는 크레바스 지역이니 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 거였다. 그 뒤로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때를 떠올린다. 죽을 고비를 넘긴 걸 보면 내 목숨이 질긴가보다.”

    ▼ 노조에서는 반정부적인 기사, 정권에 민감한 기사들을 걸러냈다고 주장했다.

    “힘들게 취재해온 기사를 빼면 나라도 항의했을 거다. 그런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난 기사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 MBC에 언제부터인가 ‘정치 사원’이 많이 생겼다. 나도 예전엔 노조원이었다. 1987년에 노조가 처음 생겼고 보직부장이 되면 자동 탈퇴하게 돼 있는데 내가 탈퇴 2호였다. 사실 내가 좀 반골이었다. 옛날 생각해서 취재에 간섭하지 않는다. 기자가 종일 죽기 살기로 취재해 온 걸 모두 담아낸 기사를 빼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럼 ‘PD수첩’이 취재한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은 왜 방송을 취소시켰나.

    “그건 내가 아니라 임원회의에서 조치했다. 회사에서는 우리 PD수첩팀을 ‘독립군’이라고 한다. 그 팀은 50분짜리 방송을 만들면 그걸 그대로 내보낸다. 담당 국장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거의 그랬다. 그런데 PD수첩 때문에 광우병 문제가 발생한 거 아닌가. 그래서 정권 들어설 때 난리가 났었고. 광우병에 대한 녹화테이프도 우리 임원들이 다 같이 봤다. 토론을 벌이고 필요한 부분은 설명도 듣고 그랬는데, 이후 어떤 생각을 갖게 됐냐면…MBC 이름으로 나가는 프로그램이면 PD수첩이건 뭐건 간에 담당 국장과 본부장이 잘 봐야 하고, 만일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보충취재를 요구하거나 타당성을 설명하도록 하기로 했다.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은 편성본부장이 본 다음 문제를 제기했고, 담당 PD에게 설명을 요구했는데 부족한 게 있었다.”

    ▼ 어떤 문제였나.

    “직접 보진 않았다. 사장이 보면 곡해할까봐 보고만 들었는데 한쪽으로 몰아갔다. 담당자들이 일부 인정했다. 임원들이 논의한 결과 이대로 방송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보완하라고 했다. 일부 수정해서 일주일 뒤에 방송 내보냈고.”

    MBC, 좌편향서 중도로

    ▼ 그럼 왜 공정보도 논란이 끊이지 않은 건가.

    “예전엔 MBC가 중립이었다. 노조도 항상 우린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중도가 아닌 좌쪽으로 기운 기사를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민노총, 민노련, 그다음이 MBC 본부 아닌가. 우리 선배들이 보기에 그건 아니거든.”

    ▼ 너무 좌편향이다?

    “그렇다. 이걸 중도로 돌리려고 한 거다. 어느 정권에 유리하게가 아니라. 그런(‘4대강 수심…’ 방송 최소) 요청은 한 적도 없고 내 자신이 용납하지 않는다. PD수첩을 없애자는 얘기 나왔을 때도 반대했다. PD수첩이 우리 회사의 힘인데 그걸 왜 없애느냐, 바보같이. PD수첩은 당연히 있어야 된다. 그래야 사장한테 항의하는 사람도 있고 항의하러 오는 데도 있고 재벌도 견제하고 정부도 견제할 수 있다. 그게 언론의 기본 사명인데 그걸 놓쳐선 안 된다. 공정방송을 해야 하고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민주당이나 시민단체, 진보 언론에서 볼 때는 MBC가 지금까지 좌로 기울어져 있어서 정도(正道)를 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쪽저쪽 다 비판하니까 기분 상한 게 아닌가 싶다.”

    MBC 시청률은 2011년 모든 부문에서 1등이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4개 지상파 방송사 중 꼴찌였다. 김 전 사장은 그 이유로 “170일간 이어진 파업”을 들었다. 그는 임원회의에서 “올해 상반기에 회사 경쟁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결과보고서를 내고 6월에 회사를 떠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경쟁력을 높일 자신이 있었다. 지난해 7월 18일 후배들이 돌아온 뒤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포맷이 비슷한 ‘놀러와’와 ‘세바퀴’ 중에서 시청률이 급격히 떨어진 ‘놀러와’를 폐지하고 대신 일밤‘아빠 어디 가’ ‘나 혼자 산다’같은 프로를 개발해냈다. 또 8시 뉴스 전후로 드라마와 ‘컬투쇼’ 같은 예능프로그램을 편성해 뉴스 시청률이 9%대를 달리고 있다. 곧 두 자릿수 시청률을 회복할 것이다.”

    ▼ 노조원들의 마음을 왜 움직이지 못했나.

    “사실 울산MBC 사장 3년, 청주MBC 사장 2년을 하는 동안 서울에 있는 후배들을 거의 못 봤다. 그 시간이 문제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2010년에 처음 사장이 됐을 때 우리 노조가 밀던 분이 따로 있었다. 구영회 (MBC 미술센터) 사장이라고. 나와는 고려대 동기인데 당시 이근행 노조위원장의 선임인 박성제 전 노조위원장이, 구영회 사장이 정치부장 하던 시절 그 밑에 있었다. 둘이 굉장히 친하다. 박성제 위원장이 굉장히 강력한 위원장이었다. 이근행 위원장 체제라고 하지만 사실상 박성제 전 위원장이 모든 걸 하고 있었고 처음에 날 반대했다.”

    ▼ 이명박 전 대통령과 친했다던데 그래서 사장이 된 건가.

    “친한 건 맞다. 그런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겠다. 그런데 난 정치권의 K고문과도 절친하고, 최근 날 가장 많이 공격했던 P의원과는 제일 친한 사이다. 형수가 집사람하고도 잘 안다. 그러니까 대권이라는 게 참 무섭다. 정치부 출신이니까 안다. L수석도 P의원과 절친한 사인데 당하지 않았나. 그게 권력의 무서움이다. 대권을 잡기 위한….”

    ▼ 어쩌다 ‘MB 사람’으로 분류된 건가.

    “2007년 9월 울산에 있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형이 한양대병원 부원장이었는데 어머니가 거기서 임종하셨다. 당시 대통령후보였던 MB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비서관한테 전화가 와서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이미 와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있다 갔는데, 나중에 들리는 얘기가 김재철이 MB맨이라고 정보 보고가 들어갔다고 하더라.”

    마음의 스승

    ▼ 언제부터 가까워졌나.

    “만난 지는 오래됐다. 원래 민주당에 출입하다가 김대중(DJ) 선생이 낙선 후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나자 출입처가 신한국당으로 바뀌었다. 그때 여당에 필드반장으로 갔는데 한때 보도국에서 내 별명이 영국신사였다. 영국에서 1년 연수를 하고 와서. 보도국에서는 욕하면 나쁜 놈이 되는 5명이 있었다. 후배들에게 잘하고 선배 잘 모신다고 해서.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엄기영, 김승한, 박광온와 함께. 어쨌든 신한국당에 갔는데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MB가 처음 왔다. 같은 고려대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우연히 밥을 먹게 됐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내가 인복이 좀 많다. 정치부에 있으면서 야당 출입할 때 DJ 선생이 나와 따로 식사도 하고, 저녁에도 같이 식사하고, 또 봉투까지 챙겨주면서 이건 반드시 집사람한테 줘라, 새 옷 사 입어라, 이렇게 신경을 써주셨다.”

    ▼ 그거, 촌지 아닌가.

    “촌지인데 그건 안 받을 수 없는 촌지다. DJ 스타일은, 성의를 보여서 그걸 했는데 거절하면 인간관계를 끊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있다. 그 봉투는 촌지 이상의 다른 의미다. 마음을 담아서 하시기 때문에. 내가 DJ 선생을 굉장히 존경한다. 정치인 중에서 DJ 선생을 보고 가장 많이 배웠다. DJ 선생의 좋은 점이, 그분이 술을 먹나, 골프를 치나. 오직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 자기 길을 정리해가는 분이다. 지도자는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게 DJ의 철학이다.

    그래서 나도 외로운 시간을 많이 갖는다. 아침에 꼭 한 시간씩 산보하면서 생각을 많이 한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침에 5시 15분이면 일어나서 신문 6개를 다 본다. 먼저 한겨레, 경향, 한국일보는 반드시 본다. 3년 1개월을 그랬다. 요즘은 자유인이 됐으니까 한겨레, 경향, 한국에서 뭘 썼는지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조중동 본다. 난 취재기자로 민주당에 갔지만 DJ 선생을 정말 스승처럼 모셨다. 케임브리지 가시기 전 고별사도 내가 했다.”

    ▼ 고별사?

    “DJ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담아 즉석으로 해야 했는데, 주위에서 ‘김 차장이 하는 게 제일 낫지’ 하더라. 그의 철학을 옆에서 보고 너무 많은 걸 느껴서 절로 고별사가 나왔다. ‘선생님은 나한테는 스승 같은 분이다. 그래서 너무 아쉽고, 또 선생님이 안 되셔서 마음이 아프다. 우리 선생님 뵐 날을 기다려야겠다.’ 그때는 정말 DJ 선생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적으로는 MB나 다른 많은 분보다도 김대중 선생한테 가장 많이 배웠다.”

    ▼ 파업이 장기화하기 전 노조와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유가 뭔가.

    “나름대로 타협점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1월 30일 파업을 시작했을 때는 한 달이나 한 달 반쯤 갈 줄 알았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불법 파업이니까 후배들을 잡아갈 텐데 그건 회사로서도 안 좋은 일이고 개인적으로도 내키지 않아서 한 달 반을 밖에서 업무를 봤다. 화 좀 식히라고 그랬다.

    슬슬 가라앉겠지 했는데 4·11 총선 앞두고 파업을 시작했다. 대체 인력을 투입하고 우리 간부들이 전력투구해서 방송은 계속 나갔는데, 노조위원장이 한번 만나자고 하더라. 노사가 다 믿을 수 있는 국장 입회하에 얘기를 했다. 노조위원장은 보도국장, 보도제작국장, 편성국장, 라디오국장, ‘PD수첩’ 하는 시사제작국장까지 5개 국장 후보를 2배수로 추천할 테니 각기 한 명을 골라 쓰는 걸로 하면 지금까지 내게 가졌던 의혹을 바로 풀고 자기네가 사과하고 내년 임기까지 잘 모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당신들이 최충헌, 최우처럼 도방을 운영하고 나보고 고종 하라는 거냐. 고종은 얼굴만 왕이니까 MBC를 위해 그렇게는 못하겠다, 하루를 하더라도 사장답게 하다 나가겠다, 그게 내 뜻’이라고. 그 다음부터 더 야멸차게 인신공격을 퍼붓고 법인카드, 무용가 J씨에 관한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집사람과 딸, 형제들까지 격려해줬다. 가족들이 J씨를 다 아니까.”

    J씨와의 인연

    “후배들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정치 노조’는 끝내야”

    김재철 전 MBC 사장이 프로그램 개발에 열을 올린 후 탄생한 ‘일밤-아빠 어디 가’.

    ▼ J씨와 어떤 관계인가.

    “비즈니스 관계다. 일본 특파원 시절 알게 됐는데 최승희 사진첩을 특종으로 줘서 요긴하게 썼다.”

    ▼ 노조는 J씨한테 일거리나 공연비 등을 퍼줬다고 주장했는데.

    “노조에서는 J씨한테 20억 원을 공연비로 줬다고 하는데 그중 10억~11억 원은 뮤지컬 ‘이육사’에 들어간 비용이다. 그 뮤지컬도 내가 기획했는데 J씨가 출연하고 싶어 했다. 다른 데 맡기면 돈이 더 드니까 안동 MBC에 철저히 관리하게 하고 그 돈을 대부분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10억 원 정도 후원받았는데 작품은 성공적이었다.”

    ▼ 인사 청탁은 안 들어왔나.

    “청탁이 많았다. 하지만 내 나름의 방식대로, 이 시점에 우리 회사에 필요한 인물이 누구냐는 판단하에서 결정하니까 존중해줬으면 좋겠다고 하고 청탁은 다 물리쳤다. 내 뜻대로 했다. MBC에서 이권에 개입하거나 돈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100만 원 이상은 뇌물이다.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왔다. 그걸 늘 실천했고. 근데 인사와 관련해 돈을 들고 집으로 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번은 전복 선물에 돈 1500만 원이 들어 있었는데 집사람이 내 성격을 아니까 전복 물에 젖은 돈을 다 말렸다. 일 때문인 것처럼 그 사람을 올라오게 했다. 아무도 모르게 돈을 돌려주면서 그랬다. ‘이게 마지막이다. 선배가 생각나면 전복만 보내줘. 고맙다. 전복만 잘 먹을게’라고. 그런 적이 서너 번 된다. 돈에 손댄 적은 전혀 없다. 집사람도 그건 확실하다.”

    ▼ 법인카드는 왜 그렇게 많이 쓴 건가.

    “2년 동안 법인카드로 7억 원을 쓴 건 사실이다. 근데 5억 원은 비서실장과 비서실 차장, 수행비서가 갖고 다니며 계산한 거다. 예를 들어 1년에 한 번 올해를 빛낸 MBC 50인을 뽑아서 호텔에서 상을 주는데 거기서 밥만 먹겠나. 사장이 성의를 보인다고 1인당 50만 원 정도 하는 숙식권을 준다. 그럼 하루에 2800만~3000만 원이 든다.

    선물도 좀 많이 한다. 밥값도 항상 내가 낸다. 국민은행장, 농협회장 같은 사람들이 놀란다. 우리 비서가 다 계산했으니까. 그럼 우리 MBC에 우호적이 되고 우리를 더 독특하게 생각한다. 협찬도 더 많이 들어오고. 아마 내가 MBC 역사상 협찬을 가장 많이 받아온 사장일 거다. 1년에 한 80억 원씩은 가져왔으니까.

    스타 관리에도 썼다. 일례로 ‘선덕여왕’이 끝났을 때 드라마본부장한테 이요원 씨는 이미지가 좋으니까 밥을 한번 사야겠다고 했다. 그런 뒤 드라마본부장과 같이 가서 식사하기 전에 미리 선물을 골랐다. 약속시간보다 한 30분 먼저 가 있고. 상대 이미지 고려해서 사니까 반응도 좋다. 이요원 씨한테 가장 좋은 거 사준 것 같다. 120만 원짜리. 우리 MBC에 대한 기여도가 높아서다.”

    ▼ 졸지에 백수가 됐는데 미련은 없나.

    “크게 없다. MBC 공채기자 14기로 입사해 회사의 은혜로 30년 넘게 MBC맨으로 살았고, 지난 3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고지가 멀지 않았는데 MBC를 1등석에 올려놓지 못하고 나온 게 좀 아쉽다.”

    ▼ 방문진의 해임 의결이 억울하진 않나.

    “억울한 점은 내가 소화해야 될 부분이다. 2010년에 사장 되고 나서 인사할 때도 김우룡 당시 방문진 이사장 인터뷰 기사가 ‘신동아’에 나와 시끄러웠잖나.”

    ▼ 김우룡 전 이사장의 ‘조인트’ 발언은 사실인가.

    “사실이 아니다.”

    “꼬투리 잡혔다”

    ▼ 그럼 김 전 이사장은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내가 보기에는 김우룡 이사장이 좀 마음이 상했던 게, 그분이 이사장 되신 뒤 MBC에 좀 욕심을 내신 것 같다. 본인이 직접 통치 비슷하게. 이게 결정적인 게, 나한테 인사를 몇 가지 요구했다. 지역사 사장, 자회사 사장에 대해서 3명 정도 인사를 요구했는데 계속 미루다 내 뜻대로 했다.”

    ▼ 이후에는 방문진에서 그런 요구가 없었나.

    “별로 하지 않았다. 2010년엔 그렇게 끝났고, 2011년 인사도 자유롭게 했다. MBC 사장은 방문진 이사 9명이 선정하는 거고, 그 밑에 기획이사·편성이사 같은 등기이사는 내가 2배수, 3배수 추천한 후 상의해서 결정한다. 지역사, 자회사 사장 인사는 원래 MBC 사장이 하는 게 맞는데 국회에서 만든 방문진법과 정관에도 없는 하위개념의 ‘방문진의 MBC에 대한 관리지침’을 방문진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거기 보면 ‘지역사, 자회사 사장이나 임원은 방문진 이사들과 협의하에 의결한다’고 돼 있다. 그래서 2010년부터 해마다 협의했다.”

    ▼ 그럼 이번에는 협의를 안 했나.

    “협의했다. (김문환) 새 이사장이 선출된 날 밤 10시쯤에 이진숙(MBC 기획홍보) 본부장과 셋이 만났는데 그날은 명단만 보고 나서 내일 얘기합시다, 그래서 다음 날 둘이 만났다. 그때 ‘이사장 되자마자 청탁이 많아서 나도 머리가 아픕니다’ 그러기에 내가 ‘이사장님, 인사는 그래서 지금 빨리 해야 됩니다’라고 했다. 방문진에서 싸움이 나서 3주 정도는 펜딩(pending)돼 있었다. 이사장도 그러시고 당시 우리 회사에는 지역사, 자회사 사장 인사가 늦어질 거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시간을 자꾸 끌면 회사가 시끄러워지니까 이왕 하는 거 빨리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인사 명단을 이사장과 봤다. 이사장은 사실 우리 시청자위원장을 2년을 해서 이 사람은 사람이 괜찮더라, 어떻더라 하고 의견만 제시했다. 인사는 김 사장이 다 아는 거고, 빨리 해야 한다는 의견도 주고, 나도 청탁 들어와 머리가 아프다며 동의한 거다.”

    ▼ 명단 보고 요구한 건 없나.

    “누구를 빼고 누구로 해달라고 한 적은 없다. 다만 최창영 방문진 사무처장은 원래 (명단에) 우리 자회사 이사로 돼 있었는데 이사장이 말하기를, ‘그 친구는 쓸 만한 친구여서 처장을 더 하는 걸로 내가 불러서 얘기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 그럼 내가 빼도 되겠네요?’ 하면서 빼고 다른사람을 시켜준 거다. 내 안(案)대로 다 됐다. 그렇게 해서 난 인사가 협의된 걸로, 협의했다고 생각했다.”

    ▼ 인사 협의를 이사장하고만 하면 되나.

    “원래 이사회하고 하는 건데 당시 방문진의 사정상 이사장과 두 차례에 걸쳐 만나 협의한 거다. 이사장의 안은 그대로 됐고. 그래서 내정으로 했다.”

    ▼ 방문진 이사들 앞에서 이사장이 협의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나.

    “인정 안 했다. 야당 이사들이 공격하면 이사장이 그건 내가 협의를 했다, 이러면 이사장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그냥 넘어갔겠지. 야당 이사들이 나한테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해임안이 3번이나 부결됐으니까. 내가 꼬투리를 잡혔다.”

    ▼ 해임 의결, 예상 못했나.

    “못했다. 임기가 남아 있고 인사 문제 아닌가. 지역사, 자회사 사장이나 임원 인사는 방문진과 협의 사항이지 합의 사항이 아니다. 이사장과 협의도 했다. 그래서 지금 소송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지역사, 자회사의 대주주는 MBC다. 그럼 MBC 사장이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

    김재철의 눈물

    ▼ 방문진에서 눈물 보인 건 억울해서인가.

    “야당 최강욱 이사가 나한테 물었다. ‘사장님, MBC 후배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라고. 그래서 ‘나는 최고의 콘텐츠를 가진 글로벌 문화방송을 만드는 게 꿈이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3년 1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고 얘기하다가 그간의 일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

    그의 해임안에 대한 표결은 그가 자리를 뜬 후 진행됐다. 야당 이사 3명과 여당 이사 6명 중 2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 왜 다음 날 바로 사표를 낸 건가.

    “내 명예도 있지 않나. 아울러 방문진의 의결을 존중한 거고. 주총에서 의결하기 전까지는 사장이니까 내가 사직서를 쓸 수 있다. 경영본부장에게 물어보고 사표를 낸 거다.”

    ▼ 징계받은 직원들은 어떻게 됐나.

    “계속 들어오게 한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 내서 들어오게 했다. 명분이 필요하니까. 54명은 최근 들어와서 우리 임원들이 발령을 냈다. 일부는 제자리 찾아갔고, 일부에게는 다른 일을 준 것 같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다들 제자리로 갈 거다.”

    ▼ 해고된 사람들도?

    “그렇다. 지금 해고에 대한 무효소송 중이니 돌아올 거다. 시간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어떤 사유로든 후배들이 해고된 건 가슴이 아프고, 말할 수 없이 힘들다. 그렇지만 이제 정치 노조는 끝나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장기 파업으로 노사가 다 많이 배웠다. 앞으로 MBC가 콘텐츠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꼴찌 방송이 된다. 지금 갑작스럽게 짱돌처럼 튕겨 나왔지만, 3년 1개월 동안 함께한 분들이 격려 편지도 주고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온다. ‘김 선배, 지금 힘드시겠지만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고.”

    김 전 사장은 그의 표현대로 “짱돌처럼 튕겨져 나와 졸지에 백수”신세가 됐다. 향후 거취에 대해 묻자 그의 낯빛이 환해진다.

    “책도 쓰고 유앤아이컴퍼니라는 회사를 차려 그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살려 한국형 문화예술 기획자로 새로운 삶을 살 계획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갑자기 회사를 나오면서 그동안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후배들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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