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한혜정 교수는 말한다. “모든 걸 휘발시켜버릴 듯 초고속으로 달리는 롤러코스터 에서 잠시라도 내려 쉴 수 있는 장소를 남겨둬야 한다. 풀 한 포기 뽑지 않고 돌멩이 하나 건드리지 않고 시간을 머금고 남아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 시간의 리듬과 기억이 묻어 있는 사색의 장소, 만남의 장소가 필요하다.” 만약 그런 장소가 있고, 그런 장소에서 사람들의 만남이 이뤄진다면, 굳이 저 산속의 그 무슨 힐링캠프를 찾아 떠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한옥과 미술관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으로 걸어가는 것. 쌀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봄 아닌가. 답안지는 쉽게 제출되었다. 일행 중 넷은 담뱃불을 끄고 나서 골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둘은 지하철을 타러 안국역으로 내려갔다.
골목을 걷는다는 것! 이런 경험이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걷자마자 옛 기억이 순식간에 마음속 스크린에 펼쳐졌다. 몸은 안국동에서 삼청동 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마음은 저마다의 유년시절로 돌아갔다. 누군가 제 유년시절의 골목을 이야기하면 1초도 망설임이 없이 모두들 저마다의 기억을 스캔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마음속으로 봄바람이 살며시 들어왔다.
옳거니 힐링이라! 결국 그 많은 힐링 프로젝트는 자기의 ‘쌩얼’을 마주하는 일 아닐까. 그렇다면 기억을 되살리는 것, 제 삶의 지나온 자취를 환기하는 것, 그것이 힐링의 시작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나는 북촌의 골목을 걸으면서 가져보았다.
골목에 앉아 구슬치기 하던 기억,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서로 마주 보며 나란히 서 있던 대문들, 담벼락의 낙서, 그 낙서 위로 피어오른 꽃들, 비좁은 거리며 공터나 골목에서 공을 차다가 그만 가게의 유리창을 박살내던 기억. 아, 그때는 조무래기들이 시끄럽게 떠들다 어느 집 할아버지가 “인석들아, 공터에 가서 놀아!” 소리치면 모두들 키들키들거리면서 우우우 골목을 빠져나가곤 했다. 하긴 요즘이야 동네 할아버지들이 아파트 단지의 꼬마들에게 함부로 고함도 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튼 그런 기억이 안국동에서 삼청동에 이르는, 그러니까 ‘북촌’이라고 흔히 부르는 길을 걷는 와중에 우르르 몰려나왔다. 꽤 많은 사람이 평일 오후의 산보를 즐기고 있었다. 이 시간대의 북촌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어디 먼 데로 힐링 코스를 찾아 떠날 필요도 없을 만큼 여유 있는 웃음이 가벼운 발걸음들 사이에서 툭, 툭 터져 나왔다. 쌀쌀하긴 하였으나 그런 기억들로 인하여 봄이 온 듯하였다.
“넘칠 때 낭비하는 건 미덕”
박완서의 단편 ‘그 남자네 집’을 생각한다. 이 애틋한 단편은 작가의 회심에 의하여 동명의 장편으로 개작되었다. 개작 장편은 읽어보지 못했다. 최인훈이 ‘광장’을 여러 번 고쳐 쓴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노년의 박완서가 단편을 장편으로 힘겹게 개작한 데는 남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개작 장편을 읽지 않았으니 그 행간을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이 노력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베토벤 만년의 작품을 논하는 마당에서 아도르노는 ‘후기 스타일’이라는 특별한 말을 썼소. 예술가란 만년에 이르면 모가 깎여 원만해진다는 식의 통념을 송두리째 뒤엎는 경우가 베토벤이라 했소. 원만해지기는커녕 더욱 격렬해졌으니까. 박완서의 후기 장편 ‘그 남자네 집’(2004)이 그러하다고 나는 여기고 있소. 성북동에서 살았던 시대를 떠올리며 집에도 영혼이 있다는 식으로 이끌어간 회고형 단편 ‘그 남자네 집’(2002)을, 불과 두 해 뒤에 장편으로 다시 쓴 것. 그렇소. 다시 쓴 것이오. 어째서 제목을 그대로 둔 채 장편으로 다시 썼을까.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격렬성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터. 왜냐면 이제 작품 쓰기의 한계에 닿았으니까. 말을 바꾸면 소설보다 훨씬 중요한 것, 소설 초월 혹은 소설 미달이어도 상관없는 그런 경지에 닿았으니까. 소설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떠랴. 써야 할 것을 써야 하니까.”
서울 종로구 통인동 통인시장.
노작가는 왜 젊은이들에게 삐쳐지려고 했는가. 단편에서(그리고 아마도 개작 장편에서도) 박완서는 저 6·25전쟁 직후의 스산한 서울 도심을 묘사했다. 그 시절에 살았던 돈암동 일대가 작품의 무대다. 작가는 공들여 돈암동의 그 시절을 묘사한다. “얌전하게 쪽찐 노부인처럼 적당히 품위 있고 적당히 퇴락한 조선 기와집 동네” 말이다. 그 시절의 한옥과 골목과 꽃밭. 그리고 사립여자대학을 중심으로 펼쳐진 오늘날 돈암동의 활달한 풍경. 그 사이의 기나긴 시간대를 작가는 서성거린다. 우선 전쟁 직후의 풍경을 보자.
“한길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대문이 보이지 않고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홍예문이 보였다. 홍예문은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문이었고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홍예문이 달린 담장과 기역자로 꺾인 곳에 달려 있었다. 난 왠지 문지방이 돌로 된 위압적인 솟을대문보다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홍예문에 더 압도당하고 있었다. 추녀를 나란히 한 고만고만한 조선 기와집하고는 격이 달라 보였다. 마침 짐을 나르던 청년이 우리 곁에서 머뭇대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노마님이 우리 막내라고 인사를 시켰다.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그렇게 만난 사이였지만 인연이 다 이뤄지지는 못했다. 서로를 갈망하였고 그리하여 ‘아슬아슬한 위기의식’까지 느꼈으나 이뤄지지는 못했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연애였고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었지만 무엇보다 육체적인 젊음과 금기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아니, 박완서는 소설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우리는 그때 플라토닉의 맹목적 신도였다. 우리가 신봉한 플라토닉은 실은 임신의 공포일 따름인 것을.”
到處 옷가게, 皆有 커피숍
옛 기억 속의 한옥과 골목과 천변의 밤 풍경 속에서 소설 속의 ‘나’는 사랑을 앓았고 미처 그 사랑을 온전히 다 풀어보지는 못했다. 그게 회한이 되었다.
그러나 단지 그 시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뿐일까. 그 정도라면 공들여 단편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개작하여 장편으로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완서는 그 시절의 풋내 나는 사랑의 기억을 어루만지면서 전쟁으로 인해 파괴돼버린 가족과 생의 윤리와 오로지 생존만이 유일법칙이 되었던 한 세대의 집합적 정한을 되살린다. 그런 시절에 비하여 오늘날 돈암동 일대는 언뜻 보기에 생의 희열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라고. 자기 세대는 그럴 수 없었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고.
1인칭 소설을 읽고 나서 ‘아, 작가의 개인사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큼 초보적이고 위험한 독후감도 없겠지만, 그러나 박완서 스스로 밝힌 바 있듯이, 그의 1인칭 소설은 대체로 그 자신이 겪은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임신의 공포’를 언급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낭만화’하지 않는 대가의 마침표였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 동네를 일컫는말. 효자동, 옥인동 등 15개 법정 동을 아우른다.
소설 속의 ‘나’는 여고 시절을 이 일대에서 보냈다. “당시 광화문을 중심으로 신문로, 안국동, 계동, 수송동 일대에는 열 개도 넘는 중고등학교가 몰려” 있었지만 꽤 많은 학교가 강남이나 목동 쪽으로 이전하면서 소설 속의 풍경은 이제 소슬해졌다.
그럼에도 평일 오후의 북촌은 서서히 옛 시절의 풍경으로 변해갔다. 아직 풍문여고와 덕성여고와 중앙고교가 건재하고 정독도서관(옛 경기고교) 또한 의연하다. “등교 시간만 되면 원남동에서 안국동까지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길은 제복의 남녀 학생으로 넘쳐났다. 만약 그 밀도가 조금이라도 성기어지는 기미가 보인다면 그건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신호니까 그때부터라도 뛰는 게 수였다. 우리 학교는 교장선생님까지 교문에 지키고 있다가 지각생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소설 속의 ‘나’가 박완서라면 그 학교는 숙명여고로 지금은 강남구 도곡동으로 옮겨갔지만 그 시절에는 조계사 인근의 수송동에 위치했다.
그런 기억들까지 두서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종의 즐거운 환각을 느끼며 걷던 걸음이 이윽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삼청동 쪽으로 넘어왔다.
오래전 시인 황동규는 시 ‘태평가’에서 “도처철조망(到處鐵條網) 개유검문소(皆有檢問所)”라는 말로 억압적인 시대의 풍경을 묘사하였으되 이를 오늘의 세태에 견줘 다시 쓴다면 ‘도처옷가게 개유커피숍’쯤 되려나, 아무튼 북촌은 카페와 가게로 이뤄진 쇼윈도 거리였다.
하아, 이런 곳에서는 사랑마저 퍼포먼스가 될 듯하다. 고즈넉한 한옥마저 일종의 ‘테마파크’가 되어버렸으되, 만약 그 생김새나 간판 따위가 현저히 조잡했더라면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지난겨울, 대구의 옛길을 찾아갔을 때, 그곳의 풍경이 또한 그러했다.
대구 옛길에서 思友하다
서촌의 골목길
진골목 입구에서 먼저 찾아볼 만한 곳은 ‘정소아과의원’이다. 2층의 단아한 양옥 건물은, 주변에 일동 기립한 고층 빌딩으로 인하여 상당히 퇴락한 느낌을 주지만 바로 그 점이 오히려 견고한 기억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약전골목 거쳐 경상감영공원 일대까지를 김원일은 소설 ‘마당깊은 집’에서 그려냈다. 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있고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가였던 서상돈의 집이 있으며 또한 그밖의 여러 근대 건축물이 서 있는 곳이다.
약전골목, 즉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 약령시의 끄트머리에 제일교회 구당이 있고 거기서 좀 더 가면 계산성당이 나온다. 마치 유럽의 고도(古都)처럼 구한말에서 20세기 현대사의 여러 편린과 사건과 기억들이 1km 남짓한 ‘대구 옛길’ 전체에 동아리를 이루는 형상이다. 이 건축물들은 식민지 치하의 피폐함이나 전쟁통의 정신적 위기를 든든히 버텨주었다. 거기서 큰 도로를 건너면 3·1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된 90계단을 거쳐 청라언덕으로 올라가게 된다.
청라언덕? 그렇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나는 흰나리 꽃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가곡 ‘동무 생각’이다. 1922년 작품으로 원제는 ‘사우(思友)’였으나 쉽게 풀이하여 ‘동무 생각’이 되었는데, 당시 마산 창신학교 교사 박태준이 고교시절, 그러니까 대구 계성학교 다닐 무렵에 인근 신명여고 여학생과의 짧은 인연이 소재가 된 곡이다.
‘대구 옛길’은 이렇게 대구 사람의 현대사 수십 년이 농축된 곳이다. 격랑의 역사 속에 빚어진 작은 사람들의 작은 기억들. 그것을 기억하고 복원하고 재현하지 않는다면 모든 도시인은 힐링을 위하여 무조건 도시 바깥으로 탈출해야만 할 것이다.
“다 외로운 분들이지예”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옛 골목이나 건축물을 단지 보존하거나 재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곧 박제화해 테마파크로 변할 것이고 그저 사람들이 나들이 나와서 사진이나 찍고 돌아가는 ‘획일화된 콘텐츠 상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나는 지난겨울, 차디찬 겨울바람을 피하여 쌍화차로 유명한 ‘대구 옛길’의 ‘미도다방’에서 그런 생각을 한참 했다. 차림새만 옛날 다방인 게 아니라 오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사람이나 모두들 옛사람의 정취로 마주하는 미도다방, 그곳의 주인 정인숙 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찾아주시는 어르신들은, 뭐랄까예, 다들 외로운 분들이지예. 다른 데 좋은 거 있으면 뭐하러 여길 오겠습니꺼. 어르신들이 찾아오시면 말벗 해드리고 안부 여쭙고, 그게 전부지예. 그래도 그게 정이라고 날마다 어르신들이 찾아오십니더. 하기사 요즘 어르신들이 어디 동네에서 큰소리라도 내면서 사시지도 몬하고, 그렇지예. 그게 다 정이지예.”
이제는 그런 장소들마저 사라진다. 이 새로운 도시에서, 장소와 인간이 맺었던 오랜 관계가 해체된다. 사람들 저마다의 경험이나 정서적 관계가 상실된다. 온 도시의 골목과 거리와 주택들이 아파트 단지로 급변한다.
대대적으로 공간을 해체하는 경제권력이나 획일화한 삶의 패턴을 강요하는 문화권력이 장소들을 테마파크로 만들어버린다. 도시 전체가 애드벌룬과 전광판과 현수막으로 뒤덮인다. 그 지역의 역사성은 상실되고 주거 환경은 해체되며 인간적 교류와 교감이 있었던 장소성도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작은 마을들, 그 공동체들도 모조리 파탄나고 있다.
그러니 쌀쌀한 봄바람에도 북촌을 찾아 걷는 사람들 마음은 조촐하나마 갸륵한 것이다.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가 북촌마을을 두고 “이쯤에선 보행인이건 운전자건 모두가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가야 한다. 신호등 같은 건 없다. 모두가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며 천천히 가기 때문에 이곳은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느낌을 준다. 길가 야외카페에 앉아 있어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모두가 배려하며 건너는 건널목은 사람의 속도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을 확보해준다”고 쓴 것은 단순한 풍경 묘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잃어간다며 작고 오래된 것, 정겨운 것, 시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고 조한혜정 교수는 덧붙여 쓴다. 사실 이 글은 북촌 일대에 도로를 내겠다는 종로구청의 고갯길 정비사업에 반대하기 위해 쓴 것인데, 우선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더 견실하다.
서촌에서 내려다본 서울도심.
이진수(70) 씨와 형제이발관
나는 내친김에 걸음을 서촌으로 옮겼다. 통인동과 옥인동, 누하동 일대가 서촌이다. 북촌에도 한옥이 있고 서촌에도 한옥이 있다. 북촌에도 카페가 있고 서촌에도 카페가 있다. 북촌에도 갤러리가 있고 서촌에도 갤러리가 있다. 북촌에도 풍문여고와 중앙고교가 있고 서촌에도 경복고교와 배화여고가 있다.
그러나 북촌에는 없고 서촌에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통인시장이다. 시장이 있다는 것은 서촌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다. 미장원이 있고 문방구가 있고 떡볶이집이 있고 구멍가게가 있다.
최근에 이곳의 한 건물로 입주해온 도서출판 너머북스의 이재민 대표는 “동네 꼬마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다들 자기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 그 점이 놀랍다. 저마다 서촌의 골목을 자기 식으로 사용한다. 조금씩 불편하지만 서로에게 불쾌하지는 않다. 아파트 단지에 가면 어르신들이 복지센터나 노인정 방에 들어가 계시는데, 여기 서촌에서는 다들 골목에 나와 있다. 그 곁으로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면서 달려간다. 더 이상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아직 서촌에는 남아 있다”고 말한다.
2012년 9월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교수가 1936년 지어진 체부동의 낡은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있다.
‘신동아’ 2012년 10월호가 소개한, 송화선 기자가 만난,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당시 인터뷰에서 했던 말도 이런 맥락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북촌의 한옥은 사는 집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 됐잖아요. 저마다 집을 번듯하게 고치는 바람에 동네의 풍경이 꼭 영화세트장 같아졌어요”라고 말하면서 “서촌에서 진정 가치 있는 것은 한 채 한 채의 집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 형성된 골목길과 그 안에 자리 잡은 주민 공동체”라고 말했다.
2010년 서울시는 서촌 한옥마을 보존과 관련된 ‘경복궁 서측 제1종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발표해 일단 이 지역이 불도저를 앞세운 재개발의 철거 위협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주민들의 마을에 대한, 마을공동체에 대한, 이 마을을 근거로 한 살림살이에 대한 애착과 참여는 더 짙어졌다. 20대의 젊은이들이 고속질주하는 무한경쟁의 궤도에서 벗어나 서촌의 골목으로 들어와 ‘작은 삶’을 일구기 시작한 것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형제이발관 앞에서 이진수(70) 씨를 만났다. 그는 서촌 일대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고 했다. 서촌의 매동초등학교를 나온 그는 지금 자신이 자랐던 마을을 다시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는 “변할 만한 것은 변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형제이발관만 해도 햇수로 60년 세월이 되는데, 그 이력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서촌이 북촌과 다른 점을 그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삶’이 생략된 힐링, 이 당대의 고통이 삭제된 힐링, 일상 속의 작은 일들이 말갛게 소거된 힐링은, 진짜 힐링이 아니라는 것을 서촌은 의연히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불안해하는가. 우리는 왜 잠깐의 여유도 없이 늘 전전긍긍 초조해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관계’가 다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웃도 없고 가족도 없는 창백한 상황에서 간신히 ‘힐링’이라는 말 한마디를 움켜쥐었으되, 그 말조차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알이 되고 만다. 이런 정황에서 서촌이 말없이 보여주는 저 작은 일상의 ‘관계’들은 진정한 힐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